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앙마이 여름 휴가를 앞두고 행복한 고민에 빠졌어요. 내년 초에 나올 <짠돌이의 경제 공부> 원고 작업하느라 한동안 경제 경영 관련 책들만 읽었거든요. 이제 초고를 마무리했으니 재미난 책을 읽고 싶은데 무엇을 읽을까? 도서관에 가서 처음 집어든 책은 <랑야방>이었어요. 회사 선배가 재밌다고 강추한 중국 소설이에요.
일본어 공부하는 요즘은 일본 여행도 다니고 일본 애니메이션을 청취 공부 삼아 보고 있는데요. 내년에는 중국어를 공부하고 싶어요. 일단 원작 소설을 읽고 중국 드라마 <랑야방>을 완주해도 좋겠네요. 그런데 도서관에서 빌려온 1권을 읽고 난 후, 고민이 생겼어요. 책은 재미있는데 대하소설인지라 엄청 두껍습니다. 여행 갈 때 짐은 최소화하는 게 원칙인지라, 이렇게 무거운 책을 싸들고 가기엔 부담이네요. 그래서 전자책 대여 서비스인 크레마 클럽과 밀리의 서재를 뒤졌어요. 그러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신작 <퀸의 대각선>이 올라온 걸 봤어요.
영풍문고 사당역 점에 갔다가 이 소설을 소개하는 광고판을 봤어요. 출판사에서 이렇게 팍팍 밀어줄 때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베르베르의 출세작 <개미>를 어렸을 때 정말 재미나게 읽었어요. 내가 좋아하는 작가의 신작이 궁금했는데, 전자책으로 나왔으니 크레마 카르타에 다운로드 받아서 여행 다니며 읽기에 딱이네요.
<퀸의 대각선>은 서로가 영혼의 숙적인 두 여성, 니콜과 모니카가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며 벌이는 대결을 그립니다. 혼자 있기를 두려워하는 니콜은 집단으로 뭉쳐 있을 때 진정한 힘을 발휘한다고 믿고, 반대로 무리 짓는 행태를 혐오하는 모니카는 뛰어난 개개인이 세상을 움직인다고 생각해요. 둘은 열두 살 체스 대회에서 운명처럼 만나 니콜은 폰들로, 모니카는 퀸으로 게임을 벌입니다. 그리고 이후 평생에 걸쳐 자신의 신념을 걸고 세계를 체스 보드 삼아 승부를 펼치는데요. 과연 최후에 승자가 되는 건 누구일까요?
치앙마이에서 호캉스를 즐기며, 선선한 호텔방에서 이 책을 읽는 건 꿀잼이었어요. 책을 읽다 만난 반가운 대목. 소설의 제목이 <퀸의 대각선>인데 역사상 가장 유명한 여왕이 나와요. 바로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 1세. 영국이 아니라 잉글랜드의 여왕이라고 표현한 이유? 당시는 스코틀랜드랑 합병하기 전이거든요. 카리스마 넘치는 군주였던 헨리 8세와 그의 두 번째 왕비 앤 불린 사이에서 태어난 엘리자베스는 어린 시절에 삶이 힘들었어요. 아버지인 헨리 8세가 어머니인 앤 불린을 교수형에 처해요. 졸지에 그녀는 공주의 직위까지 한꺼번에 잃었습니다.
헨리 8세가 사망하자 그가 첫 번째 왕비 사이에서 얻은 딸 메리가 왕위를 계승해 잉글랜드 역사상 최초의 여왕이 됩니다. 잉글랜드를 가톨릭 국가로 되돌려 놓기로 결심한 메리 1세는 에스파냐의 펠리페 2세와 결혼했고, 신교도들을 지지했던 엘리자베스를 감금합니다. 성질이 불같았던 메리 1세는 수많은 신교도들을 처형시켜 〈피의 메리〉라고 불렸지요. 메리 1세가 병으로 죽자 이복동생인 엘리자베스가 왕위를 계승합니다.
여왕 엘리자베스 1세의 치세 동안 잉글랜드는 빠른 속도로 근대화됐어요. 윌리엄 셰익스피어와 함께 연극을 발전시켰고, 새로운 건축 양식을 도입했으며, 신대륙에 식민지를 건설했습니다. 엘리자베스 1세는 구혼자들에게 자신은 이미 잉글랜드 백성과 결혼했으며, 자신과의 결혼을 통해 왕이 될 남편에게 명령을 받을 이유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평생 독신으로 살았지요. 아버지가 어머니를 교수형에 처하는 걸 보고, '음... 난 그냥 결혼 안 하고 살아야지.' 했던 게 아닐까요?
