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피디에게 독서는 일입니다. 책을 읽으며 드라마의 원작과 소재를 찾습니다. 오피스물을 코미디로 만들고 싶어요. 사무실이라는 일터에서 벌어지는 인생의 기쁨과 슬픔을 다루고 싶습니다. 직장은 월급의 기쁨을 주는 곳이기도 하고, 존재로서 슬픔을 느끼는 곳이기도 하잖아요?

1년 전, 우연히 페이스북에 올라온 창비 신인 소설상 당선작을 읽었어요. 스마트폰에서 소설한 편을 다 읽는 게 쉽지는 않은데, 이야기의 흐름이 워낙 재미있어 앉은 자리에서 다 읽었어요. 당시 창비 홈페이지의 서버를 마비시킬 정도로 선풍적인 인기였지요. 무료 공개 2주 만에 15만 명, 총 40만여 명이 소설을 웹으로 읽었어요. 언젠가 베스트극장 같은 단막극을 만든다면, 원작으로 삼고 싶은 작품입니다. 그 당선작이 포함된 작가의 작품집이 책으로 나왔어요. 

<일의 기쁨과 슬픔> (장류진 / 창비)

소설의 주인공은 스마트폰용 앱 개발 회사를 다닙니다. '우동마켓'이라고 '우리 동네 중고 마켓'이라는 앱을 만드는데요. 글을 너무 많이 올리는 사용자 때문에 골치를 앓습니다. 매번 뜯지도 않은 신제품을 인터넷 최저가보다 싸게 파는 헤비 유저가 있어요. 회사에서는 불안합니다. 혹 문제가 있는 사용자 아닐까? 회사 물건을 훔쳐다 파는 건가? 장물은 아닌가? 결국 주인공 안나가 그 사용자를 만나 직거래를 하는데요. 그렇게 물건을 많이 올리는 사연이... 참... 웃픕니다. 처음 읽을 때는 너무 웃겼어요. 회장님의 꼰대짓, 갑질이 너무 웃겼거든요. 그런데 그러다 문득 울적해졌어요. 직장인은 어디서나 파리 목숨이구나....... 그래도 소설의 결말은 무척 따듯합니다. 그렇게 일을 해서 번 돈으로 좋아하는 공연 예매도 하고, 홍콩행 왕복 티켓도 사니까요.

장류진 작가는 대학에서 사회학을 전공한 뒤 경기 판교의 IT 회사에서 7년을 일했어요. 1년간 쉬면서 대학원에서 소설을 공부하고 다시 들어간 두 번째 직장에서 등단 소식을 접했어요. 이제는 전업 작가로 일하기 위해 퇴사했대요. 아, 오랜 세월 직장인으로 일한 내공이 글에서 폴폴 풍깁니다. 젊은 세대가 일터에서 느끼는 다양한 감정을 접했어요.

저는 68년생입니다. 저자는 86년생이에요. 회사에 86년생 후배들도 많지만, 그들과 마주 앉아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누긴 쉽지 않지요. 이럴 땐 86년생 저자가 쓴 소설을 통해 후배들의 마음을 읽어봅니다. 같은 책에 수록된 <도움의 손길>이라는 단편을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우리 부부는 아이를 가지지 않기로 했다. 나에게 아이는 마치 그랜드 피아노와 같은 것이었다. 평생 들어본 적 없는 아주 고귀한 소리가 날 것이다. 그 소리를 한번 들어보면 특유의 아름다움에 매혹될 것이다. 너무 매혹된 나머지 그 소리를 알기 이전의 내가 가엾다는 착각까지 하게 될지 모른다. 당연히, 그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책임감 있는 어른, 합리적인 인간이라면 그걸 놓을 충분한 공간이 주어져 있는지를 고민해야 할 것이다. 아무리 부족해도 어떻게든 욱여넣고 살면 살아진다는 것도 알고 있다. 물론 살 수는 있을 것이다. 집이 아니라 피아노 보관소 같은 느낌으로 살면 될 것이다. 이십평대 아파트에는 그랜드 피아노를 들이지 않는다. 그것이 현명한 우리 부부가 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143쪽)

 

이 글을 읽고, 아이를 낳지 않겠다는 선택을 한 후배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어요. <탐페레 공항>이라는 단편에는 피디 지망생이 주인공으로 나옵니다. 방송국 신입 피디 공개채용에 응시하기 위해 자기소개서를 쓰는데요. 여러 질문이 나옵니다.

