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짠돌이 독서 일기

어디로 달아나야 할까

by 김민식pd 2019. 8. 21.
저는 1992년에 첫 직장에 들어가 영업사원으로 일했습니다. 하루 8군데 정도 치과를 돌며 제품을 홍보했어요. 외근을 다닐 때, 제가 좋아하는 곳은 로터리입니다. 치과들이 몰려있거든요. 부산 연산 로터리에 가니 길목마다 치과가 있었어요. 치과 문을 열고 들어가 제품 소개하러 왔다고 하면 간호사분들의 반응은 둘 중 하나입니다. 원장님께 알려드리거나, 바쁘다고 내치거나. 그중 어느 한 치과는 갈 때마다 바쁘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하루는 제가 용기를 좀 더 내었습니다. 웃으면서 "그럼 저희 제품 잘 쓰고 계신지 점검만 해드릴게요."하고 진료실까지 들어갔는데요. 갑자기 50대 원장님이 고함을 지르며 욕을 했어요. 
"너 뭐하는 새끼야? 여기가 어디라고 함부로 들어와?"
의사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니 환자들이며 대기실에 앉아있는 아이들이 놀라 저를 쳐다봤어요. 당시 저는 스물 다섯, 사회초년생이었어요. 도망치듯 황급히 달아났어요. 그날은 외판 영업을 더 뛸 수 없을 것 같았어요. 근처 만화방에 가서 넥타이를 풀고 만화를 보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구석 자리에 앉아 만화를 보는 내내, 서럽고 눈물이 났습니다.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 (은유 지음 / 임진실 사진 / 돌베게)을 읽다 문득 그 시절이 생각났어요. 특성화고를 나와 공장에 취업한 동준이는 사내 괴롭힘을 당합니다. 2차에 강제로 끌려가고 술 안 먹는다고 혼나고 일 못한다고 쥐어터지고. 같이 맞았던 형은 입술이 터지기도 했고요. 결국 회사 인사과에 폭행 사실을 알리지만 너무 두렵습니다. 
'내일 난 제정신으로 회사를 다닐 수 있을까요?'라고 끙끙 고민하던 동준이는 결국 회사 기숙사 옥상에서 극단적 선택을 합니다. 동준군의 어머니는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어른들도 직장이 바뀌거나 일하던 분야가 바뀌면 처음 시작하는 거잖아요. 그렇게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을 배려하는 마음이 우리 사회에 너무 적어요. (...) 나이가 어려서만이 아니라 업무가 서툴러도 성격이 소심해도 조직에선 약자예요. 그런데도 그런 약한 사람을 배려하지 않고 눌러야만 유지되는 직장 내 분위기는 변해야 하지 않나 생각해요.'

(위의 책, 51쪽)  


이 책의 표지로 쓰인 사진은 동준 군의 수첩입니다. 표지에 'BE HAPPY' '행복하자'라고 씌어있어요...
 
제주도 생수공장에 현장 실습 나가 위험한 작업을 하다 목숨을 잃은 민호군의 사연도 참 가슴이 아픕니다. 아버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제가 느낀 게 뭐냐면요. 대한민국에 살면서 말 잘 들으면 죽는다는 거예요. 말 잘 들으면 회사에서 이용해먹고 최악의 업무만 시키니까 말 잘 들을 이유가 없어요. (...) 평소 민호한테는 착하게 살고 남 해코지하지 말고 맡은 일 열심히 하고 살아라, 그렇게 말했어요. 민호는 그렇게 커줬고요. 결론은 말 잘 들으니까 세상을 등지게 되는 거예요. (...)
특성화고 아이들에게 얘기해주고 싶어요. "회사 말이라고 다 옳고 어른 말이라고 다 정답이 아니다. 네 생각과 네 말이 정답이라고 생각하고 행동해라. 회사에서 생긴 어려움은 끙끙 앓지 말고 선생님과도 말하지 말고 가까운 민주노총 노무사를 찾아가라."'

(위의 책 137쪽, 143쪽)

일터에서 죽어가는 어린 아이들의 죽음을 다룬 책이라 읽는 내내 힘들었어요. 은유 작가님은 제 글쓰기 선생님이십니다. <글쓰기의 최전선> <쓰기의 말들>을 보며 글을 배웠어요. 이번에는 글쓰기가 아닌 다른 주제를 고르셨는데요. 어떻게 이렇게 힘든 주제를 골랐을까, 궁금했어요. 책을 읽고나니 알겠어요. 선생님은 말하지 못하는 슬픔에 귀기울이고 글로 옮기는 것을 글쓰는 이의 책무라고 여긴 것 같아요.

'지하철을 고치다가, 자동차를 만들다가, 뷔페 음식점에서 수프를 끓이다가, 콜센터에서 전화를 받다가, 생수를 포장 운반하다가, 햄을 만들다가, 승강기를 수리하다가...
그러니까 우리가 먹고 마시고 이용하는 모든 일상 영역에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의 흔적이 남아 있다. 흩어진 사고의 기록을 모아놓으면 공통의 문제점이 보인다. 사회초년생으로서 초반 적응 시스템이 없이 현장에 투입됐다는 것, 기본적인 노동 조건이 지켜지지 않았다는 것, 모두가 꺼려하는 일이 조직의 최약자인 그들에게 활당됐다는 것, 학교에서도 가정에서도 자신의 고통을 공적으로 문제 삼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는 것이다. 안전교육을 받기보다 '이런저런 거 조심하라'는 식으로 말 몇 마디를 듣고 바로 업무에 투입되었고 욕설과 명령 등 비인간적인 대우에 노출됐다. 노동에 단련되지 못한 서툰 몸으로 야근까지 감당했다. 학습도 실습도 아닌 중노동에 심신이 극도로 피폐해진 상태에서 그들은 사고를 당하거나 자기 구제로서 죽음을 택했다.'

(17쪽)

동준이는 공장 기숙사에서 살았어요. 직장에서 괴롭힘을 당해도 퇴근하고 집으로 달아날 수 있다면 회복의 시간이 있어요. 그런데 기숙사에서 사니 그 지옥같은 삶에서 달아날 길이 안 보였겠지요. 외판 영업을 뛰다 힘들 때, 만화방으로 달아나 숨을 고를 수 있었어요. 고교 시절 저는 집에서는 가정폭력, 학교에서는 학교 폭력에 시달렸는대요. 그래도 도서관에서 소설책을 읽으며 버틸 수 있었어요. 괴로울 땐 달아날 곳이 필요해요.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청소년 노동 인권을 배려하는 사회적 분위기입니다. 청소년 문제도 어렵고, 노동 문제로 어렵고, 인권 문제도 어려운데요. 그 셋이 합쳐지니 더 어려운 문제지요. 이걸 해결하기 위해 어른들이 노력해야 할 것 같아요. 청소년 노동 인권 교육이 필요합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구독>에서 이 책을 소개했는데요. 책 속에 나오는 사람들의 말을 차분하게 전한다는 각오로 읽기만 했습니다. 그래도 너무 힘들었던 경험이에요. 하지만 이 분들의 목소리를 전해야 한다는 생각에 소리 내어 읽었습니다. 더 많은 분이 책에 나오는 이야기에 귀기울여 주시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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