엘리자베스 1세에게는 이복언니 메리에 이어 똑같은 이름을 가진 또 한 사람의 숙적이 있어요. 바로 그녀의 사촌이자 스코틀랜드의 여왕인 메리 스튜어트였습니다. 메리 여왕은 프랑스와 에스파냐의 지지를 받고 있었어요. 엘리자베스 1세는 메리 스튜어트가 자신을 상대로 꾸민 여러 번의 음모를 번번이 좌절시킨 후 1587년에 그녀를 체포해 교수형에 처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에스파냐는 무적함대를 파견합니다. 가톨릭 구세계와 개신교 신세계가 정면충돌한 것이지요. 1588년 8월, 3만 명의 병력과 거대한 함포를 장착한 에스파냐의 커다란 배 130척가량이 잉글랜드의 작은 군선 약 2백 척과 영불 해협에서 맞붙었습니다. 세계 3대 해전인 칼레 해전. 이때 잉글랜드 해군을 지휘한 사람은 프랜시스 드레이크 제독입니다.
거센 태풍이 일자 해상 전투는 빠르고 민첩한 잉글랜드 군선들에게 유리하게 전개됐고, 결국 뛰어난 지휘관을 가진 잉글랜드 해군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아메리카 대륙을 정복해 획득한 금을 기반으로 세워진 에스파냐 제국이었지만 이때의 패전 이후로 서서히 몰락의 길을 걷게 됐고요. 반면 잉글랜드는 16세기 이후 강력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해상 무력을 발전시키고 전 세계에 식민지를 건설했습니다.
말년에 엘리자베스 1세가 약이 바짝 오를 일이 한 가지 있었습니다. 평생 독신으로 살며 후사가 없었던 여왕은 자신의 철천지원수였던 메리 스튜어트의 아들 제임스에게 잉글랜드의 왕위를 물려줄 수밖에 없었거든요.
이 대목을 읽고 작년 2월에 쿠바와 마드리드를 여행하며 느낀 의문점이 풀렸어요. 왜 영국의 왕실은 21세기의 셀럽이 되어 세계적인 관심사가 되었는데, 스페인은 아직 왕실이 있다는 것조차 모를 정도로 존재감이 약한가? 그 바탕에는 두 여왕의 대결이 있었던 거죠. 물론 이후 농업 국가로 남은 스페인과 산업화의 주역이 된 영국의 경제력 격차가 벌어진 이유도 있고요. 심지어 그 식민지들조차 명암이 갈립니다.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쿠바와 영국의 식민지였던 미국의 격차를 보면 알 수 있지요.
독서와 여행은 선순환의 관계입니다. 책을 읽다보면 가고 싶은 곳이 늘어납니다. 그래서 여행을 다니다 보면 궁금증이 생기기도 해요. 그런 궁금증은 다시 책을 읽다 풀리기도 하고요. 소설을 읽다 역사의 수수께끼를 푸는 재미를 맛보기도 합니다.
참고로 원래 ‘위대하고 가장 축복받은 함대’라는 별칭을 가진 스페인의 함대에 ‘무적함대’라는 별명을 지어준 게 영국이었답니다. 상대를 높여줌으로써 '그런 막강한 적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 우리가 더 뛰어나다'는 걸 알리는 홍보 전략이었다고요. 여러분이 살다가 누가 봐도 엄청난 시련과 고난을 만나잖아요? 그럼 이야깃거리가 생깁니다. 그런 강적을 상대하고도 나는 살아남았다는 자전적 스토리가. 강적을 만나면 반겨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소설 <퀸의 대각선>에는 평생 숙적으로 살아가는 두 소녀가 나옵니다.
국가대표로 세계 청소년 체스 대회에서 둘은 만납니다. 체스 시합은 시간으로 승패가 갈립니다. 수를 놓고 나면 모래시계를 뒤집어요. 그럼 모래가 다 떨어지기 전에 상대가 다음 수를 두어야 합니다. 그러지 못하면 패배합니다.
‘어두운 표정이 된 오스트레일리아 선수가 필사적으로 수를 찾는 사이 시간이 흐른다.
째깍째깍.
모니카가 앞으로 몸을 숙이며 귓속말하듯 상대에게 말한다.
「Vulnerant omnes ultima necat.」
「<매 순간 상처를 입히고 종국에는 죽인다.> 고대 로마인들이 사용하던 해시계 시반면에 적혀 있던 글귀야. 매 순간이 우리를 늙게 만들며 상처를 입히다가 마지막 순간에 결국 죽인다는 뜻이지.」'
체스 시합에서 매 순간 시계는 째깍이며 패배자를 독촉합니다. 시계의 독촉에 못 이겨 악수를 하나 둘 두다보면 판세에 기울고요, 끝내 패배를 맞이합니다. 승자의 여유를 보여주는 말이자 상대를 향한 협박인데요.
시간은 우리를 매 순간 상처를 입히고 종국에는 죽입니다. 생로병사가 다 시간의 소행입니다. 저 문구를 로마인들이 해시계에 적은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러기에 인생의 매 순간을 소중히 여기라는 뜻 아닐까요?
여행을 하다 보면 의미 없이 보내는 순간도 생깁니다. 공항에서 지연 출발하는 비행기를 기다리는 순간, 새벽에 일어나 하릴없이 멍하니 침대에 누워있는 시간, 기차를 타고 이동하는 지루한 시간. 저는 그 시간에 재미난 소설을 읽습니다. 책과 함께 하는 시간은 늘 즐겁거든요.
독서의 계절, 재미난 소설과 함께 선선한 가을날을 보내시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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