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짠돌이 독서 일기

사진 신부 이야기

by 김민식pd 2020. 4. 9.

"버들 애기씨, 내년이면 열여덟이지예? 포와로 시집가지 않을랍니꺼?"

"포와? 거가 어데고?"

"미국 땅인데 섬이라 카데예. 거 가면 돈을 쓰레받기로 쓸어 담는다 캅니더. 그뿐 아이라 옷이고 신발이고 나무에 주렁주렁 달려 있어가 맘에 드는 기를 따서 입고 신으면 된다 캅니더. 날씨는 또 우떻고예. 사시사철 늦봄맨키로 따시니 겨울옷이 필요 없다 아닙니꺼."

"극락도 아이고 무신 그런 데가 있습니꺼?"

 

<알로하, 나의 엄마들> (이금이 장편소설 / 창비)

소설의 첫 대목에 나오는 대화입니다. 옛날에는 얼굴도 안 보고 결혼했다고 하지만, 1917년 일제 시대 때, 사진 한 장 달랑 들고 시집 간 여성들이 있어요. 구한말 가난한 조선땅을 벗어나 하와이로 돈 벌러 간 사내들이 있어요. 어쩌면 한인 최초의 이주노동자일지도 모르겠군요.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이 고국에서 신부를 구합니다. 한번 시집가면 다시는 고국으로 돌아올 수 없던 시절, 사진 신부를 자청한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아버지가 의병으로 나가 싸우다 죽은 후, 버들은 살림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자는 생각에 사진 신부를 자청합니다. 몰락한 양반집 딸, 시집가자 남편을 잃은 청상과부, 정신 나간 무당의 딸 등 한 마을에서 나고 자란 세 여자가 바다를 건너 갑니다. 가서 보니 돈많은 지주라던 사내는 가난한 사탕수수 농장의 노동자요, 서른살 총각이라던 이는 폭삭 삭은 중늙은이입니다.

'1910년부터 미국은 한인 노동자들의 사진결혼을 승낙했다. 혼자 온 수많은 사내들이 여자가 없어 결혼을 못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독신 생활이 길어지다 보니 술이나 도박에 빠지는 등 일에 지장을 주자 정부에서 사진결혼을 허락한 것이다. 늙은 남자들은 신부를 얻기 위해 젊어 보이는 옛날 사진이나, 남의 자동차 옆에서 찍은 사진을 중매쟁이에게 주었다.' 

(91쪽)

낙원을 꿈꾸며 찾아간 곳에서 지옥같은 현실을 만났을 때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책은 연약한 소녀들이 강인한 어머니가 되어가는 과정을 담담하게 그려갑니다. 그 배경에는 하와이 내 독립운동사가 펼쳐지고요. 마치 '토지'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처럼 격동의 세월을 온몸으로 부딪혀 살아내는 강인한 여성들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주먹 불끈 쥐고 사는 주인공의 삶을 응원하는 마음으로 페이지를 한 장 한 장 넘겼어요. 100년 전 사진 신부의 이야기를 읽다보니, 문득 지금 이 순간 우리 이웃의 모습이 오버랩됩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살고 있는 결혼 이주민 여성들도 마찬가지다. 그들 또한 자기 가족과 집과 나라를 떠나는 일이 큰 모험이었을 것이다. 한국에 온 그들이 낯선 언어와 환경에 적응하느라 얼마나 힘든지 다 알기 어렵다. 결혼 이주민 여성들과 연관된 안 좋은 소식을 들을 때마다 100여 년 전 사진 신부들을 보는 것 같아 마음 아프다. 버들과 홍주, 송화 이야기가 현재의 우리를 비추는 거울이 되었으면 좋겠다.' 

(390쪽, 작가의 말 중에서)

 
주인공들의 사연을 쫓아가다 시대의 선구자를 만나고 운명의 개척자를 만났어요. 모성의 강인함을 다시 한번 느꼈고요. 한인 미주 이민사에서 만난 사진 한 장에서 이렇게 멋진 이야기를 끌어내주신 작가님께 감사드립니다. 잊고 살던 시절을 우리 앞에 소환해줌으로써, 잊고 살던 지금의 이웃을 다시 돌아보게 해주시네요.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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