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소설을 즐겨 읽지만, 서평을 쓰는 건 쉽지 않습니다. 스포일러를 싫어하는데, 스포일러 없이 재미난 이야기를 소개하는 게 은근 까다롭거든요. 소설을 읽을 때는 그저 독자로서의 즐거움에 집중합니다. 그렇게 읽다가, '아, 이 재미난 소설을 혼자 읽고 마는 건 너무 나빠!' 싶을 때, 머리를 쥐어뜯으며 글을 씁니다. 최근 전율하면서 읽은 책이 있어요.

<테세우스의 배> (이경희 / 그래비티 북스)

테세우스의 배를 검색하면 나무위키에 이런 글이 뜹니다.

'미노타우르스를 죽인 후 아테네에 귀환한 테세우스의 배를 아테네인들은 팔레론의 디미트리오스 시대까지 보존했다. 그들은 배의 판자가 썩으면 그 낡은 판자를 떼어버리고 더 튼튼한 새 판자를 그 자리에 박아 넣었던 것이다.

커다란 배에서 겨우 판자 조각 하나를 갈아 끼운다 하더라도 이 배가 테세우스가 타고 왔던 "그 배"라는 것은 당연하다. 한 번 수리한 배에서 다시 다른 판자를 갈아 끼운다 하더라도 마찬가지로 큰 차이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계속 낡은 판자를 갈아 끼우다 보면 어느 시점부터는 테세우스가 있었던 원래의 배의 조각은 하나도 남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배를 테세우스의 배라고 부를 수 있는가?

- 플루타르크'

그러니까, 이 소설은 원본과 복제본의 이야기입니다. 재벌그룹 회장인 석진환이 불의의 사고로 죽음을 맞게 됩니다. 훼손된 신체와 장기를 사이보그 기계 팔과 인공 장기로 개조하면서 겨우 살아나는데요. 온 몸이 기계가 된 석진환 앞에 그룹의 경영권을 두고 음모가 펼쳐집니다. 온 몸이 로봇이 되어버린 그는 자신이 재벌회장임을 증명할 수 있을까요?

소설을 읽는 내내, 터미네이터가 된 인간의 액션 활극이 펼쳐집니다. 흥미로운 주제를 박진감있게 풀어냈어요. 주제의식도 좋구요, 작가의 입담도 대단합니다. 언젠가 SF 영화로 만들어도 좋을 작품인데, 일단 활자로 만나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머릿속에 펼쳐지는 상상만큼 멋진 영화도 없거든요.  

미래에는 돈을 가진 사람이 자신의 복제품을 만들어 불로장생을 꿈꿀 수 있을까요? 내 몸이 사라지고, 정신 또한 데이터화된다면, 그게 진짜 나일까요? 돈은 없어도, 시간은 풍족한 저는 저의 복제품을 블로그에 구축합니다. 블로그는 나만의 기억 아카이브예요. 나의 또다른 인격을 온라인에 배양하는 거죠. 언젠가 제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블로그에 오는 독자들은 마치 저와 수다 떠는 기분으로 글을 읽고 댓글을 남기지 않을까요?

책에는 감금 상태에 놓인 주인공이 데이터베이스에 올려놓은 과거의 기억을 복기하며 시간을 보내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저 기계적으로 흡수하기만 했던 책들을 기억의 서랍에서 다시 꺼내 음미하는 행위는 상상 이상으로 즐거운 일이었다.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어루만지며 다시 여유를 갖고 바라보게 되자 당시엔 이해하지 못했던 의미가 보다 명료하게 정리되는 것 같았다. 지루한 고전들이 지닌 위대한 가치도, 예전엔 표면만 겨우 핥고 말았던 철학의 감추어진 심연도, 어른이 되어서야 이해할 수 있는 문학의 재미도 모두 엄청난 지적 쾌감으로 다가왔다.'

(216쪽)

언젠가 퇴직하고 시간이 더 풍요로워지면 방안에 틀어박혀 과거에 쓴 블로그 독서일기를 뒤적이며 옛날에 읽은 책을 다시 읽고 싶습니다. 나이 70이 된 제가 나이 50에 쓴 독서일기를 보며, '아, 이때의 나는 역시 좀 철이 없네.' 하며 빙긋 웃을 날도 오지 않을까요? 결국 제 블로그는 노인이 된 나를 위해 남겨둔 타임캡슐일지도 몰라요. 

