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짠돌이 독서 일기/꼬리에 꼬리를 무는 독서

직장인을 위한 위로

by 김민식pd 2020. 2. 7.

드라마 피디에게 독서는 일입니다. 책을 읽으며 드라마의 원작과 소재를 찾습니다. 오피스물을 코미디로 만들고 싶어요. 사무실이라는 일터에서 벌어지는 인생의 기쁨과 슬픔을 다루고 싶습니다. 직장은 월급의 기쁨을 주는 곳이기도 하고, 존재로서 슬픔을 느끼는 곳이기도 하잖아요?

1년 전, 우연히 페이스북에 올라온 창비 신인 소설상 당선작을 읽었어요. 스마트폰에서 소설한 편을 다 읽는 게 쉽지는 않은데, 이야기의 흐름이 워낙 재미있어 앉은 자리에서 다 읽었어요. 당시 창비 홈페이지의 서버를 마비시킬 정도로 선풍적인 인기였지요. 무료 공개 2주 만에 15만 명, 총 40만여 명이 소설을 웹으로 읽었어요. 언젠가 베스트극장 같은 단막극을 만든다면, 원작으로 삼고 싶은 작품입니다. 그 당선작이 포함된 작가의 작품집이 책으로 나왔어요. 

<일의 기쁨과 슬픔> (장류진 / 창비)

소설의 주인공은 스마트폰용 앱 개발 회사를 다닙니다. '우동마켓'이라고 '우리 동네 중고 마켓'이라는 앱을 만드는데요. 글을 너무 많이 올리는 사용자 때문에 골치를 앓습니다. 매번 뜯지도 않은 신제품을 인터넷 최저가보다 싸게 파는 헤비 유저가 있어요. 회사에서는 불안합니다. 혹 문제가 있는 사용자 아닐까? 회사 물건을 훔쳐다 파는 건가? 장물은 아닌가? 결국 주인공 안나가 그 사용자를 만나 직거래를 하는데요. 그렇게 물건을 많이 올리는 사연이... 참... 웃픕니다. 처음 읽을 때는 너무 웃겼어요. 회장님의 꼰대짓, 갑질이 너무 웃겼거든요. 그런데 그러다 문득 울적해졌어요. 직장인은 어디서나 파리 목숨이구나....... 그래도 소설의 결말은 무척 따듯합니다. 그렇게 일을 해서 번 돈으로 좋아하는 공연 예매도 하고, 홍콩행 왕복 티켓도 사니까요.

장류진 작가는 대학에서 사회학을 전공한 뒤 경기 판교의 IT 회사에서 7년을 일했어요. 1년간 쉬면서 대학원에서 소설을 공부하고 다시 들어간 두 번째 직장에서 등단 소식을 접했어요. 이제는 전업 작가로 일하기 위해 퇴사했대요. 아, 오랜 세월 직장인으로 일한 내공이 글에서 폴폴 풍깁니다. 젊은 세대가 일터에서 느끼는 다양한 감정을 접했어요.

저는 68년생입니다. 저자는 86년생이에요. 회사에 86년생 후배들도 많지만, 그들과 마주 앉아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누긴 쉽지 않지요. 이럴 땐 86년생 저자가 쓴 소설을 통해 후배들의 마음을 읽어봅니다. 같은 책에 수록된 <도움의 손길>이라는 단편을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우리 부부는 아이를 가지지 않기로 했다. 나에게 아이는 마치 그랜드 피아노와 같은 것이었다. 평생 들어본 적 없는 아주 고귀한 소리가 날 것이다. 그 소리를 한번 들어보면 특유의 아름다움에 매혹될 것이다. 너무 매혹된 나머지 그 소리를 알기 이전의 내가 가엾다는 착각까지 하게 될지 모른다. 당연히, 그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책임감 있는 어른, 합리적인 인간이라면 그걸 놓을 충분한 공간이 주어져 있는지를 고민해야 할 것이다. 아무리 부족해도 어떻게든 욱여넣고 살면 살아진다는 것도 알고 있다. 물론 살 수는 있을 것이다. 집이 아니라 피아노 보관소 같은 느낌으로 살면 될 것이다. 이십평대 아파트에는 그랜드 피아노를 들이지 않는다. 그것이 현명한 우리 부부가 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143쪽)

 

이 글을 읽고, 아이를 낳지 않겠다는 선택을 한 후배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어요. <탐페레 공항>이라는 단편에는 피디 지망생이 주인공으로 나옵니다. 방송국 신입 피디 공개채용에 응시하기 위해 자기소개서를 쓰는데요. 여러 질문이 나옵니다.

‘자신이 반드시 피디가 되어야 하는 이유를 기술하시오.

인생에서 가장 도전적이었던 경험과 그로 인해 느낀 점을 기술하시오.

리더십을 발휘했던 경험을 3개 이상 기술하시오.

인생에서 가장 후회했던 경험과 그 이유를 기술하시오.’

 

깜짝 놀랐어요. 진짜 피디 시험 문항이 저렇거든요. 작가가 조사를 참 성실하게 했다는 걸 알 수 있었어요. 지금의 나라면 어떻게 답할까? 고민을 해봤는데요. 요즘처럼 경쟁이 치열한 시대라면 저는 입사는 힘들 것 같아요.

 

소설의 주인공이 겪은 인생에서 가장 후회했던 경험을 읽다 눈물이 났어요. <탐페레 공항>은 책에 수록된 마지막 작품인데, 여운이 길게 남습니다. 내내 웃겨주다 막판엔 울리는 영화 같았어요.

 

책 끝에는 해설이 나오는데요. 제목이 <센스의 혁명>입니다. 아, 이 소설집을 표현하는 정확한 말이네요. 한국 소설의 새로운 시대가 열리는 것 같은 그런 느낌입니다.

 

‘여기에는 한국문학이 오랫동안 수호해왔던 내면의 진정성이나 비대한 자아가 없다. 깊은 우울과 서정이 있었던 자리에는 대신 정확하고 객관적인 자기인식, 신속하고 경쾌한 실천, 삶의 작은 행복을 소중히 여길 줄 아는 마음이 있다. 자본주의 시스템에 대한 정확한 이해, 생존과 생활에 대한 탁월한 감각, 삶의 질과 행복을 지키는 센스를 겸비한 장류진 소설의 산뜻하고 담백한 개인이야말로 오늘날 한국문학의 새로운 얼굴이다.’

(215쪽)

 

책을 읽고 나니 평론가 선생님의 글 한 줄 한 줄이 제 마음을 대변하는 것 같습니다.

 

장류진 작가님은 저자 싸인을 할 때, 이렇게 쓰신대요.

“감사합니다, 선생님. 사시는 동안 적게 일하시고 많이 버세요.”

열심히 일을 해 성공하세요, 라거나 새해에는 대박내세요. 라는 말 대신인거죠.

요즘 시대, 요즘 세대를 대변하는 새로운 작가가 등장한 것 같습니다.

여러분께도, 똑같은 인사를 들려드리고 싶어요. 여러분, 사시는 동안 적게 일하고 많이 버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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