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짠돌이 독서 일기/꼬리에 꼬리를 무는 독서

약했기 때문에 살아남았다

by 김민식pd 2020. 7. 15.

어느 나라에 왕과 신하가 살았어요. 왕은 항상 맛있는 걸 먹었지만 신하는 그럴 수 없었죠. 맛있는 건 왕이 독차지했고 신하는 맛이 없는 것도 불평 없이 먹어야 했어요. 왕은 훌륭한 궁전에 살면서 늘 한가롭게 지냈습니다. 하지만 신하는 그럴 수 없었어요. 나라의 재정 관리를 위해 경제학을 배워야 했고, 다른 나라와의 교섭을 위해 외국어를 배워야 했어요.
생각해 보면 우리 인류는 신하와 비슷하고, 침팬지와 고릴라 같은 유인원은 왕과 닮았어요. 유인원은 삼림이라는 궁전에서 살았어요. 그곳엔 먹을 것이 풍부했고 육식 동물로부터 공격받을 위험도 적었죠. 반면 초기 인류는 나무가 듬성듬성한 초원에서 살았어요. 먹을 것이 부족하고 육식 동물로부터 공격받을 위험도 컸어요. 인류는 살아남기 위해 여러모로 궁리를 해야 했습니다. 왜 인류는 결국 쾌적한 삼림을 떠나 불편하고 위험한 곳으로 향했을까요?
신하는 스스로 원해서 신하가 된 게 아니에요. 왕이 되고 싶었지만 왕보다 힘이 약했고, 싸움에서 이기지도 못했어요. 울며 겨자 먹기로 신하가 된 거죠. 우리 조상도 숲속에서 계속 살고 싶었을 겁니다. 하지만 아프리카에서 건조화가 진행되며 삼림의 크기가 줄어들었어요. 힘이 약하고 나무에 잘 오르지 못했던 인류의 조상은 유인원에게 패해 삼림에서 쫓겨났어요. 그리고 쫓겨난 우리의 조상은 대부분 죽음을 맞이했어요. 하지만 그 중에서 운 좋게 살아남은 이들이 있었어요. 무엇이든 먹을 수 있고 어디서나 살 수 있었기에 가까스로 살아남았어요. 우리의 조상은 약했지만, 아니 약했기 때문에, 유인원이 갖지 못한 특징을 진화시켜 살아남았습니다. 그들의 후예가 바로 호모 사피엔스고요. 이런 우리 조상들의 이야기를 담은 책이 있어요.

<절멸의 인류사> (사라시나 이사오 / 이경덕 / 부키)

코로나라는 위기가 닥쳐오고, 가장 심대한 타격을 받은 나라들은 서구 선진국들입니다. 물질적 풍요와 막대한 자유를 누리는 나라가 오히려 바이러스 앞에 쩔쩔매고 있어요. 이유가 뭘까, 고민하다 책에서 이런 대목을 만났어요.


'19세기 빅토리아 왕조의 시대에도 지브롤터의 생활은 고통스러웠다. 위생 상태가 나쁘고 특히 마실 물이 부족했다. 유복한 집에서는 우물을 파거나 저수지에 빗물을 받아 사용했지만 가난한 집에서는 그럴 수 없었다. 당연히 유복한 사람들보다 더러운 물을 마셔야 하는 가난한 사람들의 사망률이 높았다.
그런데 어느 해 지브롤터에 심각한 가뭄이 닥쳤다.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가난한 사람들이 대부분 죽고 유복한 사람들이 일부라도 살아남았을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결과는 반대였다. 유복한 사람들이 대부분 죽고 가난한 사람들이 대부분 살아남았다.
이 결과는 다음과 같이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단순화해서 두 종류의 인간이 있다고 해 보자. 더러운 물을 마셔도 죽지 않는 ‘강한 사람’과 더러운 물을 마시면 죽는 ‘약한 사람’이다. 처음에는 유복한 집이나 가난한 집에 강한 사람과 약한 사람이 절반씩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가난한 집에는 강한 사람의 비율이 증가했다. 가난한 집에서는 늘 더러운 물을 마셔야 했기 때문에 약한 사람은 죽을 수밖에 없었다. 한편 유복한 집에서는 변함없이 강한 사람과 약한 사람이 비슷한 비율로 살고 있었다. 늘 깨끗한 물을 마시기 때문에 강한 사람뿐만 아니라 약한 사람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즉, 가뭄이 찾아오기 직전에는 가난한 집에는 강한 사람이 살고 있었고 유복한 집에는 강한 사람과 약한 사람이 절반씩 사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가뭄이 닥쳐오자 유복한 집이나 가난한 집 모두 더러운 물을 마셔야 했다. 그러자 가난한 집에 사는 사람은 강한 사람이기에 별로 죽지 않았다.
그런데 유복한 집에는 강한 사람과 약한 사람이 함께 살고 있었기에 약한 사람은 대부분 죽고 말았다. 그 결과 가난한 사람보다 유복한 사람 쪽이 더 많이 죽었다.' 

(161쪽)

위기는 진짜 실력을 드러내주는 시간이라 생각합니다. 코로나는 우리에게 성숙한 공동체 의식을 가지고 있느냐고 묻는 것 같아요. 고릴라나 오랑우탄이 숲 속의 왕이었다면, 우리는 가난한 신하였어요. 가난한 인류는 수렵채집으로 식량을 구했어요. 운 좋게 사냥에 성공하면 배터지게 먹고, 실패하면 쫄쫄 굶어요. 사자는 사냥을 하면 먹이를 입으로 물어서 나릅니다. 사냥감을 가지고 돌아가면, 새끼 사자들이 서로 먹으려고 다퉜겠지요. 강한 개체는 경쟁에서 이겨서 더 강해지고, 약한 개체는 영양 빈곤으로 결국 도태됩니다. 우리 선조들은 다른 전략을 선택해요. 두 다리로 서서 두 팔로 식량을 나릅니다. 수렵채집으로 마련한 음식을 손으로 날랐기에 어린 아기부터 늙고 병든 부모까지 모실 수 있었어요. 나보다 공동체를 우선했기에, 가난한 인류는 함께 살아남은 거죠.  

절멸의 인류사, 위기의 시간에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를, 윤리나 도덕이 아닌 과학의 역사와 절멸의 역사를 통해 처절하게 보여주는 책입니다. 고난의 시기에도 끝끝내 이겨낸 선조들의 지혜를 엿봄으로써 어려운 시기를 헤쳐 가는 용기를 얻을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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