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9일 한글날, 저는 경기 다독다독 온라인 축제에서 주제도서인 <팩트풀니스>를 소개했습니다. 그날 아침에 고민을 했어요. 한스 로슬링이 쓴 <팩트풀니스>는 2019년에 나왔죠. 책은 세상이 갈수록 좋아지고 있다고 말해요. 그런데 2020년 코로나가 터졌어요. 팬데믹이 휩쓸고 있죠. 모든 사람의 삶이 순식간에 힘들어진 상황에서, 세상이 좋아졌다고 말할 수 있을까? 고민이더군요. 그때 우연히 둘째 민서가 읽으려고 사둔 청소년 교양서 한 권이 눈에 띄었어요. 

<검은 감자> (수전 캠벨 바톨레티 / 곽명단 / 돌베개)

책 뒤표지에 나오는 글입니다.

'1845년 아일랜드에 재앙이 덮쳤다. 하룻밤 사이에 까닭 모를 전염병이 돌아 감자가 검게 변해 버렸다. 600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에게 사실상 유일한 식량인 감자가 몽땅 썩어 버린 것이다. 그때부터 5년에 걸쳐 감자 역병은 몇 번이나 되풀이되었다. 오늘날 '아일랜드 대기근'으로 알려진 이때, 무려 100만 명이 굶주림과 질병으로 죽었고 200만 명을 웃도는 사람이 도망치듯 고국을 떠났다.'  

아니, 사람이 전염병에 걸린 것도 아니고, 감자가 병에 걸렸다고 100만 명이 죽었다고? 겨우 200년 전, 아일랜드 얘기입니다. 당시 세계에서 가장 부강한 나라 영국의 이웃인 아일랜드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는 게 믿기지 않았어요. 민서에게 양해를 구해, 제가 먼저 읽어봤어요. 당시 상황을 스케치한 펜화와 아일랜드 전래 민담을 통해 당시 상황을 재구성한 책이에요. 읽기도 쉽고, 그림도 많아 술술 넘어가지만... 그 내용은 참으로 참혹합니다. 

당시 아일랜드의 가난한 농부들은 감자와 밀을 재배했어요. 감자는 주식으로 먹었고요. 밀은 소작료로 냈어요. 부자들이 좋아하는 케잌과 빵을 만드는 재료가 밀인 거죠. 비싸게 팔 수 있기에 소작료를 밀로 낸 거죠. 아메리카 대륙에서 건너온 풍토병 때문에 감자가 시커멓게 썩어버려 먹지 못하게 되었을 때, 들판에는 밀이 자라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 밀은 다 지주에게 빼앗깁니다. 마름에게 소작료로 수확한 밀을 다 빼앗긴 아버지를 보고 딸이 한 말.

"우리 아버지 심정이 어땠을까요. 엄마 심정은요. 먹여 살릴 자식은 주렁주렁 넷이나 되는데... 감자는 몽땅 썩어 버리고, 밀은 한 줌도 안 남았으니... 그건 두말할 것도 없이 영국인 지주들이 일으킨 재앙이었어요. 그 악마 같은 자들이 아일랜드에 엄청난 저주를 내린 거라고요."

(21쪽)

감자 기근은 천재 天災 가 아니라 인재 人災라고요. 

영국과 아일랜드는 민족이 다르고 종교가 다르죠. 1534년에 영국 국왕이 로마 가톨릭교와 갈라서고 스스로 영국 국교회의 수장이 되었으니까요. 아일랜드를 정복하고 지배력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헨리 8세와 이후 신교도 국왕들은 아일랜드의 가톨릭교를 탄압합니다. 심지어 법률까지 제정해 카톨릭교도는 투표도 할 수 없고, 토지를 구입할 권한과 상속할 권한도 빼앗깁니다. 결국 감자 대기근이 일어난 1800년대에 이르자, 아일랜드의 농지는 대부분 영국인 지주의 소유가 됩니다. 땅을 갖지 못한 농군들은, 감자가 썩어버리고, 밀은 소작료로 빼앗겨버리고, 결국 굶주림에 시달리고요. 이제 역병이 찾아옵니다.

