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진로 특강을 가면 아이들이 제게 MBTI를 물어볼 때가 많은데요. 그때마다 참 난감합니다. 전 제 성격을 잘 모르겠어요. 저는 외향인일까요, 내향인일까요? 어려서는 무척 소심하고 내성적이었어요. 이제는 나이가 들어 사람들 앞에 서서 강의도 하고, 코미디 피디로 일할 때는 무대에 올라 춤도 추고 노래도 했어요. 그러니 분명 외향인인 것 같은데, 아직도 은근히 내향적인 구석이 있거든요. 술 담배 커피를 하지 않고 동창회에 나가는 게 재미가 없어요. 별로 친하지 않은 사람과 술을 마시는 것도 불편합니다.
지난번에 소개한 김동식 작가의 에세이 <무채색 삶이라고 생각했지만>을 보면 김동식 작가는 극내향인이네요. 식당에서 약속이 있어 갔다가 제일 먼저 도착하면, 식당 안에 들어가지 않고 밖에서 일행이 오기를 기다린답니다. 혼자 들어가 테이블에 앉아 있는 게 눈치보이고 불편하다고요. 옛날에는 좋게 말해서 ‘소심하다’든지, ‘지질하다’거나 ‘사회성이 없다’고들 했는데, MBTI 덕에 참 편해졌어요. 어딜 가도 내향인이라고 자신을 설명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지요. 이제는 그냥 ‘I’로 다 통용됩니다. ‘나댄다’라는 말 대신 ‘E야’라고 하니 얼마나 좋아요. MBTI가 언어 순화적으로 큰일을 했다네요. 김동식 작가는 자신을 극내향인이라고 소개합니다.
그렇게 내향적인 저자를 외향인으로 보는 사람이 많습니다. 특히 강연을 다니다 보면 그래요. 아마 저자가 떨지 않고 강연하는 모습에서 적극적인 기운이 느껴지나 봅니다. 사실 강연을 다니며 외향성이 강해지긴 합니다. 강연자랍시고 앞에 서서 소심하게만 있으면 얼마나 민폐겠어요. 사람들 앞에 선 이상 역할을 다해야 한다는 책임감으로 항상 밝게 말하려고 한다고요. 그러다 보니 이런 질문을 받습니다.
“정말 소심하셨다고요? 저도 소심한 게 고민인데, 작가님처럼 성격을 고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저자가 말하는 비결은 ‘사람의 눈을 보고 얘기하기’입니다.
‘옛날에는 사람의 눈을 보고 대화하질 못했다. 강연을 다닐 때도 바로 앞 땅만 보고 얘기했다. 그러다 어느 날 깨달았다. ‘나를 보려고 찾아온 분들을 내가 무서워하는 게 맞을까?’ 결국 용기 내어 그분들의 눈을 쳐다보기 시작했는데, 마치 그 눈빛들이 ‘뭘 해도 다 괜찮아’라고 말하는 듯했다. 내 소설을 읽고 찾아와주신 분들은 기본적으로 나에 대한 호감이 가득했고, 덕분에 나는 점점 편한 마음으로 사람들의 눈을 보고 얘기할 수 있게 되었다. 사람의 눈을 똑바로 보고 말하면 자신감이 생긴다. 스스로 숨길 게 없이 정직하다는 생각이 들면서 당당해지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그래서 난 소심한 성격을 극복하는 첫걸음으로 사람의 눈을 보고 얘기하는 버릇을 추천한다.’
확 와닿습니다. 저 역시 그래요. 그래서 강의를 할 때는 청중과 눈을 맞추며 이야기하는데요. 이게 어려운 환경이 있습니다. 바로 연사와 청중의 거리가 먼 대강당 강의입니다. 작년에 어느 대학에 특강을 갔는데요. 500석이 넘는 대강당인데 수강생들이 뒷자리부터 채웠어요. 연단 근처에 앉은 이는 아무도 없는데, 심지어 다들 노트북을 열고 화면만 들여다봐요. 눈을 맞출 수가 없는 환경이지요. 그날 강의하면서 혼자 넋두리를 늘어놓은 것 같아 무척 힘들었어요. 대화는 눈을 맞추고 해야 재미나거든요. 도서관 저자 강의는 달라요. 청중이 다들 저와 눈을 맞추고 고개를 끄덕여주시고 귀를 기울여주십니다. 저는 말을 잘 하는 사람이 아니라, 내 말을 잘 들어주는 사람을 만나야 기운이 난다는 걸 깨달았어요. 저처럼 내향적인 사람은 그래요.
