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하자고 한참을 쫓아다닌 끝에 드디어 아내가 청혼을 받아들였다. 감격한 내가 물었다. "나랑 결혼해주는 이유가 뭐야?" 아내의 대답. "오빠는 책 읽는 걸 좋아하니까. 감옥에 갇혀도 책 한 권만 있으면 행복할 사람이니까. 이런 사람이라면 아무리 힘든 일이 생겨도 믿고 의지할 만 하겠다 싶어서."

 

눈물이 나도록 고마웠다. 나와 결혼하는 최고의 이유가 아닌가! 

 

그렇게 결혼하고 10년이 흐른 어느 날... 집사람이 그랬다. "있잖아, 내가 퇴근하고 집에 왔을 때, 집안꼴 엉망이고, 애들 꼴도 엉망인데 당신은 앉아서 책을 보며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잖아? 그럼 속에서 천불이 일어나."

 

그 순간 깨달았다. 연애할 때 장점은 결혼하면 단점이 되는구나.

 

그 즈음 차기작을 고르던 내 눈에 띈 드라마 대본이 '내조의 여왕'이었다. 대본을 보자 탁 무릎을 쳤다. '이건 부부관계에 대한 탁월한 해석이 아닌가?' 극중 천지애 (김남주 역)는 고교 시절 날라리였다. 그래서 공부 잘하는 온달수 (오지호 역)에게 꽂혀서 결혼한다. 연애 시절에는 모범생에 바른 생활 사나이인 온달수가 그렇게 좋았는데, 막상 결혼하니 직장에서 늘 상사에게 입바른 소리하다 미움받고 융통성이 없어 잘리기 일쑤였다. 연애할 때 가장 좋았던 점이 결혼하고 보니 가장 나쁜 점이더라는 이 불편한 진실! '그래 이 못난 남편을 내가 내조의 여왕이 되어 성공시키겠어.' 결심한다. 그게 드라마 '내조의 여왕'이다.

 

대본을 보고 연출을 지원했고, 그래서 나는 '내조의 여왕'의 공동 연출을 맡게 되었다.

 

극단적인 비유라 생각할 수 있지만 실제 결혼 생활이 그렇다. 남자친구가 사교성이 좋은 게 장점이라는 이는 사교성 좋은 남편이 밤마다 술친구들 데려오는 걸 감수해야 한다. 직장에서 성실하게 일하는 여자 후배가 예뻐보여 사랑에 빠진 남자라면, 결혼한 아내가 직장에 충실하느라 자신에게 좀 소홀해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게 결혼 생활이다.

 

연애는 엔조이지만 결혼은 생활이다. 연애는 하다 재미없으면 헤어지면 그만이지만, 결혼은 그렇지 않다. 그 사람의 최대 장점이 최대 약점이 된다 해도, 그래도 나는 결혼을 권한다. 왜? 결혼을 통해 배우는 것이 더 많기 때문이다.

 

상처받기 두려워서 연애만 하고 결혼을 미루는 건, 정식 시합에서 실수하면 공식 기록이 저조해질까봐 연습시합에만 나가는 프로 야구 선수와 같다. 연애를 잘 해야 결혼도 잘 한다. 실패의 책임과 부담 없이는 배우는 스포츠가 없듯이 결혼의 책임에서 배우는 것도 크다. 나는 아내와의 결혼 생활 덕에 '내조의 여왕'이라는 좋은 드라마도 만날 수 있었다.

 

연애, 누구나 할 수 있다. 결혼은 어른의 몫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 단점이 될 수도 있다는 걸 감수할 수 있어야 한다. 어른이 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결혼하는 것이다. 사랑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는 것, 그것이 최고의 행복이다.

 

 

 

 

내조의 여왕 촬영장에서~ 아, 다시 현장 복귀해서 드라마 연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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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mrdragonfly1234 2012.06.22 06:1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세계사에서 유명한 철학자들의 아내를 묘사한 걸 보면 전부 다 악처로 되어있지요... 저는 그게 다 진짜인줄 알았었어요... 아내의 입장에서 보면 집구석은 찢어지게 가난한데 가정을 돌볼 생각은 안하고 돈 안되는 글만 끄적이고 있으니 잔소리를 해 댄거지요. 집안에 책이 잔뜩 쌓여있는데 갑자기 어느책 찾아내라고 하는데, 아내가 금방 못찾아 내면 소리를 지르며 화를 내는 책선생도 계십니다. 서로 생각이 다른 둘이 같이 산다는게 쉽지 않습니다.
    아내분들은 눈앞의 당장 먹을것, 입을것을 걱정하시는 분들이고, (스스로 큰일을 한다고 생각하는) 남편분들은 실상 아내의 집안살림에 기대어 지내면서도 집안일을 하챦게 생각하는 존재가 되고 맙니다.

    오히려 큰일을 하는 사람들이 아닌, 그저 평범한 남편이 아내에게는 더욱 도움이 되는거지요. 부부가 함께 벌어야하는 미국에서는 아내가 돈을 더 잘 벌고, 남편의 벌이가 별로인 상태에서 애를 가지게 되면, 남편이 직장을 그만 두고, 집안에서 살림을 하고 애를 보는 가정이 매우 흔합니다... 이걸 드라마로 만들면 "외조의 왕"이라고 이름 붙여야 겠네요..

  2. 나비오 2012.06.22 08:2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새겨 듣겠습니다. 꾸벅 ㅋㅋㅋ

  3. 2012.06.22 09:4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4. euni 2012.06.22 10:3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맞아요. 결혼전의 장점이 단점으로 보여질때도 있고,... 근데, 그게,.. 결혼전에 보아온 모습이 전부가 아니였구나.. 싶더라구요. 결혼전엔 유독 내가 보고싶은것만 보이는것같더니, 결혼하니깐,.. 걍 다 보이는것같아요.ㅋㅋ 좋게보면 새롭게 연애시작하는것같고요..ㅋㅋ 아 근데 나두 오빠가 연출한 드라마 보고싶네요. 아결녀나 내조의여왕같은 좀 먼가 실제 와닿는...

  5. 조남형 2012.06.27 15:5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데요~!!"를 외치시는 선배님 모습을 살짝쿵 떠올려 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