 

'영양가 높은 감자를 먹지 못한 아일랜드 사람들은 영양실조에 걸렸다. 따라서 바이러스와 세균에 대한 저항력도 떨어졌다. 아일랜드 대기근 시기에 질병으로 죽은 사람이 굶주려서 죽은 사람보다 어림잡아 열 배나 더 많다.(...)

대표적인 전염병은 발진티푸스, 재귀열, 콜레라, 이질이었다. 이런 돌림병은 대개 빈민층에서 발병해 중류층과 상류층까지 번졌다. 어린이와 노인은 특히 감염 위험성이 높았다. 숀 크롤리는 이렇게 말했다. "노약자는 오래 버티지 못했습니다. 죽음은 너무도 빨리 목숨을 요구했어요. 열병이 노인과 어린아이들을 마구 잡아간 거죠."

(133쪽)

농민 봉기를 일으켰다가 영국군에게 죽음을 당하기도 하고요. 결국 고향을 떠나 신대륙으로 이주하는 사람들의 행렬이 줄을 잇습니다. 하지만 그 역시 쉽지는 않아요. 법정 승선 인원을 초과해 사람들을 싣고 출항한 배에는 물이 모자라고요. 8주 동안 항해하면서 한 번도 식량을 배급하지 않았대요. 126명을 태우고 캐나다로 출발한 배에서 도중 사망한 승객만 42명이랍니다.    

'대기근 때문에 아일랜드 사람들은 영영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감자 대기근 이후 60년 동안 대규모 이주가 끊임없이 이어졌고, 그때마다 청년층이 이주민의 절반을 차지했다. 미국,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영국 등으로 떠난 아일랜드 대기근 이주민은 각 나라에 필요한 노동력을 채워 주었고 도시의 발전과 성장에 이바지했다. 1910년까지 조국을 영원히 떠난 아일랜드인은 500만 명에 달했다. 오늘날 아일랜드 인구는 약 400만 명으로 1845년 인구수의 절반도 채 되지 않는다.'

(241쪽) 

주권을 빼앗긴 나라의 백성의 삶이 얼마나 참혹한지 알 수 있어요. 감자 대기근은 생산수단인 땅을 소유하지 못한 농꾼의 비극이에요. 이후, 아일랜드 사람들은 영국의 지배에 저항해 싸우고요. 끝내 독립을 얻어냅니다. 조상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얻은 깨달음 덕분이지요. 

세상은 좋아지고 있을까요? 조금씩 좋아지고 있어요. 200년 전에는 사람이 병에 걸린 게 아니라 감자가 병에 걸렸다고 수백만명이 굶어죽던 시절도 있었거든요. 세상이 그냥 좋아지는 건 아니에요. 어떻게 하면 모두가 다 함께 잘 살 수 있을까? 그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고, 그런 세상을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조금씩 좋아진다고 믿습니다.

 

Posted by 김민식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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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달빛마리 2020.10.28 06:3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늘 페스트만 떠올랐지 감자 기근은 몰랐어요. 저도 점점 아이가 읽는 책에서 몰랐던 이야기를 알게 되네요. 페스트 유행 때처럼 요즘 우리도 뭉치면 죽고 흩어지면 사는 세상속에 살고 있어 씁쓸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 소중한 시간 잘 살아야지요. 오늘도 좋은 책 소개 감사합니다 :)

  2. 섭섭이짱 2020.10.28 07:3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녕하세요.

    전 다독다독 축제 생방송으로 보면서
    피디님이 이 책 얘기하신걸 들었는데
    감자때문에 100만명이나 죽었다는 사실에 깜짝 놀랬어요.