‘자신이 반드시 피디가 되어야 하는 이유를 기술하시오.

인생에서 가장 도전적이었던 경험과 그로 인해 느낀 점을 기술하시오.

리더십을 발휘했던 경험을 3개 이상 기술하시오.

인생에서 가장 후회했던 경험과 그 이유를 기술하시오.’

 

깜짝 놀랐어요. 진짜 피디 시험 문항이 저렇거든요. 작가가 조사를 참 성실하게 했다는 걸 알 수 있었어요. 지금의 나라면 어떻게 답할까? 고민을 해봤는데요. 요즘처럼 경쟁이 치열한 시대라면 저는 입사는 힘들 것 같아요.

 

소설의 주인공이 겪은 인생에서 가장 후회했던 경험을 읽다 눈물이 났어요. <탐페레 공항>은 책에 수록된 마지막 작품인데, 여운이 길게 남습니다. 내내 웃겨주다 막판엔 울리는 영화 같았어요.

 

책 끝에는 해설이 나오는데요. 제목이 <센스의 혁명>입니다. 아, 이 소설집을 표현하는 정확한 말이네요. 한국 소설의 새로운 시대가 열리는 것 같은 그런 느낌입니다.

 

‘여기에는 한국문학이 오랫동안 수호해왔던 내면의 진정성이나 비대한 자아가 없다. 깊은 우울과 서정이 있었던 자리에는 대신 정확하고 객관적인 자기인식, 신속하고 경쾌한 실천, 삶의 작은 행복을 소중히 여길 줄 아는 마음이 있다. 자본주의 시스템에 대한 정확한 이해, 생존과 생활에 대한 탁월한 감각, 삶의 질과 행복을 지키는 센스를 겸비한 장류진 소설의 산뜻하고 담백한 개인이야말로 오늘날 한국문학의 새로운 얼굴이다.’

(215쪽)

 

책을 읽고 나니 평론가 선생님의 글 한 줄 한 줄이 제 마음을 대변하는 것 같습니다.

 

장류진 작가님은 저자 싸인을 할 때, 이렇게 쓰신대요.

“감사합니다, 선생님. 사시는 동안 적게 일하시고 많이 버세요.”

열심히 일을 해 성공하세요, 라거나 새해에는 대박내세요. 라는 말 대신인거죠.

요즘 시대, 요즘 세대를 대변하는 새로운 작가가 등장한 것 같습니다.

여러분께도, 똑같은 인사를 들려드리고 싶어요. 여러분, 사시는 동안 적게 일하고 많이 버세요!

 

 

 

Posted by 김민식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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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아리아리짱 2020.02.07 07:5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김민식 PD 님아리아리!

    독서가 일인 피디님은 전생에 나라를 구하신게쥬~!
    그 피디님을 통해 '공짜로 즐기는 세상'을 만난 우리는
    도시 하나 쯤은 구했을것 같아요~! ^^

    오늘 또 새로운 작가님 소개 감사합니다.
    86년생인 아들 세대를 작가님의 작품을
    통해 좀더 이해 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즐기는 주말 되세요~!

  3. 보리랑 2020.02.07 08:4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왜 애를 안 낳을까 이기적이다 했는데, 돌아보면 퇴근해서 내몸도 무거운데 엄마라고 쪼르르 달려오는 아기가 감당 안될 지경이었으니 쬐금 이해가 되네요 ; 사시는 동안 즐겁게 일하고 필요한 만큼 버세요~^^

  4. 오달자 2020.02.07 09:0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피디님 추천해주신 에밀리 책이 어제 막 도착해서 읽는데...혼자 얼마나 키득거리는지 모릅니다. ㅎㅎ

    에밀리 다음 장류진 작가~~바로 이어 읽어야겠습니다.^^

    적게 일하고 많이 버는 직장인의 삶을 꿈꾸며...
    오늘 하루 시작합니다~^^

  5. Mr. Gru [미스터그루] 2020.02.07 09:1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드라마 pd로서 일의 기쁨! 만화를 봐도 그게 일(원작 검토)이다!!
    내가 하는 일이 만화를 보는 즐거운 일이라니 직업 선택 잘 하셨네요 ㅎㅎ
    다만 일이 되다 보니 마냥 재밌게 보실 수만은 없으시겠지요.
    잘 못하면 전 국민이 알게 되니 그 압박도 심할 텐데 견뎌내시는 것이 대단합니다.

