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짠돌이 독서 일기

남이 차려준 밥상

by 김민식pd 2020. 10. 23.

연출하며 늘 아쉬웠던 점. TV 프로그램은 온에어 On Air되고 난 후에는 공기중에 사라져버립니다. 몇달을 밤을 새며 죽어라 만들었지만 남는 게 없어 허무한 기분이랄까요?

<구해줘 밥> (김준영 / 한겨레출판)

21년차 방송작가로 살아온 저자는 오랜 작가 생활로 누적된 피로와 스트레스로 힘들어요. 숨 쉴 틈 없이 달렸지만 남은 건 어깨 통증과 침침한 눈, 가슴에 가득한 울화밖에 없는 것 같아요.

'어딘가에 소속되고 싶어서 예술인 등록을 해보려고 했더니, 내가 TV 프로그램을 만들었다는 것을 증명하라고 했다. 근거를 찾아 온라인 세상을 헤매다가 2차 충격을 받았다. 20년 넘게 그렇게 열심히 방송을 만들어댔는데, 홈페이지에도, 프로그램 소개란에도 내 이름은 없었다. 관련 기사에도 내가 만든 프로그램의 내용은 나올지언정 답사하고 취재하고 촬영 구성하고 편집안 짜고 원고를 쓴 내 존재는 없었다. 서글펐다.'

(5쪽)

번아웃이 찾아와 무기력한 상태로 지내던 작가는 어느날 먼지 쌓인 책더미에서 <한국인의 밥상> 취재 노트를 발견해요. 4년여 동안 작가로 일하며 만난 사람들의 삶과 그 삶이 녹아 있는 음식 레시피들이 담긴 노트죠. 송이 박나물 무침, 고기 무자고 볶음, 갓김치 멸치육젓, 기억 속 음식을 하나씩 만들어보기 시작하고요. 밥상의 구원으로 다시 살아갈 힘을 찾습니다.

옛날에 경상도 상주 산골에서 어머니와 함께 농사를 짓고 사는 딸이 있었어요. 우연히 라디오 프로그램에 사연을 보냈는데, 처녀 농군의 사연이 좋았던지 방송이 나간 뒤 전국 각지에서 200여통의 편지가 쏟아졌어요. 그중에는 군대에서 불침번 서다 라디오를 듣고 편지를 보낸 군인도 있어요. 두 사람의 펜팔이 시작되고요. 그 남자는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서 나고 자라 풀죽도 못 먹고 살았기에 군대가 그렇게 좋았대요. 하루 세끼 밥도 꼬박꼬박 먹여주고 옷도 주고 하니까 걱정이 없는 거죠. 오고 가는 편지 속에 연정이 싹트고, 휴가 나가 처녀 농군의 집에 들렀다가 깜짝 놀라요. 하얀 쌀밥을 내오는 거죠. '와, 쌀밥을 먹는다니 부잣집이구나!' 여성분이 군인의 집에 인사를 가자고 합니다.

'남자는 찢어지게 가난한 집을 차마 보여줄 수가 없어서 여자를 집 근처 여관에서 기다리라고 해놓고 몰래 도망을 가려 했다고 한다. 

"충주행 버스표를 끊어놓고 몰래 버스 타러 가는 길에 딱 마주쳤어요. 한마디로 들킨 거죠. 어쩌겠어요. 어쩔 수 없이 집에 데려가 인사를 시켰죠."

형수는 여러 날 굶어서 피골이 상접했고, 조카들도 배고파 울고 난리도 아니었다고 한다.

"동네 사람들도 다 구경을 왔지요. 가난한 집에서 장가가려고 여자를 데려왔다니까 믿나요 어디?"

(125쪽)

그렇게 농군 아내와 군인 남편이 부부의 연을 맺고, 남편은 처가살이 하며 탄광에서 일을 해요. 광산이 문을 닫자 탄광에서 번 돈으로 땅을 사서 아내와 함께 누에를 키우고요. '그때 그 가난한 집을 보고 아내는 왜 도망가지 않았을까?' 작가의 물음에 아내분은 이렇게 답했답니다.

"가난한 게 뭐 문젠가요? 편지 속 남편은 성실하고 믿을 수 있는 남자였어요. 확신이 들었죠. 결혼도 내가 먼저 하자고 했는걸요. 남편이 글을 참 잘 썼어요. 편지를 읽었는데 너무 좋더라고요."

남편 : "잘 보이려고 <샘터>같은 잡지에서 글을 엄청 베꼈죠." (그렇죠. 글은 정성이죠. ^^)

라디오와 편지로 맺어진 인연이라니, 부지런한 작가님 덕분에 잊혀져가던 세월을 다시 떠올려봅니다. 방송 작가는 인생 큐레이터입니다. 수많은 사람을 만나 취재하고 그 사연을 방송으로 전하지요. 그중 진국인 사연을 모아 책으로 냈어요. 밥상을 차리며, 작가님은 다시 살아갈 힘을 얻고, 그 책을 읽으며 독자는 희망을 발견합니다.  

갑질에 시달리는 작가에게 어느 선생님이 해주신 충고가 있어요.

"일에서 뭘 구하려고 하지 마. 일은 그냥 밥벌이야, 돈 버는 일. 일 말고 다른 데서 성취를 찾든 재미를 찾든 친구를 찾든 배려를 찾든 하란 말이야."

(15쪽)

철지난 취재수첩을 다시 꺼내든 작가님 덕분에 수많은 '한국인의 밥상'을 만났어요. 어느 섬 어부의 말씀이 기억에 남아요. 

"섬에서는 어떤 음식이 제일 맛있어요?"

"남이 해주는 밥이죠."

"네...?"

"아무리 달고 맛있는 생선회도 매일 내가 잡아서 내가 회 떠서 내가 먹으려면 비리고 맛이 없어요. 남이 해줘야 맛있지. 하하~"

(184쪽)

 

언젠가 퇴직하면, 전국을 유랑다니며 남이 차려준 밥상을 찾아다닐 거예요.

노후에는 맛집 탐방기를 블로그에 올릴 날을 꿈꾸며 삽니다.

남이 차려준 밥상을 받은 오늘 하루가 선물입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