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1992년에 첫 직장에 들어가 영업사원으로 일했습니다. 하루 8군데 정도 치과를 돌며 제품을 홍보했어요. 외근을 다닐 때, 제가 좋아하는 곳은 로터리입니다. 치과들이 몰려있거든요. 부산 연산 로터리에 가니 길목마다 치과가 있었어요. 치과 문을 열고 들어가 제품 소개하러 왔다고 하면 간호사분들의 반응은 둘 중 하나입니다. 원장님께 알려드리거나, 바쁘다고 내치거나. 그중 어느 한 치과는 갈 때마다 바쁘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하루는 제가 용기를 좀 더 내었습니다. 웃으면서 "그럼 저희 제품 잘 쓰고 계신지 점검만 해드릴게요."하고 진료실까지 들어갔는데요. 갑자기 50대 원장님이 고함을 지르며 욕을 했어요. 
"너 뭐하는 새끼야? 여기가 어디라고 함부로 들어와?"
의사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니 환자들이며 대기실에 앉아있는 아이들이 놀라 저를 쳐다봤어요. 당시 저는 스물 다섯, 사회초년생이었어요. 도망치듯 황급히 달아났어요. 그날은 외판 영업을 더 뛸 수 없을 것 같았어요. 근처 만화방에 가서 넥타이를 풀고 만화를 보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구석 자리에 앉아 만화를 보는 내내, 서럽고 눈물이 났습니다.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 (은유 지음 / 임진실 사진 / 돌베게)을 읽다 문득 그 시절이 생각났어요. 특성화고를 나와 공장에 취업한 동준이는 사내 괴롭힘을 당합니다. 2차에 강제로 끌려가고 술 안 먹는다고 혼나고 일 못한다고 쥐어터지고. 같이 맞았던 형은 입술이 터지기도 했고요. 결국 회사 인사과에 폭행 사실을 알리지만 너무 두렵습니다. 
'내일 난 제정신으로 회사를 다닐 수 있을까요?'라고 끙끙 고민하던 동준이는 결국 회사 기숙사 옥상에서 극단적 선택을 합니다. 동준군의 어머니는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어른들도 직장이 바뀌거나 일하던 분야가 바뀌면 처음 시작하는 거잖아요. 그렇게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을 배려하는 마음이 우리 사회에 너무 적어요. (...) 나이가 어려서만이 아니라 업무가 서툴러도 성격이 소심해도 조직에선 약자예요. 그런데도 그런 약한 사람을 배려하지 않고 눌러야만 유지되는 직장 내 분위기는 변해야 하지 않나 생각해요.'

(위의 책, 51쪽)  


이 책의 표지로 쓰인 사진은 동준 군의 수첩입니다. 표지에 'BE HAPPY' '행복하자'라고 씌어있어요...
 
제주도 생수공장에 현장 실습 나가 위험한 작업을 하다 목숨을 잃은 민호군의 사연도 참 가슴이 아픕니다. 아버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제가 느낀 게 뭐냐면요. 대한민국에 살면서 말 잘 들으면 죽는다는 거예요. 말 잘 들으면 회사에서 이용해먹고 최악의 업무만 시키니까 말 잘 들을 이유가 없어요. (...) 평소 민호한테는 착하게 살고 남 해코지하지 말고 맡은 일 열심히 하고 살아라, 그렇게 말했어요. 민호는 그렇게 커줬고요. 결론은 말 잘 들으니까 세상을 등지게 되는 거예요. (...)
특성화고 아이들에게 얘기해주고 싶어요. "회사 말이라고 다 옳고 어른 말이라고 다 정답이 아니다. 네 생각과 네 말이 정답이라고 생각하고 행동해라. 회사에서 생긴 어려움은 끙끙 앓지 말고 선생님과도 말하지 말고 가까운 민주노총 노무사를 찾아가라."'

(위의 책 137쪽, 143쪽)

일터에서 죽어가는 어린 아이들의 죽음을 다룬 책이라 읽는 내내 힘들었어요. 은유 작가님은 제 글쓰기 선생님이십니다. <글쓰기의 최전선> <쓰기의 말들>을 보며 글을 배웠어요. 이번에는 글쓰기가 아닌 다른 주제를 고르셨는데요. 어떻게 이렇게 힘든 주제를 골랐을까, 궁금했어요. 책을 읽고나니 알겠어요. 선생님은 말하지 못하는 슬픔에 귀기울이고 글로 옮기는 것을 글쓰는 이의 책무라고 여긴 것 같아요.

