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나이 마흔 다섯, 주위를 둘러보면 다들 동창회에서 친구들을 만나는데, 나는 동창회에 나가지 않는다. 모임에 가면, 첫째 억지로 술을 권하는 문화가 싫고, 둘째 주식이나 부동산, 승진 얘기가 재미없고, 셋째 잘 모르는 사이인데 말을 놓는게 불편하다.
술을 마시지 않는다고 얘기하면, '종교 때문이냐?' 고 물어보고, 아니라고 하면, '죽을 병에 걸렸냐?'고 묻고, 아니라고 하면, 그냥 술을 따른다. 술은 그냥 넘어갈 수 있다. 먹기만 하면 나도 술은 꽤 하는 편이다. 술을 마시지 않겠다는 개인의 선택을 인정해주지 않는 문화가 불편할 뿐이다.
가장 불편한 것은 동창회 주소록을 보고 걸려오는 전화다. 받으면 다짜고짜 말을 놓는다. 그리고 자신을 기억하느냐고 묻는다. 난 고등학교 때 왕따였다. 학교 친구들이 준 상처를 애써 잊는데 들인 세월이 10년이다. 이제와서 내가 그들을 어떻게 기억하나? 기억을 못한다고 해도 용건은 계속된다. 식당을 열었다고, 화제집중 맛집 탐방 프로 담당 피디를 연결해 달란다. 난처한 기색을 보이면, 고등학교 동창이 어려운 데 그 정도 부탁도 못 들어주냐고 핀잔을 준다. 끝내 나는 거절한다. 그러고 전화를 끊으며 생각한다. 다음번 동창회에서는 누가 또 내 험담을 늘어놓겠구나. '고교 시절, 왕따던 놈이 MBC 피디 되었다고 아주 안하무인으로 굴더라.'
나는 피디라는 직업을 참 좋아한다. 그 이유는? 내게 자율권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드라마 연출을 하면서 늘 밤을 새도 즐거운 이유가 있다. 밤을 새워도 내가 좋아하는 배우랑 밤을 새기 때문이다. 좋아하지도 않는 배우인데, 누가 억지로 시켜서 할 수 없이 캐스팅했다고 생각해보라, 그 일이 즐겁겠나. 이건 연출의 기본이다.
다른 사람이 강권해서 캐스팅한 경우, 작품이 잘못되면, 연출은 그 배우에게 자신의 잘못을 돌리기 쉽상이다. '애초에 역할이 맞지도 않는 애를 왜 선택해서...' 그렇게 연출이 자신의 선택을 남 탓으로 돌리기 시작하면, 촬영은 순식간에 지옥이 된다.
나는 캐스팅할 때 온전히 나 혼자의 책임으로 결정한다. 그래야 흥이 나서 작품도 잘 되고, 안되어도 다른 사람을 원망할 이유가 없다.
나 자신, 다른 피디에게 캐스팅에 관련해서 부탁 받는 것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나 역시 다른 피디나 작가에게 무언가를 부탁하지 않는다. 맛집을 선택하는 것은 맛집 피디가 누리는 최고의 자율일 것이다. 그것을 내가 회사 선배라는 이유로 침해한다면, 나는 제대로 된 피디가 아니다.
나를 아는 사람은, 다행히 내 성격을 알기에 그런 부탁을 하지 않는다. 문제는 동창회 친구다. 나를 모르면서 MBC 피디라면, 그런 일은 쉽게 부탁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쩝... 결국 이런 저런 이유로 나는 중년의 사교 모임 중 최고라는 동창회는 안나가게 된다.
이건 아무래도 내 모난 성격 탓이겠지... 하고 포기하고 살았는데... 어제 여의도 희망캠프 북콘서트에 모신 신경민 선배님이 들려주신 이야기에 귀가 번쩍! 했다.
지난 대선 때, 사람들은 왜 MB를 선택했을까? 이번 총선 때, 어떤 지역의 사람들은 왜 제수를 성추행한 새누리당 후보를 선택했을까? 이것은 사람의 능력을 판단할 때, 도덕성이 가장 중요하다는 인류 고금의 진리를 집단 망각한 결과이다. 우리는 어려서 고전을 통해, 교육을 통해 배운다. 중요한 것은 도덕성이라고. 하지만 그런 진리를 지난 대선과 총선에서는 집단적으로 망각했다. 그 결과가 MB의 당선이다. 도덕성을 무시하고도 당선되었으니 MB 정권 내내 도덕성의 부패는 극에 달했다. 저축 은행 사태, 민간인 사찰, 언론 장악, 이 모든 문제의 근원이 도덕적 해이였다. 그럼에도 새누리당은 4.11 총선에서 다시 승리했다.
김재철 사장이 보인 행태 역시 마찬가지다. 언론사 사장으로서 도덕적으로 해서는 안 될 일을 했고, 그 모든 증거가 명명백백하게 드러났음에도 그는 버티고 있다. 왜? 우리 사회에서 도덕이 중요한 기준이 아니기 때문이다. 조중동에서 단 한번도 그의 도덕적 비위에 대해 다루지 않는 것이 단적인 예다.
도대체 한국 사회에서는 왜 이런 일이 반복될까? 신경민 의원은 한 마디로 잘라 말한다. 인연 사회 때문이라고. 우리가 지연 혈연 학연에 얾매인 탓이다. 도덕적으로 올바른 판단보다는, 인연에 얽매여 판단을 내리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지난 대선도, 총선도 결국 도덕성의 논리가 지역의 논리를 이기지 못했다.
고려대 학연이 아니었다면 김재철 사장이 MB와 친해질 수 있었을까? 경상도 지연이 아니라면, 도덕적으로 만신창이가 된 그를 아직도 청와대에서 비호할 수 있을까?
나는 부산에서 태어나서 경상도에서 20년을 살았다. 그런 내가 가장 싫어하는 말? '우리가 남이가?'
내가 진정으로 바라는 친구는, 내가 잘못을 해도, '우리가 남이가?'란 말로 나를 감싸주는 친구가 아니다. '니 임마, 인생 그리 살모 안되지!' 하고 나를 바로 잡아줄 친구이다.
친구가 부도덕할 때, 그를 비호하는 친구는 참된 친구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미래를 낙관한다. 도덕적으로 타락한 자들이 마지막까지 행복한 예는 없었기 때문이다. 도덕이 인류 고금의 진리로 살아남은 이유? 결국은 도덕이 인류의 생존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내 개인의 이익을 위해 공동체를 희생시키는 부도덕한 유전자만 생존했다면 인류는 벌써 멸망했을 테니까. 결국 나의 낙관은 지금 인류가 살아있다는 엄정한 현실에 근거한다.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인연보다는 도덕을 중시하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제발~^^
파업 100일 집회에 찾아온 탁현민 교수님, 어려울 때 찾아오는 친구가 진짜 친구다.
구속영장 청구 덕에 나꼼수 3인방 같은 멋진 친구들을 직접 만나게 되었다.
이제 난 더이상 동창회가 아쉽지 않다. 동창보다 멋진 동지들이 생겼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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