    제 또래의 직장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재밌게 써놓았다니 읽어보고 싶습니다.
    그랜드피아노로 표현하는 필력을 보면 분명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오늘도 감사합니다~!

  6. GOODPOST 2020.02.07 09:2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똑똑한 작가들은 그들만의 생각을 참 적절하게 잘 표현하네요.
    아이를 그랜드 피아노로 표현하다니...

    이렇게 묘사하고 표현하는 작가의 책 꼭 읽어 보고싶습니다.
    시대의 흐름을 배우고 현 시대를 한번 더 생각하게하는
    "공즐세" 블러그 정말 최고입니다.

  7. 새벽부터 횡설수설 2020.02.07 09:3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일의 기쁨과 슬픔, 왠지 자기계발서 같은 느낌이 납니다.
    모두 어제보다 나은 오늘을 만들어 갑시다.^^

  8. silahmom 2020.02.07 09:5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늘도 좋은 책 리뷰 감사합니다. ^^
    직장인인데 , 다행이 오늘이 금요일이라서 ㅋㅋㅋ
    기분이 좋네요. 오늘은 최대한 적게 일해 볼랍니다.

  9. workroommnd 2020.02.07 10:0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책과 가깝지 않은 저지만, 저책, 읽고 싶어지네요~
    메모장에 기록해 둘께요~


  10. 코코 2020.02.07 10:2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도 이 책 "일의 기쁨과 슬픔' 을 참 인상 깊게 읽었어요.
    회사에서 일어나는 여러 일을 보면 정말 참 웃픈 것 같아요.
    아이의 그랜드 피아노 비유는 저도 읽으며 감탄했었는데 ㅎㅎ
    어떻게 저런 비유를 생각해 냈을까 싶어서요.
    누구라도 읽으면 느낌이 확 오게 말이에요.

    지난번 추천해주신 '하드보일드는 나의 힘' 을 요즘 취침 전에
    읽고 있는데요. 너무 취향 저격이에요.!조금만 읽고 덮으려 했는데
    그렇게 되질 않아.. 저의 취침 시간은 늦어지네요.. ㅜㅜㅎㅎ
    즐거운 책 추천 감사합니다. ^_^

  11. 더치커피좋아! 2020.02.07 10:5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내가 좋아하는일을 하며
    직장을 다닌다면 얼마나 행복할까요?^^

    다니다보니 이건 아니라고 생각이 든다
    하더라도 그 시간이 분명 쓸데없는 시간은
    아닐것입니다.

    장류진 작가님처럼 자기소설의 재료로
    쓸수있는 인생의 이야기가 될테니까요.

    이 일을 하고있어 기쁘고
    이 일을 견디느라 슬픈 우리.

    기쁨과 슬픔은 그 자체로 보석같은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들의 하루.
    마음은 즐거운 금요일되세요.^^
    피디님도 파이팅!

  12. renodobby 2020.02.07 11:1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는 거지같은 한 회사의 노예 생활을 오늘로 마칩니다. 아직 결정된 것이 하나도 없어 초조하긴 하지만 남은 2월은 좋아하는 일을 하며 할 수 있도록 준비해야겠습니다.
    이 책도 읽어보구요! 감사합니다 :)

  13. 아야찌 2020.02.07 11:5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독서는 일이다.첫 소절부터 와닿았네요. 굉장히 좋은말 같으면서도 일이라는 말이 독서를 덮는듯한 약간의 우울함도 같이 오네요.ㅎㅎ독서를 많이 하고싶은 1인으로써 부러운 일이기도 하네요~~ ㅎㅎ 글 잘 읽었습니다.

