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문득 만화가 보고싶었다. 우울할 때 보는 만화 3종세트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야구 만화 H2다. 에이스 투수 히로(영어로 읽으면 히어로)와 4번 타자 히데오(한자로 쓰면 영웅)의 대결을 그린 만화다. 둘 다 멋지지만, 특히 히로는 아다치 미츠루가 만든 캐릭터 중 최고다.

 

악역 중에 히로타라고 이기기 위해 상대 타자의 몸을 맞히는 공도 불사하는 선수가 있다. 영리한 히로타는 상대 타자를 부상시키고도 매번 교묘한 변명으로 빠져나간다. 그때 히로의 한마디. 

 

'아무리 머리가 좋아도 이기는 것만 생각해선 공부가 부족하게 될걸. 대체로 스포츠에선 이긴 시합보다 진 시합에서 더 많은 것을 배우는 법이니까.' 

 

가끔 학교 강의를 나가면 학생들이 묻는다. '드라마 피디로 살면서 가장 힘든 점은 무엇입니까?'

 

'내가 전교 꼴찌에요. 이걸 아무도 모르고 나만 알아요. 그럼 크게 힘들지 않아요. 그런데 우리 반 아이들이 다 알아요. 좀 창피하겠죠? 만약 동네 사람들이 다 안다면 어떨까요? 아마 밖에 나다니기도 힘들 거에요. 나는요, 내가 만드는 드라마가 시청률 꼴찌를 하면 온 국민이 다 알아요.'

 

시청률 부진 만큼 피디에게 힘든 게 없다. 어떤 드라마 피디는 조기종영을 겪은 후, 지하철만 보면 뛰어들고 싶어서 한동안 전철을 피했단다. 나도 조기종영도 당해보고, 시청률 부진도 다 겪어봤다. 하지만 그러고도 여전히 드라마 연출로 사는 이유?

 

안되면 안되는 대로 배움이 있는 것이 인생이다. 조연출 시절, '가문의 영광'과 '논스톱'을 조기종영으로 말아먹은 바 있다. 두번의 실패를 통해 시트콤에 대해 많이 배웠다. 그래서 다시 도전한게 '뉴논스톱'이다. 연출은 행복한 직업이다. 잘되면 보람을 얻고, 안되도 경험을 얻는다. 편성이 불리하다고, 대진운이 나쁘다고 연출 기회를 피한 적은 없다. 나는 실패에서 배우는 연출이니까.

 

내가 요즘 사는 게 힘들어 보이는지 가끔 사람들이 그런다. '영리하게 굴어. 승산도 따지면서 살아라. 그러다 다칠까 겁난다.'

 

나는 영리하지 못해서 승산이 있느냐, 없느냐는 따지지 않는다. 내게 중요한 것은 싸움을 즐길 수 있느냐 없느냐다.

 

H2의 히로가 주는 교훈? 경기에서 승패에 집착하기보다 과정을 즐겨야한다. 그게 진정한 스포츠맨쉽이다. 인생도 똑같다. 결과는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때로는 처참하게 질 수도 있다. 그것 역시 받아들이겠다는 자세로 살면, 도전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이기는 싸움에만 들어가겠다는 자세로 살면, 인생에서 배우는 게 없다.

 

이기면 성취감을 얻을 것이요, 지면 배움을 얻을 것이다.

 

 

 

나는 오늘도 즐길 것이다. 하루치의 내 인생을.

 

고맙다, 히로.

 

 

Posted by 김민식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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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2.06.21 07:2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2. 뽀그리 2012.06.21 08: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봤습니다. 아다치 매니아로서 공감가는 글과 교훈이군요.
    피니님께서 보신다는 우울할때 보는 다른 만화 두가지는 무엇인지요??

  3. mrdragonfly1234 2012.06.21 11:1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기면 기쁘고, 져도 배우는 스포츠맨쉽을 가질수 있는건 아마튜어 스포츠지요. 그래서 순수한 스포츠라고 할수 있겠지요.

    그런데 관중들을 더 기쁘게 하기 위해서 극한까지 몰아가는것은 프로 스포츠... 프로 스포츠의 세계는 냉정합니다. 지면 관중들이 야유를 보내고 이기는 자는 보너스를 받고, 연속으로 지면 직업을 바꾸어야 합니다. ( 저는 야구 농구등은 안보고 UFC를 보고있습니다)

    저도 저의 인생에서 어느날 아침에 일어나서 모든것이 아마튜어 세계같이 그냥 악수 한번하고 웃으면서 다시 시작하고 싶은 날이 여러번 있었습니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갈수 있다면 그자리에서 내가 과연 다르게 행동했었을까? 하고 반문해보면 두가지의 가능성인데, 하나는 다른 행동을 취해서 오늘의 결과를 피하는것...

    이것을 영어로는 looking back 20/20 clear vision 이라고 하쟎아요, 그건 항상 결과를 알고나서 하는소리에 불과한거지, 만약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작업을 정직하게 상상해보면 결국 다시 꼭같은 결정을 내리는 스스로을 발견하고 맙니다..

    영화 crow 생각나시지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도 운명을 거스를수 없다는 스토리... 어차피 나에게 닥칠 운명이라면 받아들이고 헤쳐나가야지요..

    제가 항상 스스로 위안을 삼았던 말은 "최선을 다한 사람에게 후회는 없다"라는 말입니다. (요즈음은 좀 게을러져서 최선을 다하지는 않지만, 저도 바로 얼마전까지도 하루하루 최선을 다했던 사람입니다)

  4. 2012.06.21 11:4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5. 에듀파워 2012.06.21 17:4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피디님 6개월 정직 받으셨네요..두분이 또 해고 당하셨어요.....멀리서 지켜보면서 나도 싸우게 되면 피디님처럼 웃으며 즐기며 싸워야지 다짐했습니다 더이상 잘 할 수 없을만큼 잘 이끌어오셨습니다 작은 힘이 모여 거대한 힘을 뛰어넘는 희망을 mbc를 통해 보고 싶었나봅니다 그래서 mbc 파업 가는 길 옆에서 두근 두근 마음 졸이고 가슴 설레여하며 함께 있습니다 비겁과 체념과 외면이 우리를 덮치치 않게 부디 웃으며 어려운 시간 이겨내기를 두손 모읍니다 힘내세요

  6. 2012.06.22 10:3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7. 2012.06.22 11:1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 김민식pd 2012.06.24 07:1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와우! 역시 임피디 멋진 글인데? 파업하고 가장 좋은 점은 mbc에 똑똑하고 바른 생각을 가진 후배들이 참 많구나 하는 걸 느꼈다는 거야. 바로 우리 임피디같은! 조금만 더 갑시다. 어차피 저들은 5년 뒤, 10년 뒤, 회사를 떠나고 곧 우리네 세상이 올테니까. ^^

  8. 진스 2012.06.24 23:4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대부분의 사람들은 미리 선을 그어 버리는 법이거든.  진정한 자신의 한계보다 앞에... 그 한발자국 앞에 가능성이 숨겨져 있다는 걸 눈치채지 못한채 」
    키네가 역투 하는 장면을 보고 히까리가 이렇게 말하잖아요. 공정방송을 위한 파업 이나 여러가지 문제들 속에서 한계에 부딪히실때 조금 다르긴 하지만 그 뒤에서 응원하고요 미리 선 긋지마시고요^^ 눈물을 흘리면서 역투하는 키네를 바라보는 마음으로 응원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