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짠돌이 독서 일기

세상은 좋아지고 있을까?

by 김민식pd 2020. 10. 28.

10월 9일 한글날, 저는 경기 다독다독 온라인 축제에서 주제도서인 <팩트풀니스>를 소개했습니다. 그날 아침에 고민을 했어요. 한스 로슬링이 쓴 <팩트풀니스>는 2019년에 나왔죠. 책은 세상이 갈수록 좋아지고 있다고 말해요. 그런데 2020년 코로나가 터졌어요. 팬데믹이 휩쓸고 있죠. 모든 사람의 삶이 순식간에 힘들어진 상황에서, 세상이 좋아졌다고 말할 수 있을까? 고민이더군요. 그때 우연히 둘째 민서가 읽으려고 사둔 청소년 교양서 한 권이 눈에 띄었어요. 

<검은 감자> (수전 캠벨 바톨레티 / 곽명단 / 돌베개)

책 뒤표지에 나오는 글입니다.

'1845년 아일랜드에 재앙이 덮쳤다. 하룻밤 사이에 까닭 모를 전염병이 돌아 감자가 검게 변해 버렸다. 600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에게 사실상 유일한 식량인 감자가 몽땅 썩어 버린 것이다. 그때부터 5년에 걸쳐 감자 역병은 몇 번이나 되풀이되었다. 오늘날 '아일랜드 대기근'으로 알려진 이때, 무려 100만 명이 굶주림과 질병으로 죽었고 200만 명을 웃도는 사람이 도망치듯 고국을 떠났다.'  

아니, 사람이 전염병에 걸린 것도 아니고, 감자가 병에 걸렸다고 100만 명이 죽었다고? 겨우 200년 전, 아일랜드 얘기입니다. 당시 세계에서 가장 부강한 나라 영국의 이웃인 아일랜드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는 게 믿기지 않았어요. 민서에게 양해를 구해, 제가 먼저 읽어봤어요. 당시 상황을 스케치한 펜화와 아일랜드 전래 민담을 통해 당시 상황을 재구성한 책이에요. 읽기도 쉽고, 그림도 많아 술술 넘어가지만... 그 내용은 참으로 참혹합니다. 

당시 아일랜드의 가난한 농부들은 감자와 밀을 재배했어요. 감자는 주식으로 먹었고요. 밀은 소작료로 냈어요. 부자들이 좋아하는 케잌과 빵을 만드는 재료가 밀인 거죠. 비싸게 팔 수 있기에 소작료를 밀로 낸 거죠. 아메리카 대륙에서 건너온 풍토병 때문에 감자가 시커멓게 썩어버려 먹지 못하게 되었을 때, 들판에는 밀이 자라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 밀은 다 지주에게 빼앗깁니다. 마름에게 소작료로 수확한 밀을 다 빼앗긴 아버지를 보고 딸이 한 말.

"우리 아버지 심정이 어땠을까요. 엄마 심정은요. 먹여 살릴 자식은 주렁주렁 넷이나 되는데... 감자는 몽땅 썩어 버리고, 밀은 한 줌도 안 남았으니... 그건 두말할 것도 없이 영국인 지주들이 일으킨 재앙이었어요. 그 악마 같은 자들이 아일랜드에 엄청난 저주를 내린 거라고요."

(21쪽)

감자 기근은 천재 天災 가 아니라 인재 人災라고요. 

영국과 아일랜드는 민족이 다르고 종교가 다르죠. 1534년에 영국 국왕이 로마 가톨릭교와 갈라서고 스스로 영국 국교회의 수장이 되었으니까요. 아일랜드를 정복하고 지배력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헨리 8세와 이후 신교도 국왕들은 아일랜드의 가톨릭교를 탄압합니다. 심지어 법률까지 제정해 카톨릭교도는 투표도 할 수 없고, 토지를 구입할 권한과 상속할 권한도 빼앗깁니다. 결국 감자 대기근이 일어난 1800년대에 이르자, 아일랜드의 농지는 대부분 영국인 지주의 소유가 됩니다. 땅을 갖지 못한 농군들은, 감자가 썩어버리고, 밀은 소작료로 빼앗겨버리고, 결국 굶주림에 시달리고요. 이제 역병이 찾아옵니다.

 

'영양가 높은 감자를 먹지 못한 아일랜드 사람들은 영양실조에 걸렸다. 따라서 바이러스와 세균에 대한 저항력도 떨어졌다. 아일랜드 대기근 시기에 질병으로 죽은 사람이 굶주려서 죽은 사람보다 어림잡아 열 배나 더 많다.(...)

대표적인 전염병은 발진티푸스, 재귀열, 콜레라, 이질이었다. 이런 돌림병은 대개 빈민층에서 발병해 중류층과 상류층까지 번졌다. 어린이와 노인은 특히 감염 위험성이 높았다. 숀 크롤리는 이렇게 말했다. "노약자는 오래 버티지 못했습니다. 죽음은 너무도 빨리 목숨을 요구했어요. 열병이 노인과 어린아이들을 마구 잡아간 거죠."

(133쪽)

농민 봉기를 일으켰다가 영국군에게 죽음을 당하기도 하고요. 결국 고향을 떠나 신대륙으로 이주하는 사람들의 행렬이 줄을 잇습니다. 하지만 그 역시 쉽지는 않아요. 법정 승선 인원을 초과해 사람들을 싣고 출항한 배에는 물이 모자라고요. 8주 동안 항해하면서 한 번도 식량을 배급하지 않았대요. 126명을 태우고 캐나다로 출발한 배에서 도중 사망한 승객만 42명이랍니다.    

'대기근 때문에 아일랜드 사람들은 영영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감자 대기근 이후 60년 동안 대규모 이주가 끊임없이 이어졌고, 그때마다 청년층이 이주민의 절반을 차지했다. 미국,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영국 등으로 떠난 아일랜드 대기근 이주민은 각 나라에 필요한 노동력을 채워 주었고 도시의 발전과 성장에 이바지했다. 1910년까지 조국을 영원히 떠난 아일랜드인은 500만 명에 달했다. 오늘날 아일랜드 인구는 약 400만 명으로 1845년 인구수의 절반도 채 되지 않는다.'

(241쪽) 

주권을 빼앗긴 나라의 백성의 삶이 얼마나 참혹한지 알 수 있어요. 감자 대기근은 생산수단인 땅을 소유하지 못한 농꾼의 비극이에요. 이후, 아일랜드 사람들은 영국의 지배에 저항해 싸우고요. 끝내 독립을 얻어냅니다. 조상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얻은 깨달음 덕분이지요. 

세상은 좋아지고 있을까요? 조금씩 좋아지고 있어요. 200년 전에는 사람이 병에 걸린 게 아니라 감자가 병에 걸렸다고 수백만명이 굶어죽던 시절도 있었거든요. 세상이 그냥 좋아지는 건 아니에요. 어떻게 하면 모두가 다 함께 잘 살 수 있을까? 그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고, 그런 세상을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조금씩 좋아진다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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