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경험에 대해 정해진 해석은 없어요. 형제 자매 사이에도 양육자의 폭력이라는 상황에 대해 다른 방식으로 반응하는 경우가 많아요. 같은 상황이라도 해석하는 방법에 따라 정반대의 결과가 나오기도 해요. 그걸 보여주는 이야기가 있어요.

<모멘트 아케이드 : 제4회 한국과학문학상 수상작품집> (황모과 / 허블)

소설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오늘도 모멘트 아케이드 moment arcade에 들어섭니다. 사람들의 모든 순간이 짧게 가공되어 업로드되는 곳. 누군가가 체험한 기억 데이터를 사고파는 기억 거래소 모멘트 아케이드. 저는 산책하듯 아케이드 여기저기를 다닙니다. 저마다 자신의 모멘트를 전시하고 있네요. 제가 찾는 건 그런 화려한 모멘트가 아닙니다. 내가 가장 공감할 수 있는 모멘트, 무력함을 극복하게 해줄 모멘트, 활기찬 삶을 대리 체험하게 해줄 모멘트를 찾고 있어요.'  

(9쪽)

언젠가 자신의 기억을 전시하고 판매하는 순간이 올까요? 어쩌면 지금의 SNS가 그런 공간인지 모르죠. 행복한 순간의 모습을 올리고, 사람들의 '좋아요'를 모읍니다. 인플루언서란 어쩌면 자신의 소비 경험을 전시하고 파는 사람 아닐까요? 어려서 저는 도서관에서 산책을 즐겼어요. 빼곡이 책들이 꽂힌 서가 사이를 걸으며 책 제목이 제게 말을 걸어오길 기다렸지요. 내가 가진 삶의 문제에 대해 누군가 답을 주길 기다리면서요.

두 자매가 있어요. 동생은 아픈 엄마를 간병하느라 희생하며 살고요. 언니는 자신의 삶을 찾아 집을 떠납니다. 이제 삶에서 의미를 찾지 못한 동생은 타인의 경험에서 의미를 찾으려 해요. 그러다 자신에게 위안을 주는 경험을 찾고, 그 경험의 주인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알려주세요. 어떻게 해야 그토록 뻔하고 무감동한 시뮬레이션 속에서 당신처럼 삶을 살아낼 긍정적인 에너지를 느낄 수 있나요? 저도 가능할까요?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어요. 당신은 친절했지만 제가 응용해보기엔 어려운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제가 당신에게 판매한 모멘트는 똑같은 순간을 수십 번, 때로는 수백 번 경험한 이후에 길어낸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랍니다. 당신에게 판매하기 전, 저는 같은 순간을 수십 번 반복했어요.

당신은 같은 경험을 여러 번 반복하면서 지나간 순간에 느끼지 못한 감정과 감각을 찾아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각종 희로애락, 소소한 감정들의 경계에 존재하는 수많은 경우의 수를 다 반복해보고 그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찾아냈다고요. 아름다운 모멘트는 때로는 첫 번째 순간에 찾아오기도 했고, 수십 번의 시행착오를 겪은 뒤 찾아오기도 했대요. 어느 순간 갑자기 찾아오기도 했답니다.

의아했답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지? 당신은 시간이 많나봐요.'

(32쪽)   

돈보다 소중한 자산은 시간입니다. 돈으로 경험을 사는데는 한계가 있어요. 가성비 높은 맛집을 찾아내는 사람은 다양한 공간을 다니며 비교해본 사람일 겁니다. SNS에는 가장 행복한 순간, 가장 현명한 깨달음, 가장 아름다운 풍경만 올라옵니다. 이 모든 걸 얻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해요. SNS는 기본적으로 디스플레이 공간이에요. 타인이 진열한 경험을 보고 자신의 일상과 비교하지 마세요.

단편수록집의 대상 수상작인데요. 33페이지 밖에 안되는 짧은 이야기 속에 우리의 현실을 들여다보는 우화를 만들어냈어요. 누군가 한국판 <블랙 미러>를 만든다면, 이 단편을 시나리오 대상으로 고려해도 좋을 것 같아요. 영상화 되기 전에 책으로 만나보시길 권합니다.

매년 성장하는 한국과학문학상의 발걸음을 보며, 한국 SF의 성취를 느껴보셔도 좋아요.

 

 

Posted by 김민식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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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섭섭이짱 2020.06.18 08:4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녕하세요.

    아~~~~차 차차
    진즉에 샀지만 언제 읽나 대기중에 있었는데..
    오늘글 보니 바로 읽어봐야겠어요
    그러고보니 황모과 작가님이 최근에
    <밤의 얼굴들>소설집을 내셨더라고용
    이김에 그책도 같이 읽어보는걸로 ^^

    그리고 전 남과 비교하는건 안 좋아하지만
    SNS 는 열심히 보고 있네요.
    타인의 삶을 보며 새로운 정보도 얻고
    생각하지 못했던 시각도 엿볼수 있고..
    사진찍는법도 배우고 ㅋㅋㅋ
    좋은 점도 많더라고요.
    특히 SNS 운영은 내 선택에 따리
    필요한 친구나 팔로우를 정할수 있으니
    필요한 정보는 취히고 안보고 싶은건 안보이게 해서
    유용한 피드만 올라오면 그렇게 스트레스는 덜 받는거 같아요.

