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짠돌이 독서 일기

다시 오지 않는 시간

by 김민식pd 2020. 4. 7.

동네 도서관에 책 반납하러 갈 때마다 저는 반납도서대 위의 책을 살펴봅니다. 이게 나름 책 고르는 요령 중 하나에요. 도서관에는 수 만권의 장서가 있지요. 그 중 어떤 책을 읽어야 할까요? 반납도서대 위에 놓인 책은 누군가 나 대신 책 고르는 수고를 해준 책이에요. 여기에 좋은 책이 있을 확률이 더 커요. 누군가 이미 고르고 고른 책이니까요. 최영미 시인의 시집이 놓여있는 걸 보고 오랜만에 시집을 읽을까 해서 빌렸어요. 

<다시 오지 않는 것들> (최영미 / 이미)

제목이 아련합니다. 한번 가면 다시 오지 않는 것들 중에는 시간이 있지요. 지금은 힘들어도, 지나고 나면 언젠가 그리워질 시간까지도. 시인이 6년 만에 낸 신작 시집인데요. 첫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를 읽으며, 한 시대가 저물었음을 함께 슬퍼한 적이 있어요. 20여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어떤 변화가 시인을 찾아왔을까요? 책의 첫번째 수록작입니다. 

<밥을 지으며>

밥물은 대강 부어요
쌀 위에 국자가 잠길락말락
물을 붓고 버튼을 눌러요
전기밥솥의 눈금은 쳐다보지도 않아요!
밥물은 대충 부어요, 되든 질든

되는대로
대강, 대충 살아왔어요
대충 사는 것도 힘들었어요
전쟁만큼 힘들었어요

목숨을 걸고 뭘 하진 않았어요
(왜 그래야지요?)
서른다섯이 지나 
제 계산이 맞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답니다! 

(11쪽)

시련이 올 때마다 생각합니다. '아, 내가 너무 계획을 철두철미하게 세웠나보다.' 일의 계획을 꼼꼼히 세울수록 세상은 알려줍니다. '얘야, 네 뜻대로 되지는 않을 거란다.' 그렇다고 인생을 대충대충 살기는 힘드니, 취미 생활이라도 대충대충 합니다. 책을 고르는 저의 자세가 그래요. 너무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습니다. 손끝에 집히는 대로 읽습니다. 그렇게 읽다가 마음에 드는 걸 찾아내면, 책을 도서관에 반납하고, 서점으로 달려갑니다. 이 시집은 소장욕구를 발동시킵니다. 이따금씩 꺼내어 소리 내어 읽고 싶은 시들이 많아요. 그중 또 하나가 <낙원>입니다.

<낙원> 

"인생은 낙원이에요
우리들은 모두 낙원에 있으면서
그것을 알려고 하지 않지요"

카라마조프 형제의 말을 베낀 그날은
흐린 날이었나, 맑았다 흐려진 하루의 끝,
까닭 모를 슬픔이 쏟아지던 저녁이었나

아낌없이 주는 나무 밑에서 낙엽을 줍던 소녀에게
슬픔도 고독도 핑크빛이었던 열다섯 살에게 
가장 먼 미래는 서른 살이었다
도저히 도달할 수 없을 것 같던 서른을 넘기고 
오십이 지나 뻣뻣해진 손가락으로 쓴다
어제도 오늘 같고 오늘도 내일 같아
달력을 보지 않는 새벽,

인생은 낙원이야. 
싫은 사람들과 같이 살아야 하는 낙원.

(74쪽)

<사업자등록>이라는 시를 보면, 아무도 최영미 시인의 시집을 내주지않아 직접 출판사를 차리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드나들던 머리에 계산서와 어음과 물류창고를 집어넣습니다. 산다는 것은 어쩌면 매 순간이 싸움의 연속입니다.  

시를 읽다보면, 문득 과거 내가 겪었던 일이 떠오릅니다. 시와 소설의 다른 점은 무엇일까요? 소설은 나를 주인공의 세계로 데려가고, 시는 나를 내 안의 세상으로 데려갑니다. 시를 읽으며 다시 오지 않는 날들을 되새겨 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 다시 오지 않는 것들을 떠올리면, 지금 이 순간 내 곁에 있는 것들의 소중함이 새록새록 돋아나거든요.

뜻하지 않게 모든 가족들이, 재택근무로, 개학연기로, 집안에 옹기종기 모여서 시간을 보내고 있어요. 가족이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며, 힘든 순간도 있겠지요. 언젠가는 이 시간도 웃으며 추억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소망합니다.

반응형

'짠돌이 독서 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실패에 대한 보답  (16) 2020.04.13
사진 신부 이야기  (14) 2020.04.09
스파이 스릴러 대작을 원하신다면  (10) 2020.04.06
방구석 세계일주 먹방여행  (17) 2020.03.27
새로나온 책, 간단한 리뷰  (13) 2020.03.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