'지하철을 고치다가, 자동차를 만들다가, 뷔페 음식점에서 수프를 끓이다가, 콜센터에서 전화를 받다가, 생수를 포장 운반하다가, 햄을 만들다가, 승강기를 수리하다가...
그러니까 우리가 먹고 마시고 이용하는 모든 일상 영역에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의 흔적이 남아 있다. 흩어진 사고의 기록을 모아놓으면 공통의 문제점이 보인다. 사회초년생으로서 초반 적응 시스템이 없이 현장에 투입됐다는 것, 기본적인 노동 조건이 지켜지지 않았다는 것, 모두가 꺼려하는 일이 조직의 최약자인 그들에게 활당됐다는 것, 학교에서도 가정에서도 자신의 고통을 공적으로 문제 삼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는 것이다. 안전교육을 받기보다 '이런저런 거 조심하라'는 식으로 말 몇 마디를 듣고 바로 업무에 투입되었고 욕설과 명령 등 비인간적인 대우에 노출됐다. 노동에 단련되지 못한 서툰 몸으로 야근까지 감당했다. 학습도 실습도 아닌 중노동에 심신이 극도로 피폐해진 상태에서 그들은 사고를 당하거나 자기 구제로서 죽음을 택했다.'

(17쪽)

동준이는 공장 기숙사에서 살았어요. 직장에서 괴롭힘을 당해도 퇴근하고 집으로 달아날 수 있다면 회복의 시간이 있어요. 그런데 기숙사에서 사니 그 지옥같은 삶에서 달아날 길이 안 보였겠지요. 외판 영업을 뛰다 힘들 때, 만화방으로 달아나 숨을 고를 수 있었어요. 고교 시절 저는 집에서는 가정폭력, 학교에서는 학교 폭력에 시달렸는대요. 그래도 도서관에서 소설책을 읽으며 버틸 수 있었어요. 괴로울 땐 달아날 곳이 필요해요.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청소년 노동 인권을 배려하는 사회적 분위기입니다. 청소년 문제도 어렵고, 노동 문제로 어렵고, 인권 문제도 어려운데요. 그 셋이 합쳐지니 더 어려운 문제지요. 이걸 해결하기 위해 어른들이 노력해야 할 것 같아요. 청소년 노동 인권 교육이 필요합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구독>에서 이 책을 소개했는데요. 책 속에 나오는 사람들의 말을 차분하게 전한다는 각오로 읽기만 했습니다. 그래도 너무 힘들었던 경험이에요. 하지만 이 분들의 목소리를 전해야 한다는 생각에 소리 내어 읽었습니다. 더 많은 분이 책에 나오는 이야기에 귀기울여 주시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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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민식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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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아리아리짱 2019.08.21 06:5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김민식 PD님 아리아리!

    오늘 아침은 힘내라는 구호 '아리아리'로
    인사말 전하기도 쉽지 않을 정도로 마음이 무겁습니다.

    사회의 가장 약자인 초년병, 고등 실습생들의 자기구제로 죽음을
    택하는 이 사회를 직면해야 된다는 것이 마음이 아려옵니다.

    어른으로서 한 없이 부끄러워 집니다.

    공부가 적성에 맞지 않고, 기술 배워서 취업을 하길 원하는
    학생이 있었어요. 특성화 고등학교 졸업 후 취업을 했다가
    상상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나 비 인간적인 현장의대우에
    이 학생이 결국은 그렇게 싫어하던 공부를 다시 해서
    대학 진학을 하더군요.

    우리 사회는 강자에 약하고, 약자에 강한 모습들이 너무나
    흔하고 익숙합니다. 어른들 제발 자각들 해야 됩니다.

    '말하지 못하는 슬픔에 귀 기울이고 글로 옮기는 것은
    글쓰는 이의 책무다.' 은유 작가님의 말 가슴에 새깁니다.

    말하지 못하는 , 말 할 수 없는 약자에 대한 배려
    우리 모두의 책무입니다.

  2. 섭섭이짱 2019.08.21 07:0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녕하세요.

