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책은 어떤 책이 좋은 책일까요? 내가 평소 갖고 있던 믿음을 강화해주는 책? 아니면 내가 갖고 있던 생각을 산산이 깨주는 책. 저는 후자라고 생각해요. 내가 알던 것을 확인하기 위해 읽는 책은 마음의 위안을 얻는 용도인 거죠. 좋은 책은, 독자를 불편하게 합니다. ‘당신의 생각이 과연 옳을까?’ 불편한 질문을 던지고 독자를 구석으로 몰아붙여요. <좋은 불평등 : 글로벌 자본주의 변동으로 보는 한국 불평등 30년> (최병천 저)도 그랬어요.
우리가 그간 알고 있던 불평등에 관한 ‘통념을 전복하는’ 책입니다. 그간 우리는 1997년 외환위기 이후 불평등이 시작됐고, 재벌, 신자유주의, 비정규직 때문에 불평등이 커졌고, 정치권의 정책적 요인 때문에 변동했고, 불평등은 경제성장에 해롭다고 알고 있었어요. <좋은 불평등>은 이러한 통념이 사실이 아니라는 걸 논증하고 있습니다. (이 책에 대해 올린 첫 번째 리뷰를 참고해주세요.)
https://free2world.tistory.com/439621
저는 한국 사회의 불평등을 줄이기 위해서는 가난한 사람들의 소득을 올려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최저임금을 인상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오랜 시간 진보정당에서 정책 전문가로 일해온 저자는 최저임금 인상에 반대합니다. 2016년 4월에 페북에 올린 <‘최저임금 1만 원’ 공약이 유감인 이유>라는 글 중 한 대목입니다.
‘최저임금 1만 원에 동의하면 바람직한 것이고 진보이고 양극화 해소이고 빈곤에 관심 있는 것이고, 1만 원에 동의하지 않으면 그 반대에 해당하는 것이면, 이왕이면 최저임금 2만 원, 3만 원, 4만 원 공약이 ‘더 진보’ ‘더 양극화 해소’ ‘더 빈곤 타파’에 해당하는 것일까?
한국은 자영업자 비율이 약 30%다. 미국이나 영국과 다르다. 그동안 모 진보언론이 부지런히 소개하는 미국의 뉴욕, 캘리포니아와 다르다. 미국과 영국은 자영업자 비율이 10% 미만의 나라다. 최저임금의 급격한 인상은 ‘한계상황’에 있는 소상공인들의 대량 몰락을 의미하게 된다. 이는 너무너무너무 명명백백한 문제다.
그래서 최저임금을 6,030원에서 1만 원으로 ‘단번에’ 무려 65% 정도를 인상하는 정책은 우리가 집권해도 실현 불가능하며, 실제로 집행하게 된다면 소상공인들의 대량 몰락, 대량 실업을 초래하게 되어 몰락한 소상공인 및 종사하던 노동자 들의 ‘전민항쟁’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우리나라 소득분포를 들여다볼 때 빈곤의 특성과 상관관계가 가장 높은 것은 4가지입니다. 초등학교 졸업 이하, 65세 이상, 은퇴한 사람, 임시·일용직. 실제로는 다 같은 사람입니다. 이분들은 누구일까요? 1930~1940년대 태어난 분들입니다.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 태어나 한국전쟁 시기에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내느라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세대. 심지어 그 시절에는 ‘여성은 교육받을 필요가 없다’는 가부장제적 사고방식이 강하게 남아 있었어요. 1945년 해방 직후 우리나라 12세 이상 문맹률은 80%가 넘었는데, 여성의 문맹률은 더 높았습니다. 바로 이분들이 하층의 진짜 실체입니다.
한국의 모든 산업을 11개로 분류했을 경우, 부가가치의 상대적 생산성이 절반(50) 미만인 산업이 3개 존재합니다. 기타 개인 서비스업(39), 농림어업(42), 도소매·음식·숙박업(43)입니다. 이들 산업이 ‘저부가가치 3대 산업’이고요. 2017년 기준 한국의 저임금노동자는 23.7%였습니다. 저부가가치 3대 산업에 저임금노동자가 많은 이유는 이들 업종의 ‘생산성’이 낮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 돈을 적게 벌기 때문이지요. 생산성이 낮아 돈을 적게 버는데 최저임금을 급진적으로 인상하면 견딜 수가 없게 됩니다.
2018년 1월부터 최저임금을 16.4%로 올린 이후, <가계동향조사> 결과 가난한 가구일수록 소득이 더 감소하고, 부유한 가구일수록 소득이 상승하는 것으로 나왔습니다. 정확하게 부익부 빈익빈 형태로 결과가 나왔습니다. 최저임금을 올리면 가난한 사람들의 급여가 올라가 불평등이 개선될 것이라 생각했던 것과 정반대의 결과가 나온 것이지요.
