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짠돌이 독서 일기

두 번째 만나는 김초엽

by 김민식pd 2019. 8. 23.
김초엽 작가를 만나는 건 두번째입니다. 예전에 제2회 한국과학문학상수상작품집에 실린 대상작 <관내분실>로 데뷔작을 만났는데요. 
이번에는 김초엽 작가의 작품집이 나왔네요.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첫번째 수록작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는 유전자 개량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먼 미래, 인간 배아 디자인을 통해 모든 사람이 완벽한 상태로 태어난다면 어떤 세상이 만들어질까, 에 대한 사유 실험이지요. SF 소설은 항상 가능성을 열어놓고 하는 각종 사고 실험같아요. 

'그녀는 얼굴에 흉측한 얼룩을 가지고 태어나도, 질병이 있어도, 팔 하나가 없어도 불행하지 않은 세계를 찾아내고 싶었을 것이다. 바로 그런 세계를 나에게, 그녀 자신의 분신에게 주고 싶었을 것이다. 아름답고 뛰어난 지성을 가진 신인류가 아니라, 서로를 밟고 그 위에 서지 않는 신인류를 만들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 아이들로만 구성된 세계를 만들고 싶었을 것이다'

(48쪽)


다섯 살에 턱에 커다란 화상 흉터가 생긴 후, 사춘기를 결핍 속에 살았어요. 저의 결핍 (외모, 사회성, 이성 교제)을 채워준 게 독서지요. 책읽기를 통해 하루하루 살아가는 재미와 의미를 찾았습니다. 모든 사람이 완벽한 외모를 가지고 태어나는 세상이라... SF가 그리는 이상향은 때로는 디스토피아이기도 합니다. 낙원은 어디에 있을까요? 서로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존중해주는 곳이 바로 낙원입니다. 사람에게 단점은 없어요. 각자의 개성이 있을 뿐이지.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을 작년에 읽었을 때, 저는 이 이야기가 시간여행의 역설에 대한 작품이라 생각했어요. 누군가 우주로 시간여행을 떠날 때, 지구에 남는 사람과 시간의 흐름이 달라집니다. 영화 <인터스텔라>를 보면, 지구에 남은 딸과 우주로 떠난 아버지의 시간이 어긋나면서 서로 생이별을 하게 됩니다. 책 속에 나오는 과학자는 남편과 아들 내외가 외계 행성으로 이주할 때, 연구를 마무리한 후, 합류하기로 하는데요. 그 사이에 새로운 우주 항법 기술이 나오고, 먼 외계 행성으로 가는 길이 끊깁니다. 외계로 간 남편과 지구에 남은 주인공의 시간이 틀어져버린 거죠. 지구에 홀로 남은 과학자에게 와서 사람들이 위로를 합니다.

'그래도 당신들은 같은 우주 안에 있는 것이라고. 그 사실을 위안 삼으라고. 하지만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조차 없다면, 같은 우주라는 개념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181쪽)

소설의 주인공은 어느 순간, 선택의 기로에 섭니다. 가족을 만나기 위해 연구를 포기할 것인가, 연구를 마무리하기 위해 가족과 이별할 것인가. 평생을 바쳐온 연구를 쉽게 포기할 수는 없지요. 문득 저는 이 소설이 과학자로서 살아온 김초엽 작가가 선배들을 보며 품어온 고민이 아닐까 생각했어요. 여성 과학자들은 선택의 기로에 섭니다. 과학자로서 연구를 계속 하려면, 결혼과 출산, 육아는 포기해야 할 지도 몰라. 출산과 육아를 하는 순간, 과학자로 성과를 내기는 어려울 지 몰라. 양자역학보다 어려운 양자택일의 딜레마... 일하는 엄마들에게 주어지는 육아 부담을 덜어주지 못한다면 더 큰 딜레마가 우리를 찾아오겠지요.

같은 소설을 두 번 읽다보니, 다른 점이 보입니다. 처음 읽을 때는 SF 소설로 읽었는데요. 두 번째 읽다보니 결혼과 육아에 대한 젊은 과학자의 고민이 담긴 우화로 느껴지네요. 이건 독자로서 저만의 착각일 수 있어요. 사랑은 오해에서 시작하고요. 독서의 즐거움 역시 혼자만의 오해에서 찾아옵니다.

20대에 저는 날라리 딴따라였어요. 나이트클럽에서 춤을 추고, 혼자 배낭여행을 즐겼지요. 평생 혼자 즐겁게 사는 게 꿈이었어요. 조직 생활을 벗어나려고 프리랜서의 길을 선택했고, 가장의 무게를 벗어나려고 독신주의자로 살고 싶었어요. 그러다 아내를 만나 사랑에 빠지는 바람에 결혼을 하고 20년째 살고 있어요. 마흔에 늦둥이를 낳아 중년의 나이에도 육아를 하게 되었고요.

어렸을 때 저는 그런 고민을 했어요. 가족을 이루는 순간, 나라는 개인의 특수성은 사라지지 않을까. 비슷한 고민을 하는 분들께, 책에서 찾은 글귀 하나를 올립니다.


'우리는 그곳에서 괴로울 거야.

하지만 그보다 많이 행복할 거야.'

(위의 책 54쪽)


서로 개성이 다른 두 사람이 만나 함께 살며 아이를 기른다는 건 분명 괴로움을 동반하는 일입니다. 하지만 그 속에도 소소한 행복은 있어요.

요즘 넷플릭스에 올라온 SF 시리즈, <블랙 미러>가 화제인데요. 한국판 <블랙 미러>를 꿈꾸는 드라마 제작자라면, 김초엽 작가를 주목하라고 하고 싶어요. 

'누가 한국 SF가 가는 길을 묻는다면, 눈 들어 김초엽을 보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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