    그리고 만약 SNS 안했다면 피디님 페북과 블로그도
    모르고 지나쳤을텐데...생각만해도 아휴~~~
    하여간 피디님 글을 통해 제 자신도
    많이 반성하게 되고 몰랐던 정보도 알게되어 넘 좋아요.

    슬기로운 SNS 생활이여
    영원하라😆😃😄

    오늘도 좋은 글 잘보고 갑니다. 고맙습니다.

    p.s) 황모과 작가에 대한 정보를 원하면 👇👇👇
    https://mobile.twitter.com/mj__hwang

  2. 인대문의 2020.06.18 09:3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You read my mind.
    I was feeling blue but you are touching my mind.

    Thank you.
    Have a beautiful day~!

  3. 아리아리짱 2020.06.18 09:5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김민식PD님 아리아리!

    '경험보다 중요한 것은 해석이다'

    그 해석에 대한 오류를 줄이기 위해
    더 열심히 책을 읽어야겠습니다. ^^

  4. 꿈트리숲 2020.06.18 09:5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블로그나 인스타로 인플루언서가 된
    사람들이 뭔가를 판매하는 사업자로
    변모해가는 걸 보면서 영향력이 곧
    돈으로 연결되는거구나 생각이 들었어요.
    물론 그렇지 않은 분들도 있지만 글쓰는게
    좋아서 사진찍어 공유하는게 좋아서 하는게
    아니라 자신의 사업을 염두에 두고 마케팅
    창구로 활용한다는 걸 요즘에야 알게되었습니다.
    SNS 걸음마 단계라서요 ㅎㅎ

    그렇게보면 요즘 SNS가 피디님 말씀처럼
    모멘트 아케이드가 아닐까 싶습니다.
    SNS로 쉽게 돈 번다고 생각했다가 달리
    생각이 들었던건 사진을 잘 찍어 올리기 위해
    수백장 수천장 찍은 시간이 있었고,
    블로그 이웃을 늘리기위한 담금질의 순간이
    많았더라구요.

    타인에게 판매한 모멘트는 수십번 수백번
    반복하고 길어낸 최고의 순간이라는 말이
    딱 맞는 것 같아요.
    타인의 모멘트를 보면서 부럽다는 생각보다
    화려한 순간이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노력을
    들였을까가 생각되어 이제는 숭고하기까지
    합니다.

    얇다고 하시니 급 호기심이 생기는 책이네요.
    좋은 책 소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5. Laurier 2020.06.18 10:1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제가 막 읽었던 책 내용 중에 미래를 예측하는 어느 일본 학자가 미래의 묘지가 SNS라는 공간이 될 것이라고 했더라고요. 사람이 죽은 후에도 SNS를 닫지 않고 그대로 두고 추모 공간을 만든다고요. 그 사람의 SNS에는 그동안의 희노애락이 얼마나 담겨있을까 싶기도 하고, 그래서 정말 이 SNS라는 공간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경험들이 얼마나 많을까 싶어요. PD님 글을 읽고 나니 그렇게 간접적으로 얻는 경험보다 내가 직접 겪어내서 견디고 이겨내는 것이 더 소중하다는 것을 말해주시는 것 같네요. PD님의 그 밝은 긍정 에너지도 한 순간에 만들어진 것은 아니겠지요... 그래서 저도 늘 PD님 보면서 힘든 상황도 조금씩 견디며 이겨내려고 합니다. 오늘의 소중한 글 감사합니다~

  6. 보리랑 2020.06.18 10:5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평범한 일상이 행복하지 않으면 행복이란 요원하고, 혼자서 행복하지 않으면 둘이 되어도 행복하지 않다는 말씀과 통해 보입니다.

    내가 부모의 폭력에 어찌 대처하는가에 따라, 또는 내 어떤 부분이 부모가 자신에 대해 싫어하는 어떤 부분과 닮아 더 폭력적이 되는 듯합니다.

  7. 아빠관장님 2020.06.18 17:2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SNS는 기본적으로 디스플레이 공간이에요. 타인이 진열한 경험을 보고 자신의 일상과 비교하지 마세요.'
    SNS를 건강하게 즐길 팁이네요!
    오늘도 좋은 글 감사합니다!^^

  8. 슬아맘 2020.06.20 11:0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모멘트 아케이드 ~ 시간
    22년만에 일산 호수공원에 다녀왔어요.
    그런데 울창한 숲에 완전 깜짝놀랐지요.
    제가 처음간 22년전에 모습과는 너무나 대조적인 울창한 나무 숲이 감동적이였어요.
    그걸보면서 아 22년이라는 시간이 나무를 저렇게 키워냈구나.
    시간의 힘이 참 대단하구나
    그런데 딱 이런 리뷰가 있다니 ~시간에 힘에 격하게 공감합니다.
    오늘도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