한국의 진보세력은 ‘최저임금이 낮아서’ 저임금노동자가 많았던 것으로 가정했어요. 논리적 순서를 살펴보면 낮은 최저임금 → 많은 저임금노동자 비중 → 최저임금의 대폭 인상 → 저임금노동자 축소의 순서지요. 한국이 다른 나라에 비해 유독 저임금노동자가 많았던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저부가가치 사업장의 대규모 존재 → 저부가가치 사업장의 낮은 생산성 → 저임금노동자의 대규모 존재 → 취업자 중 저임금노동자 비중 증가.
그 결과 최저임금을 ‘급진적’으로 인상하면 생산성이 낮은 영세 자영업과 소기업은 문을 닫거나 고용을 줄여야 합니다. 2018년 최저임금을 올리자 저임금노동자는 노동시장에서 퇴출됩니다. 폐업하는 가게가 늘었기 때문이지요. 2020~2021년 코로나 경제위기 이후, 저임금노동자 비율이 또 줄었습니다. 코로나 경제위기로 인해 저부가가치+소규모+대면 서비스업 특성을 가지는 노동시장에서 대규모 고용 충격이 발생한 거죠. 2018년은 정책적 실수 때문이고, 2020~2021년은 코로나 경제위기 때문이었습니다.
한국 진보세력은 계급론의 틀에서 노동을 이해합니다. 노동자 계급과 자본가 계급, 둘이 서로 반목한다고 생각하고요. 임금인상은 노동자 계급을 위하는 정책이라 생각합니다. 저자는 한국적 현실에 맞는, 불평등과 계급의 인식에서 중요한 것은 ‘비노동’의 재발견이라고 말합니다. 한국 사회에서 비노동은 하나의 계급입니다. 이들이 불평등의 최하단이고 우리 사회 하층의 진짜 실체입니다. 한국 사회에서 비노동은 바로 노인입니다. 다르게 말하면, 불평등을 해소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과제는 노인을 하나의 계급으로 재인식하는 것이지요.
우리는 불평등을 윤리적으로 ‘나쁜 것’이라 생각합니다. 불평등은 나쁜 놈, 나쁜 것이기에 불평등을 때려잡는 것은 무조건 좋은 일이 됩니다. 불평등은 ‘하층 소득 대비 상층 소득의 격차’입니다. 불평등이 증가하는 논리적인 경우의 수는 3가지지요. 상층 소득이 상승하는 경우, 하층 소득이 하락하는 경우, 중층 소득자 규모가 작아지는 경우. 1990년대 이후 한국 경제에서는 세 가지가 다 작동합니다.
첫째, 1987년 민주노조 설립 열풍과 2001년 중국의 WTO 가입 이후 한국 제조업 분야 대기업의 수출 대박 때문에 상층의 소득 증가가 발생합니다. 한국에서 상층으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집단은 예나 지금이나 대기업 노동자들입니다. 둘째, 1992년 8월 한·중 수교 체결과 중국경제의 부상으로 중국과 가성비 경쟁에서 밀린 한국의 중임금노동자가 큰 타격을 받았습니다. 대구의 섬유공장이나 부산의 신발공장이 문을 닫고 중국으로 이전했지요. 셋째, 하층의 경우 고령화가 가장 중요한 변수입니다. 고령화는 매우 복합적인 요인들로 작동하는 인구 구조의 변동입니다. 고령화 → 비노동(미취업) → 소득 상실 → 빈곤의 상관관계가 매우 높기 때문입니다.
한국경제 불평등에 영향을 미치는 가장 큰 2가지 변인(變因)을 꼽으라면, 상층 소득은 수출이고 하층 소득은 고령화입니다. 수출이 잘되면 불평등이 커집니다. 수출이 작살나면 불평등이 줄어듭니다. 고령자가 늘어나면 불평등이 늘어납니다. 노인 일자리를 늘리면 불평등이 줄어듭니다. 기초연금 인상 등 고령자에 대한 소득 보장 정책을 강화하면 불평등은 줄어듭니다.
1990년 이래 잘 사는 나라와 못사는 나라 사이 국가 간 불평등은 줄어들고 국가 내 불평등은 커졌습니다. 세계화로 인해 이익을 본 사람과 손해를 본 사람은 누구일까요? 세계화의 최대 수혜 집단은 아시아 국가와 아시아인들이었고요. 세계화로 인해 소득이 정체된 집단은 선진국의 제조업 노동자들입니다.
