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짠돌이 독서 일기/꼬리에 꼬리를 무는 독서

착한 사람은 차별 안 하나요?

by 김민식pd 2020. 1. 31.

 

연말이 되면 신문이나 매체를 통해 올해의 책이 발표되지요. 한 해 동안 나온 좋은 책 중 빠뜨린 건 없나 살펴봅니다. 교보문고, 예스24, 알라딘 선정 2019 올해의 책, <선량한 차별주의자>, 2019년에 놓치셨다면 2020년에 찾아 읽어도 좋을 책입니다.

<선량한 차별주의자> (김지혜 / 창비)

'‘결정장애.’ 이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우물쭈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너무 많이 고민하는 나의 부족함을 꼬집는 간명한 말 같았다. 나 스스로를 비하하는 의미를 담아 많은 대화에서 수없이 사용했다. 혐오표현에 관한 토론회에서 이 결정장애라는 말을 썼다. 참석자 중 한분이 나에게 조용히 물었다.

“그런데 왜 결정장애라는 말을 쓰셨어요?”'

저자는 대학에서 소수자, 인권, 차별에 대해 가르치는 사람입니다. 평소 혐오표현을 쓰지 말자고 말하는 사람인데, 많은 장애인들이 참석해서 듣고 있던 자리에서 ‘장애’라는 말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 의식조차 못했다고요. 우리는 일상에서 습관적으로 장애라는 말을 비하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어요. 무언가에 ‘장애’를 붙이는 건 ‘부족함’ ‘열등함’을 의미한다고요.

차별은 나쁜 겁니다. 우리가 다 그걸 알지요. 우리는 이주노동자를 외국인이라고 차별하지 않아요. 단지 칭찬할 뿐이지요. 우리말이 유창한 외국인에게 “한국인 다 되었네요.”라고 칭찬을 합니다. 그런데 이걸 상대가 칭찬으로 받아들여야 하나요? 내가 굳이 한국인이 되고 싶은 것도 아닌데 한국인이 된다는 말이 칭찬일까요? 장애인에게 따스하게 말을 건넵니다. “희망을 가지세요.” 그럼 장애를 가진 현재는 희망이 없다는 건가요? 선량한 시민일 뿐 차별은 하지 않는다고 믿었는데, 어쩌면 나도 모르는 새 ‘선량한 차별주의자’가 된 건 아닐까요? 타인을 차별할 뿐 아니라 때로는 우리 자신을 차별의 대상으로 삼습니다.

‘사람들은 타인의 시선으로 자신의 가치를 평가한 결과, 사회가 부여한 낙인을 자신 안에 내면화하고, 스스로를 부끄럽고 수치스럽게 여긴다. 그 결과는 개인적인 수준에 머무르지 않는다. 굳이 타인들이 노골적으로 차별하지 않아도 본인들이 소극적으로 행동하면서 사회적으로 자연스럽게 차별적인 구조가 유지된다. 차별을 받는 걸 알면서도 스스로 부족하고 열등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서 저항을 하지도 않는다.’

(66쪽)

건강하게 일을 하며 잘 살면 좋겠지만, 인생은 뜻대로만 풀리지는 않습니다. 때로는 약자가 되고, 타인에게 도움을 받아 살아야 할 때도 있어요. 우리는 모두 약자로 태어나 약자를 향해 갑니다. 태어나면 한동안 우리는 부모의 도움을 받고 살아야 하고요. 나이가 들면 역시 타인의 도움에 의지해 한동안 살아야 합니다. 나이가 들어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질병을 얻고 장애를 얻어 갈 겁니다. 시력, 청력, 기억력 다 나빠질 거예요. 약자들과 함께 사는 법을 익히지 못한 사람은 훗날 스스로가 약자가 되었을 때, 그 고통이 너무 커집니다. 차별하는 사람이 줄어야 차별받는 사람이 사라집니다. 내가 차별하지 않고 살아야 차별당하지 않을 겁니다.

‘세상은 공명정대하고 사람은 누구나 열심히 한 만큼 결실을 맺는다고 믿는다. 그렇게 믿는 이유는 그래야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세상이 공정하다고 믿어야 장기적인 목표를 세우고 앞으로의 삶을 계획할 수 있다. 평범한 일상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이 믿음은 필요하다.

문제는 부정의한 상황을 보고도 이 가설을 수정하지 않으려 할 때 생긴다. 세상이 언제나 공명정대하다는 생각을 바꾸는 대신 ‘피해자를 비난’하는 방향으로 상황을 왜곡하여 이해하기 시작한다. 세상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불행한 상황에 처한 피해자가 안 좋은 특성을 가지고 있거나 잘못된 행동을 했기에 그런 일을 겪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공정한 세상에서 살고 있다는 바로 그 믿음 때문에 오히려 세상을 공정하게 만들지 못하는 모순이 생긴다.

그러니 세상이 공정하다고 믿는, 혹은 그렇게 믿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 세상이 부정의하다고 외치는 사람의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는다. 대신 비난의 화살은 부정의를 외치는 그 사람에게 돌아간다. 그에게 뭔가 잘못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상황은 꽤 자주 있다. 왕따나 괴롭힘, 성폭력, 가정폭력 사건 등 수많은 사건들에서 우리는 종종 피해자를 먼저 의심한다. 차별에서도 마찬가지다. 차별의 부당함을 보기보다 차별의 부당함을 외치는 소수자의 흠을 찾고 비난한다. 그렇게 차별은 계속되고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

(168쪽)

차별을 왜 없애야 할까요? 불평등한 세상은 살기 너무 고단하기 때문이죠. 구조적 문제를 개인의 노력으로 해결하도록 종용하거든요. 불평등이라는 사회적 부정의에 대한 책임을, 차별을 당하는 개인에게 지웁니다. 그래서 삶이 불안하지요. 아프거나 실패하거나 어떤 이유로건 소수자의 위치에 놓이지 않도록 조심해야 해요. 원치 않게 소수자의 위치에 놓였을 때 그 사실을 부정하며 고통을 감내하느라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합니다.

‘내가 모르고 한 차별에 대해 “그럴 의도가 아니었다” “몰랐다” “네가 예민하다”는 방어보다는, 더 잘 알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어야 했는데 미처 생각지 못했다는 성찰의 계기로 삼자고 제안한다. 우리가 생애에 걸쳐 애쓰고 연마해야 할 내용을 ’차별받지 않기 위한 노력‘에서 ’차별하지 않기 위한 노력‘으로 옮기는 것이다.’

(189쪽)

책을 읽는 이유, 조금 더 무해한 사람이 되고 싶어서입니다. 타인에게 상처주지 않는 해롭지 않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그런 공부에 큰 도움이 되는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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