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짠돌이 독서 일기/꼬리에 꼬리를 무는 독서

피케티에게 띄우는 편지

by 김민식pd 2020. 7. 29.

<자본과 이데올로기>를 읽고, 저자에게 편지를 쓰고 싶었습니다. 

토마 피케티 선생님에게

책을 읽고 저자에게 감사의 편지를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든 건 처음입니다. 이 책 덕분에 드라마 피디로 살면서 품어왔던 오랜 고민 하나가 풀렸거든요. 한국의 드라마에는 항상 재벌 2세가 나오고요.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나 자란 노동자가 어느 날 재벌 가문과 인연이 얽히면서 생기는 일들이 드라마의 소재로 자주 쓰입니다. 늘 이상했어요. 마치 연애와 결혼을 통해 재벌가에 입성하는 것이 평범한 사람들의 꿈과 희망처럼 그려지는 게 불편했습니다. 하지만 대중을 상대로, 대중이 좋아하는 이야기를 만들다보니 재벌 2세와의 로맨스를 아름답게 꾸며내는 데 최선을 다하며 살았어요. 이건 그냥 환타지일 뿐이야, 라고 스스로를 다독이면서요. 이 책을 읽고 저의 오랜 고민이 풀렸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자본에 포획된 삶이구나, 자본을 칭송하고 자본의 세습을 긍정하는 이데올로기에 길들여졌구나.’

토마 피케티는 이 책에서 “나는 이 세상의 문제를 한 방에 해결할 수 있다!”고 제안합니다! 세상을 바꿀 제안이라면 비록 그 책이 1297쪽짜리 벽돌 책이라도 한 번 읽어봐야겠지요. 세상의 문제는 무엇이고 해결책은 무얼까 너무너무 궁금하지만! 바빠서 아직 읽지 못한 분들을 위해, 제가 1297쪽의 이 엄청난 벽돌 책을 단 3줄로 요약해 전달해드리겠습니다!! 

<자본과 이데올로기> (토마 피케티 지음 / 안준범 옮김 / 문학동네)

책에서 피케티는 삼원사회라는 개념을 소개합니다. 사제, 귀족, 제3신분으로 이루어진 역사상 오래된 사회구조라고요. 사제는 종교적이고 지적인 계급입니다. 귀족은 군사적인 전사계급이고요. 제3신분은 그 외 나머지, 즉 노동하는 평민계급이지요. 이제 신분제 사회가 철폐되었으니, 귀족이나 사제 계급도 사라진 것 같은데요. 피케티는 현재에도 삼원사회는 이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과거의 사제 계급과 귀족 계급이 현재에는 브라만 좌파와 상인 우파로 바뀌었을 뿐이라고요.
 
‘사적소유를 둘러싼 양극적인 대결과 소비에트 공산주의가 끝난 뒤, 교육의 팽창과 ’브라만 좌파‘가 강력하게 부상하면서,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풍경은 완전히 뒤바뀌었다. (...) 다중엘리트체계가 들어섰고, 이 체계의 한편에는 고학력자들의 표를 사로잡는 ’브라만 좌파‘가 있고 다른 한편에는 상위 소득과 자산에서 항상 선두에 서는 ’상인 우파‘가 있다. (...)
‘브라만 좌파’는 학문적 노력과 능력을 믿는다. ‘상인 우파’는 사업에서의 노력과 능력을 강조한다. ‘브라만 좌파’는 학력 지식 인적 자본의 축적을 지향한다. ‘상인 우파’는 무엇보다도 화폐 금융자본의 축적에 의거한다.’
 
