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짠돌이 독서 일기

위기를 극복하는 실력

by 김민식pd 2020. 6. 9.

(오늘자 한겨레 신문에 기고한 글입니다.)

드라마 감독으로 일하며 신인 배우 오디션을 본다. 그럴 때 나는 다짜고짜 상대의 외모나 연기에 대해 부정적 평가를 내뱉는다. “아, 이런 얼굴은 밤에 조명 받으면 턱 선이 이상하게 나오는데?” 아마 상대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겠지. ‘저 인간이 지 생긴 건 생각 안 하고.’ 배우란 대중의 부정적 평가에 그대로 노출되는 직업이다. 방송 출연 후, 쏟아지는 악성 댓글에 무너지는 사람을 거르기 위해 면접에서 미리 떠보는 게 감독의 일이다. 진짜 실력은 위기 때 드러나니까.

위험에 처했을 때 대처 방법은 무엇일까? 적을 만난 동물의 반응은 셋 중 하나다. 싸우거나, 도망치거가, 숨거나. 원시 인류는 셋 다 능숙하지 못했다. 송곳니가 퇴화하여 날카로운 이빨을 가진 짐승과 싸우기엔 너무 무력했다. 두 발로 서서 걷는 바람에 네 발 짐승보다 느려 달아날 수도 없었다. 심지어 초기 인류가 살았던 아프리카에 건조화가 진행되며 숲이 사라졌다. 숨을 곳도 마땅치 않았던 초원에서 인류는 어떻게 살아남았을까?

동물 중에서 유일하게 사람만이 두 발로 서서 걷는다. 직립 이족 보행은 걸음마를 배울 때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고 속도도 느려 생존에 유리한 형질이 아니다. 그런데 왜 인류만이 유독 서서 걸었을까? 수렵채집으로 식량을 구할 때, 운이 작용한다. 운 좋게 사냥에 성공하면 배터지게 먹고, 운 나쁘면 쫄쫄 굶는다. 서서 두 발로 걸으면 두 팔 가득 남은 식량을 안고 가족에게 돌아갈 수 있다. 우리의 조상들은 공동체를 위해 개인의 위험을 무릅쓰는 모험을 했다.

<절멸의 인류사>(부키 출판사)를 보면, 오스트랄로피테쿠스, 호모 에렉투스, 네안데르탈인 등 대다수의 초기 인류가 절멸했다. 호모 사피엔스만이 운 좋게 살아남았다. 네안데르탈인은 호모 사피엔스보다 육체적으로도 강하고 정신적으로도 뛰어났지만 생존경쟁에서 탈락했다. 혼자 똑똑한 것보다 무리의 성공이 더 중요하다. 홀로 생각해 내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성공에는 협업이 필수다. 먼저 깨달은 이가 아는 것을 설명하고, 다수의 협력을 끌어낸다. 자신이 발견한 먹잇감에 대해 침을 튀겨가며 이야기하고, 함께 무리를 지어 사냥한 덕분에 식량을 구하는 일이 쉬워졌다. 군집 생활을 통해 추운 밤에도 온기를 나누며 살 수 있다는 걸 발견한 덕분에 호모 사피엔스는 아프리카의 적도 지방을 벗어나 세계 전역으로 퍼져갈 수 있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무서운 이유는 말로 소통하고 집단을 이루어 협력하는 인류의 강점을 파고들기 때문이다.

경제적 성공을 구가하는 지역일수록 감염 피해가 크다. 뉴욕은 인구 밀집도나 효율면에서 세계 최고를 자랑하는 도시다. 이탈리아의 경우, 산업이 발달한 북부 지역에서 바이러스가 맹위를 떨쳤다. 콜센터나 물류센터도 마찬가지다. 공간에 대한 효율성을 높이고 경쟁력을 극대화한 결과가 집단 감염으로 나타났다. 인류가 성공한 이유를 코로나 바이러스는 약점으로 삼아 공격한다.

사자가 야수의 왕이라고 하지만, 초원에서만 산다. 인류는 전 세계 어느 곳에서든 살아남았다. 사람이 사자보다 우위를 차지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사자가 먹이를 잡아 입에 물고 돌아가면 여러 새끼들이 서로 먹겠다고 싸운다. 경쟁에서 뒤처져 영양 상태가 부실한 새끼는 그대로 도태된다. 원시 인류는 다른 생존 전략을 선택했다. 먹고 남은 식량을 엉거주춤 두 팔로 옮겼다. 그 덕분에 약하고 어린 아이부터 늙고 병든 가족까지 돌볼 수 있었다. 인류가 강한 이유는 약한 존재들까지 보살피기 때문이다.

공간의 효율을 높이고, 생산성을 키우는 과정에서 바이러스에 취약해졌다면,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야 할 때다. 바이러스에 취약한 기저질환자와 노인층을 생각한다면 상대적으로 젊고 건강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지 살펴봐야 한다. 당장 먹고 사는데 문제가 없다면 자원을 나누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할 때다. 공동체로서 우리의 실력은 위기 때 드러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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