    그래서 감자 대기근 얘기를 찾아봤는데
    아일랜드 사람이 왜 그렇게 미국에
    많이 살고 있는지 이해가 가더라고요
    미국의 대통령중 22명이나 아일랜드계였고
    오바마 대통령도 어머니쪽이 아일랜드쪽이라고하니
    감자 대기근이 어떻게보면 지금의
    미국 역사를 있게한 사건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아이러니했어요

    피디님...
    그리고, 저 완전 신기한 경험했잖아요
    아일랜드 감자 얘기를 듣고
    우연히 책 검색하다가 이 책이 나온걸 보고
    깜작 놀랬잖아요.

    < 마음의 발걸음 / 리베카 솔닛 / 반비 >

    아일랜드에 대해 궁금헸는데
    그 유명한 리베카 솔닛이 아일랜드
    여행기를 쓴 책이라니... 그래서 바로 샀어요 ^^

    정말 다시한번 느끼지만 꼬북대장
    김민식 피디님 옆에 있으면
    정말 꼬리에 꼬리를 물고 독서를 하게 되는
    신기한 마법 같은 경험을 하게 되는거 같아요
    ㅋㅋㅋ

    점점 세상은 좋아지고 있으니
    지금 힘든 이 시기도 곧 종식되길 기대해봅니다.

    오늘도 좋은 책과 생각할 거리를주셔서 감사합니다.


    p.s) 김민식 작가님의 책 이야기와
    다양한 공연 있었던 다독다독 축제...
    못보신 분들은 지금 유튜브에서
    "경기도 다독다독" 검색하시면
    바로 보실 수 있습니다.

    피디님의 책 얘기 정말 재밌으니 꼭 보세요 ^^

    https://youtu.be/rOzs0JmOvfU

  3. 나겸맘 리하 2020.10.28 07:4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헬렌 켈러의 선생님인 앤 설리번 이야기를 최근에 알게 됐는데요.
    부모님이 아일랜드 대기근때 먹을 것을 찾아 미국으로 건너와
    노동자로 허드렛일을 하며 힘겹게 살아갔다고 해요.
    그 과정중에 앤 설리번도 병에 걸려 시력을 잃고요.

    곧 어머니도 죽고 아버지는 집 나가고 남동생 둘을 데리고 구빈원에 갔다가
    그곳에서 동생들마저 다 잃습니다.
    그래서 헬렌 켈러의 돌보미 교사가 되어 평생의 인연을 이어 가지만요.

    결국 그녀의 가정사가 그렇게 비참했던 원인을 따라 올라가 보면
    영국지주들이 감자병이 돌때에도 밀을 내놓지 않았기 때문이었군요. ㅜㅜ
    아일랜드 출신 이민자들 얘기만 들어도
    앞으로는 대기근과 검은감자가 저절로 떠오르겠어요.
    새로운 이야기 정말 재미나게 읽었습니다~

  4. 슬아맘 2020.10.28 08:2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감자의 전염병 ...몰랐던 내용이네요.
    아일랜드의 역사까지 ~ 나라없고 영토 없는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지는
    이야기까지. 과거에서 오늘의 현재를 보게 되네요.
    점점 더 좋아지는 세상이길 바래봅니다.
    오늘도 좋은 글 감사합니다.

  5. 꿈트리숲 2020.10.28 09:3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어제 꼬꼬독 방송에서 검은 감자 얘기하셔서
    나중에 읽어봐야겠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오늘 이렇게 글로 소개해주셔서 예습이 됩니다^^

    세계 역사와 식물 역사에서 아일랜드 대기근
    얘기는 빼놓지 않고 등장하더라고요. 감자로
    인구가 확 늘었다가 감자로 인구가 갑자기
    줄어든 아일랜드 보니까 먹거리 하나가 인구 수까지
    영향을 미친다 싶었어요.

    아일랜드 이주민들은 공업화 단계에 진입하던
    미국의 노동자로 대거 흡수되어 오늘날 미국의
    초석을 다졌다는 얘기를 책에서 봤는데요.
    세계 어느 한 나라의 문제는 그 나라의 문제로
    끝나지 않는 것 같아요. 코로나 바이러스만 봐도
    그렇고요.과거의 역사에서 오늘의 문제 해결책을
    찾아보는 것, 2020년 지금 꼭 필요한 일이라
    생각이 듭니다.

