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짠돌이 독서 일기

경험보다 중요한 건 해석이다

by 김민식pd 2020. 6. 18.

하나의 경험에 대해 정해진 해석은 없어요. 형제 자매 사이에도 양육자의 폭력이라는 상황에 대해 다른 방식으로 반응하는 경우가 많아요. 같은 상황이라도 해석하는 방법에 따라 정반대의 결과가 나오기도 해요. 그걸 보여주는 이야기가 있어요.

<모멘트 아케이드 : 제4회 한국과학문학상 수상작품집> (황모과 / 허블)

소설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오늘도 모멘트 아케이드 moment arcade에 들어섭니다. 사람들의 모든 순간이 짧게 가공되어 업로드되는 곳. 누군가가 체험한 기억 데이터를 사고파는 기억 거래소 모멘트 아케이드. 저는 산책하듯 아케이드 여기저기를 다닙니다. 저마다 자신의 모멘트를 전시하고 있네요. 제가 찾는 건 그런 화려한 모멘트가 아닙니다. 내가 가장 공감할 수 있는 모멘트, 무력함을 극복하게 해줄 모멘트, 활기찬 삶을 대리 체험하게 해줄 모멘트를 찾고 있어요.'  

(9쪽)

언젠가 자신의 기억을 전시하고 판매하는 순간이 올까요? 어쩌면 지금의 SNS가 그런 공간인지 모르죠. 행복한 순간의 모습을 올리고, 사람들의 '좋아요'를 모읍니다. 인플루언서란 어쩌면 자신의 소비 경험을 전시하고 파는 사람 아닐까요? 어려서 저는 도서관에서 산책을 즐겼어요. 빼곡이 책들이 꽂힌 서가 사이를 걸으며 책 제목이 제게 말을 걸어오길 기다렸지요. 내가 가진 삶의 문제에 대해 누군가 답을 주길 기다리면서요.

두 자매가 있어요. 동생은 아픈 엄마를 간병하느라 희생하며 살고요. 언니는 자신의 삶을 찾아 집을 떠납니다. 이제 삶에서 의미를 찾지 못한 동생은 타인의 경험에서 의미를 찾으려 해요. 그러다 자신에게 위안을 주는 경험을 찾고, 그 경험의 주인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알려주세요. 어떻게 해야 그토록 뻔하고 무감동한 시뮬레이션 속에서 당신처럼 삶을 살아낼 긍정적인 에너지를 느낄 수 있나요? 저도 가능할까요?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어요. 당신은 친절했지만 제가 응용해보기엔 어려운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제가 당신에게 판매한 모멘트는 똑같은 순간을 수십 번, 때로는 수백 번 경험한 이후에 길어낸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랍니다. 당신에게 판매하기 전, 저는 같은 순간을 수십 번 반복했어요.

당신은 같은 경험을 여러 번 반복하면서 지나간 순간에 느끼지 못한 감정과 감각을 찾아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각종 희로애락, 소소한 감정들의 경계에 존재하는 수많은 경우의 수를 다 반복해보고 그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찾아냈다고요. 아름다운 모멘트는 때로는 첫 번째 순간에 찾아오기도 했고, 수십 번의 시행착오를 겪은 뒤 찾아오기도 했대요. 어느 순간 갑자기 찾아오기도 했답니다.

의아했답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지? 당신은 시간이 많나봐요.'

(32쪽)   

돈보다 소중한 자산은 시간입니다. 돈으로 경험을 사는데는 한계가 있어요. 가성비 높은 맛집을 찾아내는 사람은 다양한 공간을 다니며 비교해본 사람일 겁니다. SNS에는 가장 행복한 순간, 가장 현명한 깨달음, 가장 아름다운 풍경만 올라옵니다. 이 모든 걸 얻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해요. SNS는 기본적으로 디스플레이 공간이에요. 타인이 진열한 경험을 보고 자신의 일상과 비교하지 마세요.

단편수록집의 대상 수상작인데요. 33페이지 밖에 안되는 짧은 이야기 속에 우리의 현실을 들여다보는 우화를 만들어냈어요. 누군가 한국판 <블랙 미러>를 만든다면, 이 단편을 시나리오 대상으로 고려해도 좋을 것 같아요. 영상화 되기 전에 책으로 만나보시길 권합니다.

매년 성장하는 한국과학문학상의 발걸음을 보며, 한국 SF의 성취를 느껴보셔도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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