  14. 아프리칸바이올렛 2020.02.07 16:3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작가의 싸인 사시는 동안 적게 일하시고
    많이 버세요 직장인들의 솔직한 욕망이죠
    좀 이야기가 새지만
    하루 하루가 다 선물입니다
    피디님 싸인도 진짜 좋습니다 ^~^
    밀레니얼 세대에게 힘든게 뭐냐고
    묻기보다 그들의 기쁨과 슬픔에 대한
    책을 먼저 보시는 소통 달인 피디님의 팁
    제게도 써야겠다 싶어요
    그랜드 피아노에 비유하여 아이를 갖지
    않는 이유에 대한 설명은
    공감까지는 아니여도 이기적인 선택이
    아닌 고민 끝에 내린 선택임을 느끼게 합니다

  15. 시재희 2020.02.07 17:2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작가님! 매일 써봤니?를 단숨에 읽었습니다.
    좋은 선배님이 어깨를 두드려주는 느낌이랄까요.
    매일 글쓰기 고민만 하던 제가 일단 저지르는 용기를 냈습니다.
    작가님 블로그를 보기 위해 티스토리 아이디와 비번을 찾은 김에
    작가님 책 리뷰도 한 번 써 봤습니다.
    얼마 전에 저도 장류진 작가님 책을 샀는데,
    얼른 읽어보고 싶네요.
    늘 건강하세요!

  16. 나겸맘 리하 2020.02.08 03:4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새로운 작가의 탄생이군요~
    좋은 작가, 시대를 이끌고 갈 작가는
    연령과 하등의 상관없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에
    통찰이 담겨있네요.
    현실을 피아노보관소로 표현하여
    아이없이 사는 합리적? 선택을
    슬픈 은유로 표현했네요.
    참 탁월합니다.

  17. 달려왔어요 2020.02.08 09:1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도서관에서 내용 대충 쑥 훑고
    마음이 두근거리는 책이 있으면 집에 가져와 읽어요.
    작가 이름을 챙겨보는 꼼꼼함은 없구요.
    빌려온 5권중 3권이 한분의 책이라는걸 알고..멘붕?이 옵니다..갑자기 훅 들어온 느낌..순식간에 세권을 다 읽었어요. 누구신지 찾아보게되고..이곳으로 달려왔네요.
    글자 하나하나에 응원합니다!!

  18. 한정애 2020.02.09 19:2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작가님 신간은 언제쯤 만나볼수있을까요?

  19. 섭섭이짱 2020.02.11 03:0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녕하세요.

    피디님이 오피스 드라마 만드셔도 재밌을거 같아요.
    예전 <손자병법> 드라마 스타일처럼 캐릭터 재밌게 해서
    만들면 요즘 시대에도 통할수도 있을거 같아요 ^^

    아직 이 책은 안 읽어봤지만 같은 업종이라 그런지
    초기 수상작이나 작가 인터뷰는 읽어보며.
    앞으로가 더 기대되는 작가였어요.
    응원하는 맘으로 최근 연재한 문학잡지들도 샀어요 ^^

    전 피디님에게 요렇게 인사드리고 싶네요
    요번 신간 마니마니 팔리세요!!!

  20. livetax 2020.02.11 08:4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녕하세요 피디님^_^마음이 헛헛하거나 뭔가 조금 지칠때 여기를 들어옵니다 ㅜㅠ 위로를 받기도 하고 의욕이 생기기도 해서요 ㅎㅎ 영혼에 링거를 맞는 기분 ? ^^ 오늘 이 책도 꼭 읽고 싶어집니다. 항상 다양한 책을 통해 이야기를 풀어주셔서 감사해용~~
    피디님 신간도 곧 나온다구요 ? 와우 !! 축하드립니다~~~ 기대가 마구 됩니닷 !!!

  21. 밀크콩1022 2020.03.22 20:1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피디님이추천해주셔서 너무 재밌게 읽었습니다. 같은 직장인으로써 공감이 되고 너무 웃게서 후딱 다 읽게되는 소설이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