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짠돌이 독서 일기

독서광의 행복

by 김민식pd 2020. 6. 8.

평소 소설을 즐겨 읽지만, 서평을 쓰는 건 쉽지 않습니다. 스포일러를 싫어하는데, 스포일러 없이 재미난 이야기를 소개하는 게 은근 까다롭거든요. 소설을 읽을 때는 그저 독자로서의 즐거움에 집중합니다. 그렇게 읽다가, '아, 이 재미난 소설을 혼자 읽고 마는 건 너무 나빠!' 싶을 때, 머리를 쥐어뜯으며 글을 씁니다. 최근 전율하면서 읽은 책이 있어요.

<테세우스의 배> (이경희 / 그래비티 북스)

테세우스의 배를 검색하면 나무위키에 이런 글이 뜹니다.

'미노타우르스를 죽인 후 아테네에 귀환한 테세우스의 배를 아테네인들은 팔레론의 디미트리오스 시대까지 보존했다. 그들은 배의 판자가 썩으면 그 낡은 판자를 떼어버리고 더 튼튼한 새 판자를 그 자리에 박아 넣었던 것이다.

커다란 배에서 겨우 판자 조각 하나를 갈아 끼운다 하더라도 이 배가 테세우스가 타고 왔던 "그 배"라는 것은 당연하다. 한 번 수리한 배에서 다시 다른 판자를 갈아 끼운다 하더라도 마찬가지로 큰 차이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계속 낡은 판자를 갈아 끼우다 보면 어느 시점부터는 테세우스가 있었던 원래의 배의 조각은 하나도 남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배를 테세우스의 배라고 부를 수 있는가?

- 플루타르크'

그러니까, 이 소설은 원본과 복제본의 이야기입니다. 재벌그룹 회장인 석진환이 불의의 사고로 죽음을 맞게 됩니다. 훼손된 신체와 장기를 사이보그 기계 팔과 인공 장기로 개조하면서 겨우 살아나는데요. 온 몸이 기계가 된 석진환 앞에 그룹의 경영권을 두고 음모가 펼쳐집니다. 온 몸이 로봇이 되어버린 그는 자신이 재벌회장임을 증명할 수 있을까요?

소설을 읽는 내내, 터미네이터가 된 인간의 액션 활극이 펼쳐집니다. 흥미로운 주제를 박진감있게 풀어냈어요. 주제의식도 좋구요, 작가의 입담도 대단합니다. 언젠가 SF 영화로 만들어도 좋을 작품인데, 일단 활자로 만나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머릿속에 펼쳐지는 상상만큼 멋진 영화도 없거든요.  

미래에는 돈을 가진 사람이 자신의 복제품을 만들어 불로장생을 꿈꿀 수 있을까요? 내 몸이 사라지고, 정신 또한 데이터화된다면, 그게 진짜 나일까요? 돈은 없어도, 시간은 풍족한 저는 저의 복제품을 블로그에 구축합니다. 블로그는 나만의 기억 아카이브예요. 나의 또다른 인격을 온라인에 배양하는 거죠. 언젠가 제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블로그에 오는 독자들은 마치 저와 수다 떠는 기분으로 글을 읽고 댓글을 남기지 않을까요?

책에는 감금 상태에 놓인 주인공이 데이터베이스에 올려놓은 과거의 기억을 복기하며 시간을 보내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저 기계적으로 흡수하기만 했던 책들을 기억의 서랍에서 다시 꺼내 음미하는 행위는 상상 이상으로 즐거운 일이었다.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어루만지며 다시 여유를 갖고 바라보게 되자 당시엔 이해하지 못했던 의미가 보다 명료하게 정리되는 것 같았다. 지루한 고전들이 지닌 위대한 가치도, 예전엔 표면만 겨우 핥고 말았던 철학의 감추어진 심연도, 어른이 되어서야 이해할 수 있는 문학의 재미도 모두 엄청난 지적 쾌감으로 다가왔다.'

(216쪽)

언젠가 퇴직하고 시간이 더 풍요로워지면 방안에 틀어박혀 과거에 쓴 블로그 독서일기를 뒤적이며 옛날에 읽은 책을 다시 읽고 싶습니다. 나이 70이 된 제가 나이 50에 쓴 독서일기를 보며, '아, 이때의 나는 역시 좀 철이 없네.' 하며 빙긋 웃을 날도 오지 않을까요? 결국 제 블로그는 노인이 된 나를 위해 남겨둔 타임캡슐일지도 몰라요. 

<테세우스의 배>는 그래비티 픽션 9번째 책인데요. 최근 빠른 속도로 성장하는 한국 SF의 발전상을 보여주는 것 같아요. 처음 읽은 책이 이렇게 재미나니, 다른 8권의 책들도 기대됩니다. 하나하나 찾아 읽어야겠어요. 읽고 싶은 책이 늘어나서 독서광은 오늘도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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