<테세우스의 배>는 그래비티 픽션 9번째 책인데요. 최근 빠른 속도로 성장하는 한국 SF의 발전상을 보여주는 것 같아요. 처음 읽은 책이 이렇게 재미나니, 다른 8권의 책들도 기대됩니다. 하나하나 찾아 읽어야겠어요. 읽고 싶은 책이 늘어나서 독서광은 오늘도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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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민식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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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보리랑 2020.06.08 06:1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유한하기에 소중하고 아름다운...
    책읽기도 그때의 내그릇만큼만 흡수할 수 있기에 '읽고 또 읽기' 참 좋습니다. 😄

  2. 인대문의 2020.06.08 07:2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I can hear your voice.
    While I was reading, I imagined that I'm watching '꼬꼬독.'
    It's interesting and has another charming.
    Reading SF novels would be more fun if I imagine and expand it with my colorful ideas.
    Thank you and have a fantastic week~!

  3. 오달자 2020.06.08 08:5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블로그는 노인이 되는 나를 위한 타임캡슐'이라.....
    캬~~피디님께서는 진짜 언어의 마술사이십니다.
    어쩜 이리 적절한 비유를~~

    개인적 신변 변화로 인한 무기력증으로 잠시 주춤했던 블로그 글쓰기를 다시금 실천하려는 의지를 갖게 하는 오늘은 말씀입니다.

    이래서 매일 매일 공즐세학당에 출석 도장을 찍어야 한다니까요~^^

  4. 꿈트리숲 2020.06.08 09:1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원본과 복제본의 이야기라는 부분에서
    전 회색인간과 알리타가 생각났어요.
    저도 기억의 서랍에서 책과 영화를 끄집어
    냈습니다 ㅎㅎ
    왠지 책속의 내용들이 미래의 언젠가
    실현가능할 것만 같아요. 그러니 책읽을 때
    영화를 볼때 그렇게 몰입했던 듯 싶습니다.

    테세우스의 배 처럼 우리 인간도 다친 부분
    회생 불가한 부분을 기계로 대체하게 된다면
    과연 인간이라 부를 수 있을까 싶네요.
    지금은 인간일까 아닐까 고민하지만
    미래의 인간은 복제인간에 대해 나름의 정의를
    내리겠죠?

    타임캡슐의 풍성한 이야기를 위해 이 책도
    저장해두겠습니다. 좋은 책 소개해주셔서 감사해요~

  5. 아리아리짱 2020.06.08 10:5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김민식 PD님 아리아리!

    나중의 나를 위한 50대의 타임캡슐 저도 꾸준히 하겠습니다. ^^

  6. 아빠관장님 2020.06.08 13:3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녕하세요 ~

    피디님의 연 중 행사인, 소설 소개에 당첨된 소설이라니, 확실한 재미 보증수표네요!!^^

  7. Laurier 2020.06.08 21:1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SF라고 하니 PD님께서 '매일 아침 써봤니?'에서 SF영상 찍던 젊은 시절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PD님의 열정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이야기들을 계속 읽고 있는 중입니다. PD님께서 추천해 주시는 책들은 다 읽어보고 싶은데 제가 읽는 속도가 느려서 따라갈 수는 없지만 열심히 노력 중입니다~ 오늘도 좋은 소설 소개 감사합니다^^

  8. 나겸맘 리하 2020.06.08 23:3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김형철 교수님이 쓰신 <최고의 선택>에
    테세우스의 배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거든요.
    토마스홉스의 이야기까지 곁들여지면서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는데요.

    어떤 대상을 그 대상이게 하는 것은
    물질적 요소가 아닌 정신적 요소라고 하죠.
    젊은 '나'에서 나이들은 '나'로 바뀌는 것이
    테세우스 배의 낡은 갑판 뜯어내는 것과
    비슷할 지라도...
    변함없는 정신적 공감대를 가지고 있다면
    '나'는 언제까지나 '나'인 것이 맞는 거겠죠?^^

    내가 나 자신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단절없이 나의 일상을 기록하는 삶을 살아봐야겠습니다.
    블로그가 진짜 제대로 된 타임캡슐이었다는 걸
    또 이렇게 배우고 갑니다~

  9. 섭섭이짱 2020.06.09 08:3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녕하세요

    오호~~~ 새로운 SF 시리즈네요. 책 내용이 흥미롭네요. 찾아보니 최근에 11권째까지 나왔던데 시간될때마다 한권씩 골라 읽어봐야겠어요

    재밌는 책 소개 감사합니다 ^^

  10. 슬아맘 2020.06.09 08:3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하 ! 블로그의 글은 나의 복제이며 배양이다 ^^
    매일 글을 적지는 못하지만 가끔 블로그를 쓰면서 생각합니다.
    거의 읽어주는 사람이 없거든요 ㅎㅎㅎ
    제 혼자만의 기억의 기록인데 , 어쩜 이 블로그가 사이버 쓰레기를 만들고
    있지는 않은가? 하고 걱정했는데
    다시 한번 PD님 글을 보면 용기를 내어봅니다.
    오늘도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