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짠돌이 독서 일기/꼬리에 꼬리를 무는 독서

아이를 위한 올바른 사랑법

by 김민식pd 2020. 1. 22.

 

저는 스티븐 킹의 팬입니다. 제가 스티븐 킹을 알게 된 건 1990년에 나온 영화 <미저리> 때문이지요. 베스트셀러 소설가가 주인공입니다. 자신의 인기 소설이 대중에게 영합하는 싸구려라고 생각합니다. 소설의 주인공 ‘미저리’를 죽이는 걸로 시리즈를 끝내고 작가로서 새로운 도전을 하려고 하는데요. 소설을 탈고하고 집으로 가던 길에 폭풍을 만나 차가 뒤집힙니다. 죽을 뻔한 작가를 구해준 건 전직 간호사였던 애니에요. 심지어 그녀는 작가의 넘버 원 팬이랍니다. 산 속에 있는 애니의 집에서 극진한 간호를 받으며 살아나는데요. 상냥하고 온화했던 애니가 차츰 작품에 대한 과도한 집착을 드러냅니다. 급기야 극중에서 죽었던 주인공 미저리를 살려내라고 합니다. “당신이 나가서 다음 소설을 출판하면, 미저리는 죽겠지? 그건 절대 용서하지 못해.” 소설 주인공을 살려내지 못하면, 내가 죽을 지경입니다.

90년에 제가 이 영화를 보고 놀란 건, 이게 저와 제 아버지의 이야기였거든요. 아버지는 제게 늘 말씀하셨어요. “나는 너를 사랑한단다. 나는 네가 행복하게 잘 살았으면 좋겠어. 네가 행복해지는 길이 뭔지 아니? 의사가 되는 거야. 너는 공부를 열심히 해서 의대에 가야 한단다. 그러니 의대 갈 성적이 나오지 않으면, 너는 내 손에 죽는다.” 저를 향한 아버지의 사랑이 제게는 죽을 것처럼 무서운 공포였어요.

 

<나는 내가 좋은 엄마인줄 알았습니다> (앤젤린 밀러 / 이미애 / 윌북)

책의 부제는 ‘사랑한다면서 망치는 사람-인에이블러의 고백’입니다. ‘인에이블러’라는 단어를 저자는 부정적 의미로 쓰더라고요. 이상했어요. enable은 불가능한 일을 가능케 하다라는 동사잖아요? enabler라면 힘든 일을 도와주는 사람, 조력자가 아닐까? 검색을 해봤습니다.

Definition of enabler
: one that enables another to achieve an end
especially : one who enables another to persist in self-destructive behavior
(출처:웹스터 온라인 영영 사전)

 

‘인에이블러’(조장자)
다른 사람이 목표를 이루도록 도와주는 사람
:특히 그가 자기 파괴적인 행동을 계속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람.

 

뜻을 알고 나니 무서워졌어요. 도와주는 사람인데, 스스로를 파괴하도록 도와주는 사람? 영화 <미저리>에 나오는 간호사 같은 건가? 교통사고로 다친 사람을 보살펴주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면 감금하고 학대하는 사람?

 

저자 앤절린 밀러는 착한 아내이자 좋은 엄마입니다. 대학 시절 연애를 하는데요, 남자 친구의 가족사가 좀 불행해요. 알콜 중독에 빠진 아버지 탓에 온 가족이 고통을 겪었거든요. 이렇게 힘든 과거를 가진 사람을 내가 사랑으로 품어야겠다고 저자는 결심합니다. 결혼하고 가정을 꾸리는데요. 남편은 심한 우울증으로 고생을 합니다. 불안증이 발작하듯 재발하는 탓에 가정 생활이 힘들어요. 어린 시절 학대의 트라우마가 남편을 힘들게 하나보다, 저자는 정성을 다해 남편을 돕습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힘을 주고 있고
나는 유용한 사람이며
누군가 나를 필요로 한다고 느끼는 걸 좋아한 것이다.’

(34쪽)

 

‘그를 이해하고, 사랑하고, 그의 진가를 알아보고,
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이 되도록 도와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나라고 믿었다.’

(35쪽)

 

이런 사람이 남편만 도와줄까요? 아이도 열심히 도와주는 엄마입니다. 어느 날 어린 아들이 이상한 행동을 합니다. 자신이 약물에 중독되었다며 사고를 치고요. 학교에서는 과잉 행동 장애로 말썽을 자꾸 일으킵니다.

 

‘아들이 성장하는 동안, 나는 남편을 대할 때와 비슷하게 그 애를 대했다. 아이의 기이한 행동을 받아주었고, 아이를 위해 핑계를 대주고, 자질구레한 일을 대신 해주고, 또 아이에게 필요한 것을 앞질러 해결해주었다. 아들이 고등학교 마지막 학년에 학교를 그만둔 일도 합리화했고, 군대에서 기본 훈련을 끝내지 못했을 때도 집에 돌아온 아이를 덮어놓고 반겨주었다.’

(59쪽)

 

딸도 자라면서 많이 힘들어요. 남편, 아들, 딸, 하나같이 이 사람의 도움 없이는 못 사는 가족인가 봐요. 엄마와 딸이 함께 상담을 받습니다. 엄마가 얘기를 하죠.

