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든 일이 생길 때, 나는 속으로 '앗싸!'를 외친다. '사치할 껀수를 찾았구나~^^' 나는 평소 짠돌이로 사는 삶이 몸에 배어있다. 그래서 술 담배 커피도 하지 않고 산다. 사람들과 점심 먹고 커피숍에 들르면 나는 카운터에서 컵을 하나 얻어 물 한 잔 떠다놓고 버티는 궁상을 떤다. 그런 나도 가끔 사치를 부릴 때가 있다.

 

지난 주, 교육 발령이 났다. 물론 드라마국 복귀 발령이 나리라고 기대한 건 아니다. 나도 염치가 있지, 다른 MBC 동료들 백여명이 현업으로 복귀 못한 상황에서 어찌 나만 돌아가기를 바라겠는가. 그래도 드라마 연출을 앞으로도 한동안 못한다고 생각하니 우울했다. 난 이렇게 꿀꿀할 때 스스로에게 짠돌이답지않은 사치를 허락한다.

 

집에서 나는 IPTV를 본다. 본방을 놓친 드라마 모니터링을 위해 신청한 서비스다. 하지만 절대 유료 콘텐츠는 보지 않는다. 공중파 드라마도 반드시 1주일 홀드백 기간을 기다렸다가 무료로 풀린 다음에만 본다. (이런 짠돌이 습성 때문에 동료가 만든 드라마 첫 방을 보고 바로 다음날 '대박이던데! 잘 만들었어!'라는 문자도 제대로 못 날린다. 무료 시청을 고집하다보니 늘 뒷북이다.)

 

지난주 교육 발령이 난 걸 보고 집으로 달려와 바로... 캐치온 디맨드를 신청했다! 무려 월정액 1만원의 거금을 들인 사치다. 결제 버튼을 누르는 손가락이 떨려 리모컨을 누르기 힘들 정도였다. 그렇지만, 나는 힘든 일이 생기면 언제나 스스로에게 선물을 쾌척한다. "옛다, 받아라!"

 

IPTV를 보면 영화 예고 채널이 많다. 살포시 리모컨만 누르면 극장 동시 개봉 중인 영화를 집 소파에서 편안히 앉아 즐길 수 있다. 그런 유료 콘텐츠의 유혹을 견디느라 힘들었지만, 이번에 제대로 질렀다. 캐치온과 캐치온 플러스, 그리고 수백편의 영화를 언제든지 집에서 볼 수 있다. 1만원 결제한 후, 그동안 보고 싶었던 영화를 시청하기 시작했다. 물론 못 본 영화도 있지만, 대부분 극장에서 본 영화들의 다시보기다.

 

드라마 피디로서 평소 나를 단련하는 작업이 본 영화를 또 보는 것이다. 이건 영상 제작을 공부하는 후배들에게도 권하는 일인데, 처음 영화를 볼 때는 스토리 쫓아가느라 감독의 의도를 알아차리기 어렵다. 영화는 항상 극장에서 본다. 그러면 2시간 동안 사방이 컴컴한 가운데 시선은 정면에 고정된 상태로 있게 된다. 무조건 관객은 그 시간 동안 감독이 짜놓은 세계에 걸려들게 되어있다.

 

그렇게 극장에서 집중하고 보며 재미있었던 영화는 꼭 집에서 디비디나 다운로드로 다시 본다. 영화를 다시보면 감독의 의도가 보인다. 주인공에 감정이입을 시키기 위해 감독이 어떻게 앵글을 연출했는지 알 수 있다.

 

그렇게 다시 본 영화가 '크로니클'이다. 작년에 포스팅을 올린 적이 있지만 27세의 신예 감독이 만든 정말 대단한 영화다. '파운드 푸티지 found footage' 즉, 연출한 영상이 아니라 아마추어 비디오 영상을 모아 만든 것 같은 약간 다큐적인 영화인데 볼수록 놀랍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해 냈는지. 처음 볼 때는 혀를 내두르며 몰입해서 보다, 이번에 집에서 다시보니 좀 거리를 두고 공부할 수 있게 되었다. 카메라를 들고다니는 주인공의 얼굴이 언제 처음 화면에 나타나는지, 그리고 마지막 대결 부분에서 두 사람의 표정을 살리기 위해 수많은 폰카나 비디오 카메라를 소환하는 방식은 무엇이었는지, 등등...

 

 

(Boys will be boys.  저 카피 참 마음에 든다.

맞다. 난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언제나 영화를 좋아하는 덕후 소년이다.)

 

회사가 교육발령을 내었으니 나도 조직의 기대에 부응해서 열심히 연출을 공부해야지. 

 

요즘 멘붕을 겪고 있는 분들이 많은 것 같다. 트위터나 블로그 활동을 하며, 세상을 바꾸는데 일조하겠노라 열심히 했는데, 세상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아 실망한 분이 많겠지. 이번 기회를 핑게삼아 스스로에게 평소 아껴뒀던 사치를 허락해보시기 바란다. 세상을 위해 일하는 것도 좋지만, 그 과정에서 스스로 황폐해지는 것은 피해야겠지.

 

당분간 사치를 즐길 생각이다. 나를 위한 조그만 사치.

 

추신:

유료 서비스를 신청할 때 항상 다이어리에 표시를 해둔다. 핸드폰에다 한 달 후 일정에 알람을 설정해서 꼭 한 달이 지나면 해지한다. 아무 생각없이 놔두면 매달 1만원씩 거금이 빠져나가게 되니까. 사치란 잠깐 부려야 사치지, 오랜 시간 즐기면 익숙해져버려 사치를 즐기는 감흥이 사라진다. ^^  

   

(크로니클에 대한 1년전 포스팅을 참고하시려면~

 

2012/03/30 - [공짜 PD 스쿨/공짜 미디어 스쿨] - 유튜브는 자신의 취향을 연습하는 곳이다

 

Posted by 김민식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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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3.01.23 10:1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2. 메이드인헤븐 2013.01.23 15:5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는 힘든 일이 생기면 언제나 스스로에게 선물을 쾌척한다.'-> 이부분 심히 공감되고
    저도 요즘 이런 선물을 많이 주고 있습니다.(스트레스상태인가? ㅋㅋ)
    책에서도 그렇고 크로니클을 여러번 추천해주시네요~ 흐ㅁ.. 이번주에는 꼭 한번 봐야겠군요...^^

  3. 여행인간 2013.01.24 16:3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카페에서 물 떠놓고 앉아계실 정도라니.. 정말 짠돌이포스 제대로네요 ㅎㅎ 저도 저 영화를 꼭 한번 봐야겠습니다!

  4. 용용 2013.01.24 18:3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ㅎㅎ 마지막이 반전이라고 해야하나요? 당연한 결론? ㅎ

    사치는 짧게~ !

    앞으로는 우울한 일 없으셔서 사치하실 일도 없으시길 바래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