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짠돌이 독서 일기

스파이 스릴러 대작을 원하신다면

by 김민식pd 2020. 4. 6.

아버지를 모시고 설 명절 연휴에 제주도 여행을 갈 때, 챙겨간 소설이 한 권 있어요. 팔순의 아버지와 3박 4일 여행을 하는 건, 때론 위험한 일이에요. 정신적으로 많이 힘들 때가 있거든요. 어린 시절, 아버지가 내게 준 상처를 되새기는 순간도 있고요. 그럴 때, 재미난 소설이 필요합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책장만 펼치면 현실에서 도피할 수 있는 그런 킬러 콘텐츠가 필요하지요. 스릴러 물을 좋아하는 편집자가 '아직도 이 책을 안 읽으셨다는 말씀입니까?'하고 놀라며 권해준 책이 있어요.

<아이앰 필그림> (테리 헤이스 지음 / 문학수첩)

한 남자가 있어요. 자신의 모든 것을 잃었어요. 나 혼자 망하고 마느니, 우리 다 같이 망하자는 생각에 지구 멸망의 시나리오를 그리기 시작합니다. 네, 이 남자는 테러리스트에요. 또다른 남자가 있어요. 미국 정보국의 뛰어난 요원으로 살지만, 스파이 세계에서 은퇴를 결심합니다. 자신의 모든 흔적을 지우고 조용히 살려고 했는데, 어느 날 국가의 부름을 받지요. 위험한 남자 한 사람을 찾아달라고. 이제 테러리스트와 스파이의 대결이 시작됩니다. 한 남자는 자신의 흔적을 지워나가고, 또 한 남자는 그 흔적을 뒤쫓습니다.  

'흥분한 군중의 열기 속에 참수된 동물학자 - 제다, 사우디아라비아

황산이 담긴 욕조 속에 담겨 지문은 물론, 이목구비가 모두 녹아버린 여자 - 뉴욕, 미국

쓰레기더미에서 눈이 뽑힌 채 발견된 악명 높은 생물공학 전문가 - 다마스쿠스, 시리아

험준한 산악지대에서 발견된 까맣게 그슬린 세 구의 시체 - 힌두쿠시, 아프가니스탄

결혼한 지 얼마 안 되어 해안가 바위에서 추락사한 미국의 재벌 2세 - 보드룸, 터키

전혀 연관되어 보이지 않지만, 인류 역사상 가장 은밀하고 끔찍한 음모와 닿아 있었던 수수께끼의 사건들, 숨겨진 비밀들의 연결고리를 풀어낼 수 있는 단 한 사람, 코드명 '필그림'!'

스릴러의 경우, 스포일러가 될까봐 조심스러운데요. 이럴 때는 책 뒤표지에 있는 소개글로 대신합니다. 이건 출판사에서 정해둔 선인 거죠. '여기까지는 책을 사기 전에 보셔도 좋아요.'

2권짜리 책인데, 3박 4일간의 제주 여행 동안 한 권만 읽었어요. 2권은 아껴읽고 싶었어요. 다행히 아버지와 별 충돌없이 지내는 덕에 독서의 힐링이 필요없기도 했고요. 돌아온 후, 코로나 바이러스로 주말 동안 집에서 칩거하면서 2권을 읽었어요. 1권이 474쪽, 2권이 629쪽, 합해 1000페이지가 넘어가는 대작인데요. 칩거의 시기에 적당한 오락거리지요. 예전에 좋아했던 프레드릭 포사이드의 후예를 만난 느낌입니다. 포사이드의 데뷔작인 <자칼의 날>이 이런 맛이었거든요.

책에서 인상적인 글귀 하나.

 

'스파이 업계에서는 실수를 통해 배운다는 게 불가능하다는 교훈이다. 기회는 주어지지 않는다. 한 번의 실수가 곧 죽음이다.'

(1권 114쪽)

적진에 침투해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사는 간첩의 경우, 한 번의 실수가 바로 죽음으로 이어진다는 이야기에 등골이 서늘합니다. 대부분의 직업은 반대에요. 실패와 실수를 통해 성장하거든요. 단, 그 실수를 인정하고 배우려는 사람에게만 성장의 기회가 주어집니다.

아프칸의 산악지대에서 불에 거슬린 세 구의 시체가 발견되는데요. 그 장소에 대한 묘사입니다.

'심각하게 엇나간 무언가가, 심각하게 불길한 무언가가 건물 잔해 속에 있다는 저항할 수 없는 확신. 외따로 떨어진 전망 좋은 곳에 있다는 사실과 이 불길한 직감을 한데 섞어 키팅은 심지어 그 마을에 '오버룩 호텔'이라는 이름까지 붙여주었다.'

(1권 426쪽) 

저는 이 대목에서 흠칫 떨렸어요. 오버룩 호텔! 얼마나 절묘한 비유인가! 그런데 역주를 보고 살짝 아쉬웠어요.

'오버룩(overlook)이라는 단어는 무언가를 위에서 내려다본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중요한 사실을 못 보고 넘어간다는 뜻이기도 하다.'

글쎄요. 여기서 '오버룩 호텔'은 스티븐 킹의 소설이자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 <샤이닝>의 무대가 되는 '오버룩 호텔'을 말하는 것 같아요. 건물 그 자체가 괴물로서 무언가 불길한 일이 일어날 것 같은 공간이지요.   

호주에서 라디오 피디로 일하던 작가는 조지 밀러 감독을 만나 <매드 맥스>의 소설 작업을 담당하고요. 그의 재능을 알아본 감독의 요청으로 <매드 맥스 2 : 로드 워리어>의 각본을 함께 쓰지요. 이후 헐리웃으로 와 <페이백> <버티칼 리미트> <클리프행어> 등의 시나리오 작업을 합니다. <아이앰 필그림>은 그의 소설 데뷔작인데요. 소설 끝 '감사의 말'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영화를 쓰는 건 욕조에서 헤엄을 치는 것과 같고, 소설을 쓰는 건 대양에서 헤엄을 치는 것 같다고 말했던 사람은 '내셔널 북 어워드'의 소설부문 수상자이자 오스카상의 각본상 수상자인 존 어빙이었던 것 같다.'

(2권 625쪽)

정확한 비유입니다. 영상작업을 위한 대본의 경우, 도와주는 이들이 있어요. 영상화를 하는 과정에서 감독이나 배우, 편집자 등이 자신의 재능으로 이야기를 풍성하게 만들어주죠. 소설은 그렇지 않아요. 독자가 오로지 작가의 손만 붙잡고 그가 만든 미로의 세계를 따라갑니다. 영화는 그냥 편하게 보기만 하면 되지만, 소설은 독자가 끊임없이 머릿속에서 그림을 그려야 해요. 소설 읽기가 영화 감상보다 훨씬 더 능동적인 노력이 필요하지요. 제가 책을 더 좋아하는 건 그래서입니다. 수동적 감상보다는 능동적 노력이 더해진 행위에 즐거움을 느끼거든요. 그냥 받아먹기만 하는 건 좀 싱거운 느낌이랄까요? 영화보다 소설을 더 좋아하는 이유. 나의 노력이 더해져야 진짜 내 것 같아요.

<아이 앰 필그림>, 인류의 멸망을 꿈꾸는 남자와, 그 남자를 막으려는 필그림의 한 판 대결을 그린 소설입니다. 저는 세상을 구할 자신은 없어요. 그래도 코로나 탓에 지루한 일상을 구할 자신은 있습니다. 재미난 책 한 권만 있으면 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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