저는 어려서부터 사람을 만나는 것보다 책을 읽는 게 더 편했어요. 그런 내가 어떻게 외향적인 사람이 되었을까? 직업의 영향이 큽니다. 일단 첫 직장에서 영업사원으로 일할 때는 적극적이 되어야 합니다. 물건 팔러 다니는 사람이 고객을 만나는 걸 불편해하면 고객은 더 힘들어요. 그래서는 물건을 팔 수가 없어요. 저는 애써 쾌활한 척 연기를 하며 살았어요. 통역사도 마찬가지예요. 연사가 말을 할 때는 눈을 맞추고 그의 말을 다 이해한 듯 연신 고개를 끄덕입니다. 그런 다음 자신 있게 우리말로 옮겨요. 제가 자신 없이 웅얼웅얼 말을 하면 듣는 청중들이 불안해집니다. 피디는 더 그렇지요. 작가나 배우, 카메라맨, 다 예술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술에는 정답이 없어요. 내가 쓴 대본, 내가 한 연기, 내가 잡은 앵글이 맞는지 확신이 안 들어요. 이럴 때 감독이 내향인이라 눈을 맞추지도 못하고 긍정적인 리액션도 하지 못하면 다들 힘들어합니다. 저는 외향인이라는 탈을 쓰고, “오케이! 좋아! 대본 예술이네요. 연기가 죽여! 앵글이 끝내줍니다!”하고 외쳐요. 우리에게는 사회적 역할이 있으니까요.
그런데요, 내가 내향인인데, 억지로 외향인의 삶을 연기하고 살면 그건 자기착취입니다. 저는 외향인의 역할을 수행하며 별로 힘들지는 않았어요.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니까요. 재미난 시트콤을 만드는 과정인걸요. 내 책을 읽고 나를 만나러 온 고마운 독자들을 위해서 저는 유쾌한 작가라는 롤플레이에 최선을 다할 수 있어요. 내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일이니까요.
내향적인 사람이라도 앞으로는 외향성이라는 사회적 역할을 수행해야 할 때가 늘어날 겁니다. 인공지능의 시대라서 그래요. 인공지능의 시대, 소설가라는 일은 어떻게 될까를 고민하던 김동식 작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인공지능이 아무리 소설을 잘 써도 작가라는 직업이 사라질 일은 없다. 그 옛날 사진기가 처음 등장했을 때 화가가 사라질 거라고 했지만 틀렸다. 화가들이 사진기로 대체할 수 없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서 오히려 더 발전했다. 사실주의에서 벗어난 인상주의, 초현실주의 회화 등이 그 예다.
절대 인공지능이 대체할 수 없는 영역이 소설가에게 남아 있다. 대면이다. 인공지능은 독자를 대면할 수 없다. 인공지능이 쓴 소설이 아무리 재미있어도 사인회가 열리지 않는다. 혹 그럴듯한 사인회용 작가 로봇을 만들어도 사람들이 찾을 리가 없다. 인공지능에게 온라인으로 사인을 받으나 현장에서 받으나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독자가 사랑할 수밖에 없는 건 살아 있는 인간이다. “이 책을 보고 돌아가신 부모님이 생각나서 울었어요. 작가님도 그러셨군요”라는 말을 인공지능에게 하겠는가. 눈과 눈을 마주하고, 생각을 나누고, 교감하는 일은 오직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만 가능하다. 이 대면이 있는 한 작가는 절대 인공지능으로 대체되지 않는다.
강연처에서 독자들과 만나면서 자주 하게 되는 말이지만, 지금 시대의 작가는 정말 소통 능력이 중요하다. 점점 더 중요해질 거다. ‘독자가 있기에 작가가 있다’라는 그 상투적인 말이 이젠 ‘독자의 곁에 있을 수 있기에 작가가 있다’로 변할 것이다. 그래서 난 한판 붙어도 겁날 게 없다. 챗GPT는 두려움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인공지능의 시대, 지식과 기술은 컴퓨터나 로봇에 의해 대체될 수 있지만 태도는 기계가 대신할 수 없어요. 사람의 마지막 역량이 될 것이고요.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대면 업무방식은 기계가 대신할 수 없기에 인간의 마지막 일자리가 될 겁니다. 이럴 때 내향인들은 어떻게 살아야할까요? 무조건 본인이 좋아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김동식 작가님이나 저나, 내향인이지만, 각가 작가와 피디라고 하는, 자신이 좋아하는 직업을 찾은 결과, 외향인의 역할도 즐겁게 수행할 수 있었거든요.
타고난 성격은 바꿀 수 없어도 직업은 선택할 수 있어요. 모쪼록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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