    영상도 보고 글도 읽으니 마음이 너무 아프네요
    어른들도 직장에서 괴롭힘 당하면 많이 힘든데...
    사회가 뭔지 모르는 아이들은 어떠했을지..

    <팩트폴리스> 내용처럼 정말 우리가 잘 사는게 맞는건가요?
    어떤 의미에서 잘 사는건지... 다시 생각해보게 됩니다.

    어른으로써 정말 제대로된 사회를 만들지
    못한거 같아 너무 부끄럽고 제 자신부터 반성하게 됩니다.

    달아날 필요도 없고.. 죽음을 생각하지 않아도 되고..
    자신의 얘기를 들어주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청소년 노동 인권' 에 대해
    미쳐 생각하지 못했는데
    이 부분도 마음에 새기도록 하겠습니다.

    여러가지 생각이 드는 아침입니다.

  3. 오달자 2019.08.21 08:4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은유 작가님의 강연을 직접 듣고 나서야 비로소 저 또한 사회적 약자에게 귀기울이지 못하고 살았구나....라는 자책이 들더군요.
    그 어떤 누구도 한 사람을 괴롭혀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일상을 번복하는 이유중에 하나가...타성에 젖어 살기 때문이죠.

    저 또한 사회 초년생때 직장 상사분과 고성을 지르며 대들다가 첫직장을 박차고 나온 아픈 기억이 있네요.
    지나고보니 저는 나름 목소리를 냈더라구요....

    어린 학생들이 사회에 첫 발을 내딛을때 우리는 좀 더 섬세하게 이끌어가야합니다.
    나이 어리다고 해서 반만하면 안되구요.모르는건 친절하게 설명해주어야합니다.
    이는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으로 지켜야할 도리겠죠.

    말하지 못하는 이들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사회 분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4. 꿈트리숲 2019.08.21 08:4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책을 읽어보지 못했는데, 그저께
    은유 작가님 강의를 들으면서 마음이
    많이 무거웠어요. 오늘 김민식 작가님께서
    읽어주시는 책 내용을 들으니 무거움을
    넘어서 슬픕니다.
    약자를 보호하지 않는 현실이 슬프고,
    그런 현실에 나만 아니면 된다는 생각으로
    회피하려 했던 제가 보여서 슬픕니다.

    과연 우리 아이가 살아가는 세상은 나아질 수
    있을까요? 변화는 아래로부터 시작되나요,
    아님 위에서부터 시작될까요? 양쪽에서 같이
    시작되어 빠른 시간에 만나면 좋겠다 싶어요.

    은유 작가님이 그러셨죠. 폭력을 없애는 방법은
    폭력을 계속 얘기하는 수 밖에 없다고요.
    힘들지만 약자는 계속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하나가 둘이 되고, 열이 되고 백이 되면 변화의
    속도가 좀 더 빨라지지 않을까요?
    작가가 글로 사회 문제를 써야하는 의무가 있다면
    대한민국 국민인 우리는 부당함과 불합리에
    눈감지 말아야 할 의무가 있다 생각이 듭니다.
    청소년, 노동, 인권... 남 얘기가 아니라 셋 중에
    하나는 우리의 얘기일테니까요.

  5. 혜혜심심 2019.08.21 10:4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청소년 노동 인권교육'

    이제막 사회로 첫발을 내딛는 우리의 아이들에게 정말 필요한 교육인데 이런 교육은 어디에서도 들어보지 못한 것 같네요.

    우리의 많은 아이들이 첫알바를 시작으로 사회를 경험하게 되지만, 기본적 노동 조건이 무엇인지를 알고 시작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봅니다.

    특성화고 학생들에게는 취업 전 당연히 상당기간은 이러한 교육이 필수화 되어야 하고, 수능을 마친 학생들 또한 수능 후 넘쳐나는 시간들을 그냥 버릴 것이 아니라 이러한 교육들로 사회에 나갈 준비를 해주면 좋겠다 생각합니다.

    얼마전 '대구 이월드 알바생의 다리절단'기사를 보고도 가슴이 너무 아팠습니다.
    그도 제대 후 알바를 시작했고, 초반 적응 시스템 없이 현장에 투입되었겠지요.
    몸과 마음의 상처를 잘 견디고 사회에 우뚝 서기를 응원하면서 져려오는 가슴을 어쩔 수 없더라구요.

    도대체 우리의 아이들은 어디서 보호를 받아야하는지....

