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짠돌이 독서 일기

그림책 읽는 시간

by 김민식pd 2019. 8. 7.

두 달 동안 드라마 심사를 했어요. 처음엔 '서울 드라마 어워즈' 예선 심사였어요. 전세계에서 출품한 120여편의 미니시리즈 드라마를 보면서 본선에 올라갈 작품을 추렸지요. 터키나 싱가포르, 남아공에서 올라온 드라마를 영어 자막을 보며 심사해야 했어요. 북유럽의 잔혹한 스릴러물을 볼 때는 쏘고, 찌르고, 때리는 장면을 이어 보는 게 너무 괴롭더군요. 심사를 마친 날, 만세를 불렀어요. '이제 넷플릭스에 가서 내가 좋아하는 로맨틱 코미디를 실컷 봐야지!' 그런데 회사에서 또 불렀어요. 이번에는 MBC 드라마 극본 공모 심사를 하라고요. 신인 작가들의 대본을 읽었는데요. 극성이 강한 드라마도 많아요. 속이고 울리고 죽이는 장면이 이어집니다. 드라마 속 인생은 너무 극적이라 저처럼 몰입해서 극본을 읽는 사람은 감정 소모가 심합니다. 이럴 때는 그림책을 읽으며 조금 쉬어가고 싶어요. 그래서 찾아본 책입니다.

<100 인생 그림책> (하이케 팔러 글 / 발레리오 비달리 그림 / 김서정 옮김 / 사계절)

'0세에서 100새까지 100장면으로 보는 인생의 맛'인데요. 책장을 넘길 때마다 한참 그림을 들여다보며 '나는 저 나이 때 어땠지?'하고 과거를 추억해봅니다.  



19라고 적힌 그림에는 이런 글이 있어요. 

'가끔은 네 자신이 싫어지기도 할 테고. 

사람도 완전히 변할 수 있을까?'


손바닥에 앉은 나비 그림. 이 그림을 한참동안 멍하니 들여다봤어요. 아, 이 작가는 어쩜 이렇게 사람의 속을 잘 들여다볼까? 열아홉 살에 내가 딱 그랬거든요. 어린 시절에는 왕따로 살았는데, 대학에 올라와서도 사람들에게 인기가 없었어요. 미팅 나가서 차일 때마다 꼭 내가 벌레가 된 기분이었어요. 사람들이 징그러워하는 벌레. 이런 나도 언젠가 나비가 될 수 있을까?

어린 시절 내가 겪은 폭력의 상처. 가정 폭력과 학교 폭력의 상처를 지울 수 있을까?

솔직히 말하면요. 나이 마흔이 넘어서도, 어른이 되어서도, 여전히 삶은 힘들 때가 있어요. 우리는 상처를 주고 받으며 살 수 밖에 없는 존재인가봐요. 어른이 되어서도 상처를 받기도 하고, 또 때로는 내가 상처를 주는 사람도 있어요. 가장 가까운 가족에게 상처를 줄 때도 있고, 나를 믿는 이에게 실망스런 행동을 할 때도 있지요. 슬프지만 그게 인생인가 봐요.


45세의 그림에는 이런 말이 적혀 있어요. 

'지금 그대로의 네 모습을 좋아하니?'

어려서부터 비주얼이 좋았던 적이 없었는데, 나이가 들어가니 비주얼은 심지어 더 나빠지더군요. 마흔이 넘자 배도 나오고, 주름도 늘고, 머리는 새고 빠지기 시작했어요. 더 젊어질 수는 없는 거죠. 지금이 그나마 남은 인생에서 가장 젊은 때인거죠. 그래서 어차피 포기한 외모, 받아들이기로 했어요. 마흔 다섯 즈음일 겁니다. 제가 머리 염색 대신 그냥 흰 머리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게.

100 인생 그림책을 읽다, 그래서 지금 내 나이는 어떻게 묘사하고 있을까 궁금했어요. 

52

이루지 못한 꿈도 많지만... 

53
괜찮아. 작은 것에도 행복할 수 있다는 걸 배웠으니까.


어려서 가졌던 꿈 가운데 이루지 못한 것도 많아요. 생각도 못한 불행이 찾아오기도 하고요. 괜찮아요. 큰 불행을 상쇄하는 건 그만큼 큰 행복이 아니더라고요. 작은 행복에 감사할 수 있다면, 삶은 그다지 나쁘지는 않더라고요.

조금 은은한 삶의 향기를 맡고 싶은 분들께, 권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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