1990년대 이후 아시아의 경제적 소득 증가와 유럽 제조업 노동자들의 쇠락은 세계화에 대한 태도 차이로 연결됩니다. 베트남 사람들의 세계화 지지율은 무려 91%입니다. 반면에 프랑스 사람들의 세계화 지지는 37%에 불과합니다. 유럽의 많은 사람이 세계화에 분개합니다. 심지어 그들은 국제무역과 대규모의 인구 이동(이주민)을 자신들 사회에 퍼지는 악의 근원이라고 간주할 정도예요.
세계화로 가장 큰 이익을 본 건 아시아에 몰려 있는 글로벌 신흥 중산층입니다. 그다음으로 선진국의 최고 부유층들이 세계화로 이익을 봤어요.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의 중산층과 하위층이 가장 큰 손해를 봤습니다. 미국의 러스트 벨트 노동자들이 트럼프를 찍고, 영국의 레드월 노동자들이 브렉시트를 찬성하는 것은 노동자들이 엘리트층에 대해 분노를 표출하는 행위였습니다. 트럼프는 세계화의 반대지점에 있는 사람입니다. 미국 우선주의를 들고나와 유권자들의 마음을 얻었지요.
한국경제가 지난 30년 성장을 거듭한 결과 10대 선진국에 들어선 것은 세계화라는 변수가 우리에게 크게 유리하게 작동했기 때문입니다. 세계화가 호재이듯, 고령화 역시 호재입니다. 물론 지금의 노인에게 경제적 충격으로 다가온 건 사실입니다. 모아둔 돈은 적은데 생각보다 오래 살게 됨으로써 노후 빈곤에 빠지는 이들이 늘어났어요. 경제 성장과 더불어 가성비가 뛰어난 의료산업 덕분에 장수하게 된 결과입니다.
자, 그럼 지금의 70대 노인들을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최병천 저자는 민간 분야에서 노인 일자리를 창출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70세 이상 어르신에 한해 법정 최저임금을 20~40% 감액하는 것이라 말합니다. 최저임금을 연령별로 차등 적용하는 거죠. 예컨대 법정 최저임금이 시간당 1만 원인 경우, 70세 이상 노인에 한해 법정 최저임금을 30% 감액 적용합니다. 이 경우, 시간당 최저임금은 7,000원이 되고요. 고용 증대 효과를 발휘하게 됩니다.
70세 이상 노인에게 최저임금 감액 적용 → 70세 이상 노인들의 고용 증가 → 70세 이상 노인들의 근로소득 증가 → 노인 빈곤율 저하 → 노인 자살률 저하 → 가구소득 불평등의 개선 경로가 작동하게 될 것이라고요. 실제로 이 방법은 2019년 문재인 정부가 ‘노인 공공 일자리’ 확대를 통해 실천적으로 입증한 것이기도 합니다. 불평등의 최하단은 ‘노동시장 바깥에 있는’ 노인들이기 때문에, 노인들을 노동시장으로 끌어들이는 정책은 불평등 개선으로 연결됩니다. 동시에 비정규직 비율은 높아지되, 노인 빈곤율과 노인 자살률을 낮추게 됩니다.
다만 이런 정책은 노인에게 별로 인기는 없을 것 같아요. 같은 일을 하고 돈은 덜 받으라고? 노인고용 지원금 제도는 어떨까요? 70세 이상 노동자를 고용할 때 임금의 30%는 국가에서 지원하는 거죠. 사용자와 노동자 양쪽에 인센티브를 주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노인 일자리가 늘어나지 않을까요?
일하고 싶어도 건강 악화로 일할 수 없는 분도 계시겠지요. 75세 이상 저소득층 노인에 한해 보충연금을 도입해서 추가 지급하는 방안도 검토해야 합니다. 노인 빈곤율이 심각한 세대는 75세 이상 후기(後期) 노인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75세 이상 어르신들은 한국 현대사에서도 가장 힘들었던 시대를 살았던 분들이고, 가장 고생을 많이 한 분들이고, 가장 가난하고, 가장 외롭고, 가장 자살을 많이 하는 세대입니다. 한국 사회에서 불평등을 줄인다는 건,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힘든 시대를 살았던 분들에 대한 존경과 연대 그리고 연민을 실천하는 것이라는 저자의 말에 귀를 기울여봅니다.
(당분간 블로그에 글을 올리는 횟수를 주2회로 줄입니다. 기왕이면 공부가 되는 어려운 책을 시간을 들여 읽고, 글 역시 오랜 시간 공들여 쓰고 싶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더 잘하기 위해서는 때로는 양을 줄이고 질에 집중해야 할 때가 오는데요. 지금이 그런 양질전환이 필요한 시기인 것 같아요. 글의 편수가 줄어도 양해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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