(831쪽)

여러분 혹시 테남 테북이란 말 들어보셨나요? 강남 강북도 아니고, 테남 테북? 같은 강남 안에서도 테헤란로 이북과 테헤란로 이남 부모들의 성향이 다르다는 거죠. 압구정동이나 청담동 같은 테헤란로 이북에는 강남 전통의 부자들이 삽니다. 강남 재개발로 큰돈을 번 땅 부자들이죠. 대치동이나 도곡동 같은 테헤란로 이남에는 전문직들이 삽니다. 학벌 좋은 고액 연봉자들이죠. 테헤란로 이남 사람들은 삶의 질을 좌우하는 것이 교육이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아이의 교육에 모든 자원을 집중합니다. 대치동이 사교육의 메카가 된 이유죠.
압구정에 사는 강남 전통 부자들은 굳이 아이의 공부에 올인하지 않아요. 좋은 대학에 못 가도 유학에 보낼 여유가 있고, 다녀와서 취직을 못 해도 부모가 사업을 지원해줄 수 있기 때문이죠. 전문직 부모는 대개 자녀에게 좋은 학벌을 대물림하고 싶어 아이의 입시에 집중하고, 땅 부자 부모는 아이에게 비싼 건물을 물려주고 싶어 합니다. 서로 다른 가치관을 가진 것 같지만, 브라만 좌파도, 상인 우파도 결국 같은 목적을 가졌어요. 자신의 부를 다음 세대에 물려주려고 애쓰는 건 똑같거든요. 테남 테북 나눠도 결국 다 강남인거죠

토마 피케티는 우리 시대, 심화된 불평등을 해소할 방법으로 누진 상속세를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고액 상속에 적용되는 누진상속세 세율은 20세기에 대부분의 선진국에서 30~40%에 달했다. 심지어 미국과 영국에서는 수십 년간 70~80%였다. 이 누진세는 실제로 영구소유를 일시소유 형태로 바꾸는 일이다. 달리 말해, 각 세대는 막대한 재산을 축적할 수 있지만 다음 세대 또는 잠재적 상속인에게 양도시 재산의 상당 부분을 공동체에 반환해야 한다는 조건을 가지며, 그리하여 그다음 세대들은 새로운 발판을 마련해나가야 한다는 말이다.’
(1028쪽)
 
세율을 올려 재원을 확보한 다음, 피케티가 제안하는 것은 기본자산 제도입니다. 기본 소득이 다달이 일정 금액을 전 국민에게 주는 것이라면, 기본 자산은 25세가 된 청년들에게 공평하게 기본 자산을 나눠주자는 제안인데요. 세대간 불평등을 깨고, 청년 세대 내 부의 격차를 해소하는 제도입니다.
 
‘소유세와 상속세에서 나오는 국민소득의 약 5% 세수로, 25세에 달한 청년 각자에게 성인 평균 자산의 약 60%에 해당하는 자본금의 재원 조달이 가능하다.
예를 들어 보자. 부유한 나라들(서유럽, 미국, 일본)에서 평균 민간자산은 2010년대 말에 성인당 약 20만 유로였다. (우리 돈으로 2억7천만원입니다. 한국은 평균 자산이 2억원이고요.) 이 경우 자본지원은 12만 유로가 될 것이다. (우리 돈 1억6천만 원인데요. 한국의 경우라면, 1억 2천만 원입니다. 모든 청년이 25세가 되는 순간, 나라로부터 1억 2천만원을 받고 그 돈으로 같은 출발선에서 시작하는 거죠. 이게 공정한 경쟁 아닌가요?)
사실상 이 체계는 모두를 위한 상속이라는 형태에 이를 것이다. 현재의 극단적 소유 집중을 고려하면, 가난한 50%는 거의 아무 것도 받지 못한다. (평균자산의 고작 5~10%) 반면, 부유한 10% 중에서 어떤 청년들은 수십만 유로를, 또 다른 청년들은 수백만, 수천만 유로를 상속받는다. 여기서 제안된 체계를 통해, 청년 각자는 평균 자산 60%에 상당하는 자산으로 개인의 삶과 직업인으로서의 삶을 시작할 수 있다. 이는 주거를 구하고 창업자금을 마련하는데 새로운 가능성을 준다. 더군다나 모두를 위한 이러한 공적인 상속체계는 청년 각자에게 25세 자본을 보유할 수 있게 해주는 데 비해, 사적상속은 상속이 이루어지는 연령대가 상당히 불확실하고, 실제로 상속은 점점 더 늦춰진다. 여기서 제안된 체계를 통에 자산 보유자들이 젊어진다는 점을 지적해야 하는데, 이것이야말로 사회경제적 역동성을 위한 탁월함이다.’
 
