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짠돌이 독서 일기

정유정 작가의 변신은 무죄

by 김민식pd 2019. 8. 16.

<꼬리에 꼬리를 무는 구독> 촬영을 위해 교보 문고에 갔을 때, 가장 먼저 고른 책입니다. 

<진이, 지니> (정유정 / 은행나무)

저는 작가에 대한 충성도가 높아요. 특히 <7년의 밤>처럼 재미난 소설을 쓴 작가의 경우, 신작이 나오면 찾아봅니다. 정유정 작가는 한국의 스티븐 킹입니다. 장르성이 강한 스릴러 소설을 쓰는데요, 이야기의 힘이 강합니다.

책에는 주인공 진이가 보노보를 만나는 장면이 나오는데요. 아기 보노보를 보는 건, 꼭 어린 아기를 보는 것 같네요. 민서는 늦둥이라 그런지 초등학교 6학년인데도, 아직 어리광을 부립니다. 늦둥이랑 노는 건 유인원과 노는 것 같아요. 지금도 침대를 보면 "링 위에 올라와 레슬링을 하자!"고 덤빕니다. 아이들이랑 힘을 쓰며 노는 걸 좋아해요. 민지의 경우, 부녀 서커스를 한다고 온갖 묘기를 연습하기도 했어요. 아이를 하늘에 던져올렸다 받거나, 목마를 태우고 도는 거죠. 아이들을 사랑하지만, 영원히 품 안에 자식으로 살 수는 없지요. 어느 순간, 서로에게서 독립이 필요합니다. 부모의 자식 사랑이 자칫 과잉보호가 되기 쉬운 이유는 무엇일까요? 


'역사학자인 유발 하라리의 말처럼, 뱀을 나뭇가지로 착각하는 것보다 나뭇가지를 뱀으로 착각하는 쪽이 더 안전할 테니까.'

(18쪽)


생존이 어려웠던 수렵채집 시절에 부모의 과잉보호가 무관심보다는 아이들의 생존에 유리했을 겁니다. 과잉보호하는 습성이 유전되기가 더 쉽지요. 그 시절에 비해 지금 세상은 더 안전하고요. 자원은 훨씬 풍부합니다. 자식을 과잉보호하려는 내 속 유인원의 본성으로부터 거리를 둘 필요가 있어요. 책에는 <나는 자연인이다>에 나올 것 같은 남자 주인공이 나옵니다. 사회로부터, 가족으로부터, 격리된 것 같은 사람이에요. 노숙자처럼 사는데요. 그에게는 이런 사연이 있어요.


'내게도 가족이 있었다. 화곡동 귀퉁이에 위치한 방 세 개짜리 낡은 빌라에서 다섯 식구가 복작대며 살았다. 아버지와 어머니, 여동생 민지, 남동생 은호, 장남인 나 김민주. 아버지는 나를 두고 '개처럼 놀고먹으며 부모 등골을 뽑는 자식'이라고 불렀다. 기분이 좋지 않을 땐 간략하게 한 단어로 줄여 부르기도 했다. 개자식이라고.

상스럽기는 하나 억울한 호칭은 아니었다. 자라는 동안, 나는 내 의지로 뭘 해본 적이 없었다. '이리 와' 하면 이리 오고, '저리 가' 하면 저리 갔다. 초, 중학교는 교육청에서 지정해준 대로, 고등학교는 중학교 성적표가 정해준 곳으로, 대학은 수능 점수에 맞춰 행정구역상으로만 '인 서울'인 대학에 들어갔다. 

내 의지로 돈을 벌어본 적도 없었다. (...)

대학을 졸업한 후부터는 인생이 시험으로 도배됐다. 아버지가 원하던 언론사를 시작으로, 어머니가 바라던 대기업, 양친이 차선책으로 합의한 공기업...... 줄줄이 떨어진 다음 21세기 최고의 인기 직업이라는 공무원 시험 준비에 돌입했다. 결과는 3년째 같았다. 아버지는 공부를 포기하라고 했다. 이유는 이랬다. 

"간장 종지에는 라면도 못 끓이는 법이다."

(36쪽).

인물 소개가 이렇게 흥미진진할 줄이야! 이건 딱 제 이야기거든요. 어려서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다 하고 살았어요. 아버지의 의지대로 학과를 선택하니 성적이 안 나오더군요. 당연하죠. 내 의지가 없는데... 아버지는 의대에 못 간 저를 항상 의지박약이라고 구박하셨지요. 그 시절, 자살을 생각하기도 했어요.


'인생에서 최악의 사건은 죽음이 아니었다. 살아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었다.'

(위의 책, 48쪽)


자살을 꿈꾸던 시절, 문득 생각해봤어요.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살다가, 불행하다고 죽으면, 아버지의 허수아비 하나가 죽은 거지, 김민식이 죽는 건 아니지 않을까? 아버지의 허수아비를 죽이면 되지, 굳이 나까지 죽을 필요가 있나?'

내 속에 있는 허수아비를 죽이는 건, 생각보다 간단하더군요. 그냥 아버지에게서 물리적으로 달아나는 거죠. 서울로 대학을 오면서, 아버지와 멀어지니 제 의지대로 인생을 살 수 있었어요. 연애를 하고, 가정을 꾸렸어요. 주말에는 아내와 함께 침대에서 책을 읽고요. 딸들과 함께 보노보처럼 뒹굴며 놀아요. 역시 인생의 행복은 자기주도, 자발성에서 옵니다.

<진이, 지니>를 읽는 걸 보고 아내가 물었어요. 

"이 책은 무섭지 않아?"

제가 예전에 <7년의 밤>을 추천해줬는데요. 그때는 읽다가 너무 무서워서 혼났다고 했거든요.   


정여울 작가님의 추천사를 보여줍니다. 

'이번에는 따스하고 다정하며 사랑이 넘치는 정유정이다. 놀라운 변화다. 뭉클하고, 그윽하고, 애잔해졌다. 그러나 정유정을 '작품'뿐 아니라 '인간'으로 알고 지낸 모든 사람들은 이런 정유정의 변신이 난데없는 일탈이 아니라 정유정의 '숨은 매력'임을 격하게 공감할 것이다.'

<진이, 지니>, 정유정 작가님의 새로운 매력을 발견할 수 있는 작품이고요. 이번 소설 역시 스토리텔러로서 작가의 공력이 유감없이 발휘됩니다. 다섯 권을 골랐는데, 가장 먼저 끝낸 건 역시 이 책이거든요. 뒤가 궁금해서 책을 놓을 수가 없더라는.

올 여름, 막바지 더위를 잊게해줄 책이라면 <진이, 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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