  6. namhoiryong 2020.10.28 10:4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빅토리아란 영국드람마보면서 영국의회에서
    여왕의 남편 후보가 가톨릭이라고 반대하는 장면에서
    이해가 안갔었는데 오늘 풀렸네요.
    아일랜드 대기근 이야기 잘 읽었습니다.
    우리가 좋아하는 디저트의 역사, 그 명과 암도 생각해보게 되네요. 새로운 이야기 알려주셔서 감사해요.

  7. ⓔBangin 2020.10.28 10:4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글 잘 보고 가요
    덕분에 많은 걸 배우게 되었어요^^
    시간 되시면 제 티스토리도 한 번 놀러 오세요~

  8. Atlanticanus 2020.10.28 11:0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책인 것 같네요.
    아일랜드 역사에 큰 상처를 준 사건이라, 다른 매체로도 많이 다룬 소재지요.

    책을 재미있게 읽으셨으면, 영화를 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2018년 개봉한 [블랙 47]라는 영화가 1847년 대기근으로 엉망이 된 시절의 아일랜드를 다룹니다.
    한국에서는 부산국제영화제를 통해 화제가 되어서 의외로 보신 분이 많은 편이에요.

    영화도 좋아하시니, 한번 보시고 리뷰를 올려보셔도 좋을 것 같아요.

  9. 아리아리짱 2020.10.28 15:0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김민식 피디님 아리아리!

    물질적 풍요로는 분명 옛날 보다 나아졌지만
    심적, 정신적 풍요는 나아졌는지에 대해
    잘 모르겠습니다.

    청소년 교양책인데 무척 흥미롭게 다가옵니다.

  10. 아빠관장님 2020.10.28 16:0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네~ 세상은 분명히 좋아지고 있습니다~. 그래야 합니다~. 우리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은 더욱 좋아질 거고요~.
    그런 세상 위해 전 무얼해야 하는지 고민해 봅니다~

  11. 봄처녀 2020.10.29 09:2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가난한 사람들이 점점 살기 좋아져야 좋은 세상이겠죠 그래서 그런지 잘 모르겠어요 좋아지고 있는건지.... 노력하겠습니다~~

  12. 아프리칸바이올렛 2020.10.29 15:3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진통제를 통해 전 세상이 좋아졌다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예전엔 이 통증을 다 견뎠다는 건가

    어떻게 하면 모두가 다 함께 잘 살 수 있을까?
    그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세상이 조금씩 좋아진다는
    말이 여운이 남네요

  13. 창작동화세상 2020.10.30 12:1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훌륭한 따님을 두셨네요. 부모님의 영향으로 책을 많이 즐겨 읽는 따님을 두셔서 넘 행복하시겠어요^^

  14. 보리랑 2020.11.09 13:0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일랜드와 영국의 관계가 한국 일본 관계와 비슷하다고 들었어요. 신사의 나라라는 이미지로 잘 포장해 왔지만 정말 극악무도한 지경였네요

    무자비함의 극치인 사람들도 용서해야 하나 의문을 안고 살았는데, 논어에 그런 사람들은 사람이 아니라고 용서할 필요가 없다고 해서 좀 죄책감을 내려놓았습니다

  15. 하다씨 2020.11.10 21:2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책이 나를 성찰하도록 사유하게 한다면 좋은 책이라고 할 수 있겠죠! 전 <팩트풀니스> 읽고 제 삶을 많이 반성했습니다. 정확한 근거도 없으면서 비판만 하고, 뚜렷한 주관도 없으면서 감정적이기만 한 저를요.
    감자이야기! 알고는 있었지만 또한 연결하지는 못했네요! 아는게 중요한 게 아니죠! 연결이 중요한데 생각이 옆을 보지 못하니!

  16. Glorija 2021.05.27 23:3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많은 사람들이 세상을 더 좋게하려고 노력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