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브이'라는 미국 드라마가 유행한 적이 있다. 학교에 가면 온통 다이아나가 쥐잡아 먹는 이야기만 하는데 난 본 적이 없었다. 엄한 아버지 때문에 TV를 볼 수가 없었다. 어느날은 묘책을 생각해냈다. 당시 라디오에서 TV 전파가 잡혀 소리는 들을 수 있었다. 그래서 라디오를 들고 옥상에 올라가 옆집 거실에 틀어놓은 TV를 훔쳐봤다. 드라마 피디의 길은 그렇게나 험난했다.

 

어려서부터 집안에 나만의 극장을 꾸미는 게 소원이었다. 그래서 어른이 되고 한동안 홈시어터 꾸미기에 빠졌다. 프로젝터를 사서 집에다 설치했는데, 거실이 좁아 영사 거리가 나오지 않았다. 게다가 짠돌이답게 저렴한 보급형 프로젝터를 샀더니 팬 소음이 심해서 조용한 장면을 볼 때는 소리가 너무 거슬렸다. 그래서 어느날 묘안을 생각해냈다. '거실 벽에다 구멍을 뚫자!' 안방과 거실 사이 벽에다 구멍을 내고 안방에다 프로젝터를 설치해 거실 벽으로 쏘면 투사거리가 길어져서 대화면을 구현할 수 있다! 심지어 안방을 영사실로 활용하고 유리로 막아버리니까 팬 소음까지 차단할 수 있다. 이거 일거양득이네! 앗싸! 신이 나서 아내에게 그 계획을 말했다가 맞아죽을 뻔 했다. "영화 보려고 벽에다 구멍을 뚫겠다고?" 드라마 피디가 영상 감각을 키우기란 이렇게나 어렵다.

 

어떻게 하면 완벽한 홈시어터를 구현할 수 있을까? 늘 노심초사중인데, 얼마전 동네에 예술영화전용관이 개관했다. 메가박스 이수 12층에 자리잡은 '아트나인'. 와우, 아담한 사이즈의 소규모 극장인데 딱 내 스타일이다. 집에 홈시어터를 꾸미려던 계획은 이제 내던지고 이 곳을 내 전용 극장 삼아 열심히 드나들어야겠다. 내가 사랑하는 아트하우스 모모(이화여대 ECC내 소재)에서는 좋은 영화를 참 많이 하는데, 혼자 밤늦게 영화보러 다니다보면 여대생들 눈치가 보인다. 중년의 덕후를 자처하는 드라마 피디가 영상문법을 공부하기란 참 만만치가 않구나. 그런데 아트나인은 아트하우스 모모에서 하는 모든 영화를 한다. '아무르' '타인의 삶' '더 헌트' 등등. 앗싸! 

 

 

 

 

대중문화로 밥먹고 사는 내게 가장 중요한 가치는 문화의 다양성이다. 다양한 영화를 접할 수 있어야 시장의 규모가 커지고 오래 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예술영화 전용관의 기능이다. 예전에 예술영화 전용관 하이퍼텍 나다가 없어질 때 '지켜주지 못해 미안해!'를 외친 적이 있다. (관련 포스팅: 2011/07/18 - [공짜 PD 스쿨] - 너 자신에게 문화적 다양성을 허하라! )

이제 우리 동네에 예술영화 전용관이 생겼으니, 이 곳 만큼은 내집 홈시어터 애용하듯 뻔질나게 드나들어 이 멋진 공간을 꼭 지키고 싶다. 주위에도 널리 알려주시길, 4호선, 7호선 환승역 이수역 7번출구에 자리잡은 아트나인 시어터!

 

(극장 개관 행사로 신지혜 아나운서가 진행하는 '더 헌트' GV가 열렸는데, 갔다가 영화를 본 소감을 이야기하면 선물을 준다기에 냅다 일번으로 손 들고 말한 덕에 책 한 권 받았다. 만원 내고 영화보러 가서 만원 짜리 책이 한 권 생겼으니, 영화는 공짜로 즐긴건가? 역시 짠돌이에게는 수호신이 있는게 분명해! ㅋㅋㅋ)     

 

'더 헌트'

상품에 눈이 멀어 감상평을 말하겠다고 마이크를 잡고도 한동안 횡설수설했다. 솔직히 영화가 끝난 후에도 가슴이 먹먹해서 뭐라 말을 꺼내기 힘들었다. 그런 영화다.

 

인생을 살다보면 누구에게나 불행이 닥쳐온다.

인간의 증명은 그 불행에 어떻게 대처하는가, 스스로에게 입증하는 것이다.

 

보기에 불편한 영화일 수도 있다. 하지만 삶의 의미와 불행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에 대해 고민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거라 생각하여 꼭 한번 권해드리고 싶다.

 

Posted by 김민식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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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메이드인해븐 2013.01.28 10: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동네에 예술영화관이라니...@-@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격이군요 ㅋ 축하드려요~
    이런 영화관이 더 많이 생겼으면 좋겠네요~^^

  2. 송씨네 2013.01.28 20:2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 저는 그날 저 자리에 있었는데 질문 열심히 하신 분이 김민식 PD님이셨군요.
    아무도 못알아봤다는게 안타깝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