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공부를 하면서 느낀 점.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갈수록 불평등이 심화합니다. 제가 어렸을 때는 모두 다 공평하게 가난했어요. 그래서 빈부격차가 크지 않았어요. 한국 사회가 경제 선진국이 된 후 잘 사는 사람과 가난한 사람의 격차가 커졌어요. 사회적 불안감도 늘었고요. 저는 1997년의 외환위기가 한국 사회의 불평등이 심화하는 분기점이라고 생각했어요. 구조조정이 시작되고 종신고용이라는 개념이 깨지면서 비정규직 노동자가 늘어났거든요. 하지만 <좋은 불평등 : 글로벌 자본주의 변동으로 보는 한국 불평등 30년> (최병천)을 읽어보니 한국경제 불평등의 시작점은 1997년 외환위기가 아니라 1994년이랍니다. 국내적 사건과 국제적 사건 3가지가 맞물려서 작동했는데요. 1987년 노동자 대투쟁, 1992년 중국의 경제 개방, 1992년 8월 한·중 수교입니다. 이 사건들은 왜, 어떻게 한국경제 불평등으로 연결됐을까요?
첫째, 노동자 대투쟁
1987년 6월 항쟁의 결과, 대통령 직선제라는 민주주의 정치 체계를 복원시킵니다. 그걸 본 노동자들은 1987년 노동자 대투쟁에 나서 임금인상을 요구하지요. 1970년대 권위주의 정부에서는 기업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 노동조합을 탄압하고 임금인상을 억제합니다. 그 시절 한국 기업의 국제 시장에서의 경쟁력은 저렴한 임금이었거든요.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임금이 꾸준히 오릅니다. 1989년에 명목임금 상승률은 약 25%였는데요, 노동생산성은 약 4%였습니다. 명목임금 상승률이 노동생산성의 약 6배 수준이었지요.
1987~1992년 사이 ‘급격한’ 임금인상이 일어났고요. 노동생산성을 상회하는 급격한 임금 인상이 발생할 경우 기업은 어떻게 될까요? 경쟁력을 잃고, 망하는 기업이 나옵니다. 특히 저임금노동력에 기반한 저기술·노동집약적·수출·제조업의 경우 강력한 경쟁력 위기에 직면하게 됩니다. 이때 두 번째 사건이 발생합니다.
둘째, 중국의 경제 개방
1989년 중국에서는 천안문사건이 일어나요. 정치 개혁과 경제 개방을 요구하는 민의가 터져 나온 거죠. 정치에 있어 공산당 1당 체제를 포기할 수는 없어요. 그래서 경제 개방을 선택합니다. 수출노선의 전면화, 과감한 해외자본 유치, 경제특구의 대대적 확대, 과감한 규제 완화, 제조업 육성, 민간기업 육성을 추진했어요. 1989년 중국경제성장률은 4.2%, 1990년에는 3.9%였어요. 사회주의 시장경제 노선이 채택된 이후, 중국의 경제성장률은 1992년 14.2%로 껑충 뛰어오릅니다.
셋째, 1992년 8월 24일 한·중 수교가 체결됩니다. 한·중 수교 체결은 노태우 정부의 업적 중 하나인데요. 한국은 중국과 수교를 맺기 직전인 1992년 4월, 국내 기업의 국제화를 위해 해외투자 승인 절차를 대폭 완화하고요. 1992년 12월에는 베트남과 수교를 맺었습니다. 2022년 현재 중국은 한국 경제에 있어 수출과 수입 모두 1위 국가가 됐고요. 베트남은 수출 3위, 수입 5위 국가입니다. 냉전이 끝나갈 무렵, 노태우 정부는 북방외교를 통해 선도적인 독자 외교를 펼쳤고요. 중국과 베트남, 빠르게 성장하는 두 나라와 무역 파트너십을 맺은 덕분에 1990년대 중반 이후 한국의 GDP는 고속 성장을 거듭합니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대규모 임금인상과 잦은 노사분규는 기업 입장에서 ‘경쟁력 위기’를 의미합니다. 한국 기업의 경쟁력이 급격히 약화되던 그 시점에 중국공산당은 ‘사회주의 시장경제 노선’을 채택해요. 마침 그 시기에 노태우 정부는 취약한 지지율을 돌파하기 위해 북방외교를 적극적으로 추진합니다. 1992년 8월 24일 한국과 중국은 드디어 수교를 맺습니다. 3가지 사건이 드디어 만나 삼단 합체 로봇이 됐습니다.
한·중 수교가 체결되자, 인건비 인상으로 수익성 압박을 받던 저숙련·저임금 기반의 한국 자본가들에게 중국 공산주의는 ‘자본의 해방구’가 됩니다. 저임금·저숙련 기반의 한국 자본가들은 일당 독재의 나라 중국 공산주의로 피난을 갑니다. 더 낮은 임금을 찾아서.
제가 어렸을 때 친척 중에서 가장 잘 사는 분은 대구에서 섬유공장을 갖고 있던 분이었어요. 언젠가 그분 사업이 힘들어져서 결국 망했다고 들었고요. 저는 그게 IMF탓이려니, 생각했거든요? 아니에요. 중국이 세계무역 시장 안에 들어오면서 값싼 노동력을 제공하자 한국의 공장들은 경쟁력을 잃어버린 겁니다. 그러니까 그 시절 경제적으로 어려워진 건 개개인이 잘하고 못하고가 아니에요. 거대한 세상의 변화를 개인이 막아낼 수는 없었던 거죠.