(1038쪽)
 
자녀들에게 부를 고스란히 물려주려고 편법과 탈법을 동원하는 고액 상속자들에게 누진상속세를 적용하고, 그렇게 마련한 재원으로 모든 청년들에게 공평하게 기본 자산을 나눠주자는 이야기, 정말 매력적인 제안입니다. 교육 문제, 부동산 문제 등을 한방에 해결할 수 있는 묘책 아닌가요?

전작인 <21세기 자본>에서 피케티는 이렇게 썼습니다.

‘자본주의의 가장 중요한 모순 : r > g

민간자본의 수익률 r이 장기간에 걸쳐 소득과 생산의 성장률 g를 크게 웃돈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 r>g라는 부등식은 과거에 축적된 부가 생산과 임금보다 더 빨리 증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부등식은 근본적인 논리적 모순을 드러낸다. 기업가는 필연적으로 자본소득자가 되는 경향이 있으며, 자신의 노동력밖에 가진 게 없는 이들에 대해 갈수록 더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자본은 한번 형성되면 생산 증가보다 더 빠르게 스스로를 재생산한다. 과거가 미래를 먹어치우는 것이다.’

(<21세기 자본> 689쪽)

과거가 미래를 먹어치운다는 표현에 저는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것 같았어요. 어느 순간 드라마 시청자가 깨달은 거죠. 두 주인공이 만나 아무리 예쁜 사랑을 하고 살아도 결혼하는 순간 드라마가 끝나며 “그래서 두 사람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라는 결론이 먹히지 않는다는 걸. 둘이서 아무리 열심히 돈을 벌고 모아도 치솟는 부동산 가격을 따라가지 못해 전세와 월세를 전전하고, 아이의 사교육비를 대기 위해 투잡 쓰리잡을 뛰며 사는 삶에 행복이 무슨 의미가 있냐고. 차라리 “그래서 주인공은 재벌 2세와 결혼함으로써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가 더 현실적인 해피엔딩이라는 걸 시청자들이 깨달은 거죠. 
하지만 아무리 살펴봐도 현실에서 재벌가와 결혼하는 일반인은 없던데요? 잘 나고 똑똑하고 매력적인 연예인도 재벌가에 들어갔다가 견디지 못하고 나오던 걸요? 오히려 재벌가는 비슷비슷한 재벌들끼리 결혼하면서 성벽을 더 높이 굳건하게 쌓던데요? 이런 상황에서 재벌과의 로맨스를 그리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요?

드라마 피디로 일하며 늘 고민하던 문제가 책을 읽고 풀렸습니다. 사랑하는 두 사람은 공적 상속 제도를 통해 기본 자산을 받고 집을 구하고 가게를 만들어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진정한 해피엔딩이란 이런 것입니다!

꼬꼬독을 마무리 하며 3가지만 기억할게요.

1. 사제 계급은 브라만 좌파, 귀족 계급은 상인 우파로 바뀌었을 뿐, 우리는 여전히 불평등한 삼원사회에서 산다.

2.  불평등이 심화하는 이유는 이 두 계급이 지식 자본과 금융 자본을 고스란히 자녀 세대에게 물려주기 때문이다.

3. 누진상속세로 마련된 재원으로 모든 25세 청년에게 기본 자산을 공평하게 나눠주자.

1297쪽에 이르는 책을 3문장으로 요약했어요. 궁금한 점이 있다면 책을 통해 직접 확인해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피케티 선생님의 제안이 꼭 우리 사회에서 받아들여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귀한 가르침을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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