“딸이 이렇게 힘든데 제가 딸이 행복해지도록 도와줄 수 없어서 안타까워요.”

그러자 상담가가 묻습니다.

“딸의 행복이 당신 책임인가요?”

저자가 당황합니다. 그러자 상담가가 딸에게 물어요.

“너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 엄마의 의무라 생각하니?”

딸은 “물론 아니죠.”라고 대답합니다. 딸의 행복을 책임지는 것이 엄마의 의무라고 생각한 사람은 엄마 한 사람 밖에 없어요.

아들이 정신 분열증에 걸려 병원에 갔을 때, 저자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가족을 위해 살아 있고 그들의 짐을 대신 질 수 있을 만큼 튼튼하니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하느님께 여러 차례 감사해했다. 하느님이 이렇게 답하실 거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못했다.
“이 사람들이 스스로 하는 법을 배우도록
비켜주는 것이 어떨까?”’

(63쪽)

 

‘내가 아이들의 일을 대신하고 싶어 했다. 아이들의 인생을 애들 자신보다 내가 더 잘 처리할 수 있다고 믿었다. 실은 내가 아이들의 정체성을 부정하고 있다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정체성이란 감각은 각종 경험을 통해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발견하면서 생겨난다. 그리고 자존감은 자신이 가진 자질을 계발하면서 생겨나는 감정이다. 나는 아이들의 정체성을 빼앗았을 뿐 아니라 자존감을 조금씩 깎아내리고 있었다.’

(93쪽)

 

어느 날 저자가 깨달은 것이 있어요.

‘가족을 한 사람으로부터 지켜주지 못했는데, 그 사람이 바로 나였다.’고.

 

귀신영화를 볼 때 무서울 때가 언제인가요? 영화를 한참 보다가 문득, ‘혹시 내 옆에 앉아있는 이 사람이 알고 보니 귀신 아냐?’ 싶을 때입니다. 더 무서운 건 ‘근데 알고 보니 내가 귀신 아냐?’ 책을 읽으며 무서웠어요. 가족을 위해 사랑으로 헌신하는 엄마와 아내, 알고 보면 그가 바로 가족을 망치는 사람이 아닌가 싶어서요.

 

‘인에이블러들이 걷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모든 일을 대신 해주고, 알코올 중독자들을 뒷바라지하고, 침대에서 일어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을 위해 하녀 노릇을 한다면, 의존자들은 인생에서 자신의 운명에 대처하기 위한 수단을 개발하기 어려워진다. 의존자들에게 그들의 인에이블러들은 극복해야 할 또 다른 장애물, 어쩌면 가장 큰 장애물이 되어 버린다.’

 

(99쪽)

 

자, 내가 상대를 망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면 무엇을 해야 할까요? 내가 변해야 합니다. 내 것이 아닌 책임과 의무는 적법한 주인에게 돌려줘야 해요. 오롯이 내 것만 간직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일을 더 신경 쓸 필요가 없다면, 더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자신에게 할애할 수 있어요. 나의 인생을 사는 것이, 가족에게도 도움이 되는 일입니다.

 

제가 중학생일 때, 아버지가 “나중에 네가 어른이 되면 이 2가지 기술은 반드시 익혀야 해.”라고 하셔서 학원에 가서 돈을 주고 배운 게 두 가지 있어요. 지금 제 인생에 아무짝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 기술, 뭘까요? 바로 주산과 펜글씨입니다. 저는 1970년대 말에 주산 학원을 다니고 서예학원에서 펜글씨를 배웠어요. 70년대에는 주산을 잘 놓고, 글씨를 잘 쓰는 게 성공에 필요한 기술이었거든요. 10년도 지나지 않아 컴퓨터가 나오면서 두 가지 기술 다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졌지요.

아버지는 중학생 시절 제가 소설을 읽을 때마다 내 혼을 내셨어요. “책 읽는다고 돈이 나오냐, 쌀이 나오냐.”고요. 그렇게 구박한 독서가 지금은 제 삶을 지탱하는 도구가 되었어요.

사람의 정체성은 스스로 찾아가는 것입니다. 이걸 부모가 대신 찾아줄 수 없어요. 자존감 역시 마찬가지고요. 제가 영어 조기 교육에 반대하는 이유입니다. 조기 유학을 통해 영어를 배웠다면 아이의 영어 실력은 그냥 부모가 준 비싼 선물일 뿐입니다. 아이의 자존감 향상에 도움이 되지 않아요. 오히려 혼자 마음을 먹고 회화책을 외워서 공부한 사람은 자존감이 생겨요. 스스로 노력을 통해 실력을 갖추었으니까요.

 

<나는 내가 좋은 엄마인줄 알았습니다>

책을 읽고 다시 결심합니다. 좋은 부모가 되려고 노력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선 내 삶을 잘 살자고요. 더 행복한 부모가 더 좋은 부모라고 믿습니다. 행복은 스스로의 삶을 책임지는 자세에서 만들어집니다. 아이는 아이의 삶을 스스로 책임질 수 있도록 믿고 놔두려고요.

 

꼬꼬독 꼬꼬독~ 꼬리에 꼬리를 무는 구독, 다음 시간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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