한국은 OECD 국가를 통틀어서도 가장 빠른 속도로 저기술·제조업 일자리가 사라졌습니다. 1987~1992년 즈음 한국 제조업의 총 고용 비중은 전체 취업자의 30% 수준이었어요. 하지만 2000년대를 거치며 한국 제조업의 고용 비중은 약 17%로 줄어들었습니다. 저숙련·노동집약적·수출·제조업에 종사하는 일자리가 사라지게 됐어요. 이들은 제조업에서는 하단에 위치했지만 전체 노동시장에서는 ‘중간소득’ 일자리에 해당합니다. 중간소득 일자리의 규모가 급격히 줄어들었고, 바로 이것이 1994년부터 한국경제 불평등이 증가하기 시작한 진짜 이유입니다.
그런데 이건 우리만 겪은 일이 아니에요. 미국, 유럽을 포함한 대부분의 선진국도 1990년대 중반 이후 불평등이 증가합니다. ‘글로벌 차원의’ 환경 변화가 발생했기 때문이지요. 1990년대 이전의 자본주의와 1990년대 이후의 자본주의는 크게 3가지가 달라졌습니다. 첫째, 1991년 소련이 해체되면서 미·소 냉전 체제가 해체됐어요. 동시에 탈냉전 이후, 미국의 유일 헤게모니 시대가 시작됐습니다. 둘째, 붕괴된 공산주의 국가들이 자본주의 시장경제에 합류했습니다. 글로벌 자본주의의 시장 규모를 변화시키고, 노동 공급량을 획기적으로 변화시켰어요. 셋째, 1980년대부터 진행된 정보통신기술(ICT)혁명이 생산의 국제화를 급진전시켰습니다.
이와 같은 3가지 거대한 환경 변화는 국제분업 구조를 재편하고, 생산의 국제화를 초래하고, 자본주의 시장 규모를 급팽창시키고, 글로벌 차원에서 저렴한 노동력의 대량 공급을 통해 자본과 노동의 계급적 힘겨루기에서 자본의 협상력을 높이게 됩니다. 지금 한국경제가 겪고 있는 경제적 이중구조, 노동시장의 구조재편, 청년들의 일자리 문제, 제조업 위기, 심지어 수도권·비수도권의 지역 불균형 심화 역시도 1990년대 이후 글로벌 자본주의 재편에서 비롯된 일들입니다.
저는 이 책을 읽고 한국경제의 불평등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어요. 첫째는 고령화. 지금의 노인 세대가 힘든 이유는 한창 돈을 벌고 모아야 할 때 세계화라는 거대한 물결이 한국의 제조업에 몰아치면서 일자리가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모아놓은 돈은 없는데 갑자기 너무 오래 살게 되었어요. 그래서 노후 빈곤이 심화하는 겁니다. 둘째, 경쟁의 심화. 젊은 세대는 경쟁의 여파를 온몸으로 느끼고 있어요. 제가 대학원에서 학생들을 지도하면서 느껴요. ‘내가 과연 20대에 이들처럼 똑똑하고 야무졌던가?’ 학력이며, 외국어 능력이며, IT 숙련도가 뛰어난 20대가 취업이 힘든 건 그들의 노력이 부족한 탓이 아닙니다. 세상이 바뀌어서 그래요. 세계화로 노동의 공급은 늘었는데, 정보화로 일자리의 수요가 줄어들었어요. 이건 개인이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어떻게 살 것인가?’ 참 어렵습니다. 하지만 북녘의 동포들을 생각하면 우리는 혜택받은 이들입니다. 한국은 세계화와 정보화의 최대 수혜자거든요. 그 두 가지 변화가 우리를 세계 10대 경제 대국으로 성장시켰으니까요.
‘2021년 UN무역개발회의는 만장일치로 한국을 선진국으로 인정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식민지 경험이 있는 나라 중에 선진국에 도달한 나라는 한국이 유일하다. 한국은 어쩌다 선진국이 됐을까? 한국이 선진국이 된 비결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 하나를 꼽으라면 ‘국제적 환경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 가장 치열하게 고군분투한 나라였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하게는 수출 경제의 최일선에 있는 한국 대기업들이 ‘글로벌 환경 변화’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 치열하게 고군분투했기 때문이다.’
변화를 무조건 두려워하고 피할 필요는 없습니다. 세상이 변할 때, 나는 그 안에서 변하지 않는 가치를 찾고 그것을 나의 경쟁력으로 만들고 키워가야 합니다. 책을 읽으며 계속 고민해보렵니다. ‘어떻게 살 것인가?’
(요즘 제가 하고 싶은 일이 좀 많습니다. 여행가고 싶은 곳도 많고요. 새로 읽고 싶은 책도 많고요. 그래서 당분간 블로그에 글을 올리는 횟수를 주2회로 줄이려고 합니다. 좋아하는 일이 힘든 숙제가 되면, 저는 잠시 쉬면서 숨고르기에 들어갑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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