    '힘들면 달아날 곳이 필요하다.'
    50에 이른 저도 때론 필요한 공간입니다.

    우리의 아이들이 더는 아프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6. 아리랑도경 2019.08.21 11:2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용마 기자님의 별세에 맘이 허전하고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 들어와보았어요

  7. 이순간 2019.08.21 11:4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인터넷기사보고 바로 pd님 블로그가 떠올랐습니다.
    오랫만의 방문이지만 오늘은 pd님 글을 읽을 수가 없네요.

    날마다 이용마 기자님의 근황이 궁금했지만 알 도리도 없었고, 무소식이 희소식이란 문구로 위안하며 지내고 있었는데요…

    노대통령님 서거하시고 연일 언론에서 주목 받던 정치인들과 달리, 조용히 뇌종양으로 투병하시던 강금원 회장님 근황이 늘 궁금하던 몇 해 전이 떠오르던 날들이었는데요…

    오늘은 이용마 기자님을 힘들게 했던 무리들에 대한 분노가 다시 마음 속에 횃불을 들게 합니다.

    기자님 이제 몸도 마음도 고통 없을 그 곳에서 정말 편히 쉬시길 바랍니다. 건강하실 때 마이크 잡으시던 모습과 목소리, MBC 복직하실 때 마른 얼굴에 번지던 환한 그 웃음이 떠오릅니다.

    이 자리를 빌어서 MBC가 더욱 올바르게 자리 잡기를 바라고, 김민식pd님께서 너무 슬퍼지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슬픔은 늘 남은 자들의 몫이지요. 하지만 살다 보니, 또 나이가 들다 보니 누군가의 죽음 앞에서는 내가 마냥 슬퍼하기 보다는, 오히려 더 힘내서 살게 하는 아름다운 분들이 있는 것 같아요. 이용마 기자님이 그 중 한 분이시겠죠. 그래서 기자님과 더 가까이 삶을 나누었던 가족분들, 지인분들이 먼저 힘내시길 간절히 바래봅니다.

    그리고 아름다운 삶을 보여주고 떠나시는 이용마 기자님 당신의 삶에 감사를 표합니다. 고맙습니다.

    --슬픈 소식을 접하고, 놀란 마음을 진정하지 못해서, 썼다 지웠다, 여러 차례 글을 날리고 여러 번 다시 쓴 두서없는 글 올리기 부끄럽고, 이 자리가 맞는지도 모르겠지만 이렇게라도 이용마 기자님의 부고에 조의를 표하고 싶었습니다.

  8. 아프리칸바이올렛 2019.08.21 12:0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용마 기자님의 안타깝고 슬픈 죽음을
    듣습니다
    사회 정의와 사회적 약자들을 대변하려
    하셨던 우리 사회 행동하는 양심이셨죠
    나의 꿈을 기억하기 바란다는
    아들에게 주셨던 편지
    누구도 공동체를 떠나 살 수 없고
    그 공동체를 아름답게 만드는 것
    그 꿈이 이뤄질 때 나의 삶도 의미있었다는
    기자님의 유지를 저도 가슴 깊이 기억
    하겠습니다
    저 역시 사회적 약자에 관심을 갖고
    적어도 부끄럽지않은 어른이
    되려고 노력하겠습니다
    우리의 아이들을 죽음의 현장으로
    몰지않도록 함께 사회의 부조리를
    감시하는 눈이 되겠습니다


    인생의 동지였고 친구를 잃은 PD님의
    깊은 슬픔이 짐작도 안됩니다

  9. 옥이님 2019.08.21 14:0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늘은 맘이 아주많이 아프네요

    그치만 이렇게 함께할수있는 분들이 있으니 나또한 작은것에서부터 배려하고 귀기울수있는 어른으로 살아보기위해 오늘도 애쓰겠습니다




  10. 보리랑 2019.08.21 20:3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피디님도 안아드립니다...

  11. 솔기 2019.08.21 22:3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도.. 이용마기자님 부고를 듣고 들어왔어요. 많은 분들이 제 맘과 같으시네요. 부디 고인의 명복을 빌겠습니다.

  12. 디노 2019.08.22 09:5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고향동네인 연산로타리를 보고 반가웠으나 조금은 무거워지네요.
    이용마 기자님의 소식도 그렇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