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출하며 늘 아쉬웠던 점. TV 프로그램은 온에어 On Air되고 난 후에는 공기중에 사라져버립니다. 몇달을 밤을 새며 죽어라 만들었지만 남는 게 없어 허무한 기분이랄까요?

<구해줘 밥> (김준영 / 한겨레출판)

21년차 방송작가로 살아온 저자는 오랜 작가 생활로 누적된 피로와 스트레스로 힘들어요. 숨 쉴 틈 없이 달렸지만 남은 건 어깨 통증과 침침한 눈, 가슴에 가득한 울화밖에 없는 것 같아요.

'어딘가에 소속되고 싶어서 예술인 등록을 해보려고 했더니, 내가 TV 프로그램을 만들었다는 것을 증명하라고 했다. 근거를 찾아 온라인 세상을 헤매다가 2차 충격을 받았다. 20년 넘게 그렇게 열심히 방송을 만들어댔는데, 홈페이지에도, 프로그램 소개란에도 내 이름은 없었다. 관련 기사에도 내가 만든 프로그램의 내용은 나올지언정 답사하고 취재하고 촬영 구성하고 편집안 짜고 원고를 쓴 내 존재는 없었다. 서글펐다.'

(5쪽)

번아웃이 찾아와 무기력한 상태로 지내던 작가는 어느날 먼지 쌓인 책더미에서 <한국인의 밥상> 취재 노트를 발견해요. 4년여 동안 작가로 일하며 만난 사람들의 삶과 그 삶이 녹아 있는 음식 레시피들이 담긴 노트죠. 송이 박나물 무침, 고기 무자고 볶음, 갓김치 멸치육젓, 기억 속 음식을 하나씩 만들어보기 시작하고요. 밥상의 구원으로 다시 살아갈 힘을 찾습니다.

옛날에 경상도 상주 산골에서 어머니와 함께 농사를 짓고 사는 딸이 있었어요. 우연히 라디오 프로그램에 사연을 보냈는데, 처녀 농군의 사연이 좋았던지 방송이 나간 뒤 전국 각지에서 200여통의 편지가 쏟아졌어요. 그중에는 군대에서 불침번 서다 라디오를 듣고 편지를 보낸 군인도 있어요. 두 사람의 펜팔이 시작되고요. 그 남자는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서 나고 자라 풀죽도 못 먹고 살았기에 군대가 그렇게 좋았대요. 하루 세끼 밥도 꼬박꼬박 먹여주고 옷도 주고 하니까 걱정이 없는 거죠. 오고 가는 편지 속에 연정이 싹트고, 휴가 나가 처녀 농군의 집에 들렀다가 깜짝 놀라요. 하얀 쌀밥을 내오는 거죠. '와, 쌀밥을 먹는다니 부잣집이구나!' 여성분이 군인의 집에 인사를 가자고 합니다.

'남자는 찢어지게 가난한 집을 차마 보여줄 수가 없어서 여자를 집 근처 여관에서 기다리라고 해놓고 몰래 도망을 가려 했다고 한다. 

"충주행 버스표를 끊어놓고 몰래 버스 타러 가는 길에 딱 마주쳤어요. 한마디로 들킨 거죠. 어쩌겠어요. 어쩔 수 없이 집에 데려가 인사를 시켰죠."

형수는 여러 날 굶어서 피골이 상접했고, 조카들도 배고파 울고 난리도 아니었다고 한다.

"동네 사람들도 다 구경을 왔지요. 가난한 집에서 장가가려고 여자를 데려왔다니까 믿나요 어디?"

(125쪽)

그렇게 농군 아내와 군인 남편이 부부의 연을 맺고, 남편은 처가살이 하며 탄광에서 일을 해요. 광산이 문을 닫자 탄광에서 번 돈으로 땅을 사서 아내와 함께 누에를 키우고요. '그때 그 가난한 집을 보고 아내는 왜 도망가지 않았을까?' 작가의 물음에 아내분은 이렇게 답했답니다.

"가난한 게 뭐 문젠가요? 편지 속 남편은 성실하고 믿을 수 있는 남자였어요. 확신이 들었죠. 결혼도 내가 먼저 하자고 했는걸요. 남편이 글을 참 잘 썼어요. 편지를 읽었는데 너무 좋더라고요."

남편 : "잘 보이려고 <샘터>같은 잡지에서 글을 엄청 베꼈죠." (그렇죠. 글은 정성이죠. ^^)

라디오와 편지로 맺어진 인연이라니, 부지런한 작가님 덕분에 잊혀져가던 세월을 다시 떠올려봅니다. 방송 작가는 인생 큐레이터입니다. 수많은 사람을 만나 취재하고 그 사연을 방송으로 전하지요. 그중 진국인 사연을 모아 책으로 냈어요. 밥상을 차리며, 작가님은 다시 살아갈 힘을 얻고, 그 책을 읽으며 독자는 희망을 발견합니다.  

갑질에 시달리는 작가에게 어느 선생님이 해주신 충고가 있어요.

"일에서 뭘 구하려고 하지 마. 일은 그냥 밥벌이야, 돈 버는 일. 일 말고 다른 데서 성취를 찾든 재미를 찾든 친구를 찾든 배려를 찾든 하란 말이야."

(15쪽)

철지난 취재수첩을 다시 꺼내든 작가님 덕분에 수많은 '한국인의 밥상'을 만났어요. 어느 섬 어부의 말씀이 기억에 남아요. 

"섬에서는 어떤 음식이 제일 맛있어요?"

"남이 해주는 밥이죠."

"네...?"

"아무리 달고 맛있는 생선회도 매일 내가 잡아서 내가 회 떠서 내가 먹으려면 비리고 맛이 없어요. 남이 해줘야 맛있지. 하하~"

(184쪽)

 

언젠가 퇴직하면, 전국을 유랑다니며 남이 차려준 밥상을 찾아다닐 거예요.

노후에는 맛집 탐방기를 블로그에 올릴 날을 꿈꾸며 삽니다.

남이 차려준 밥상을 받은 오늘 하루가 선물입니다.

 

Posted by 김민식pd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달빛마리 2020.10.23 07:1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 정말 오늘 글은 왜 이렇게 더 가슴에 와 닿을까요. 이ㅡ책의 작가님이 가슴의 울화를 책으로 펴내신 것에 박수를 드리고 싶어요.
    모든 가정의 엄마들도 그렇답니다. 다른 사람이 차려 준 밥이 제일 맛있어요. 아침부터 괜히 먹먹해집니다..본인 팀 일도 아닌데 누군가의 지시로 주말에도 불려나가 일을 해야하는 신랑의 뒷모습이 생각나서 그런 것 같아요. 밥벌이를 하는 모든 분들 힘내고 피디님 말씀대로 다른 곳에서는 즐거움을 찾을 수 있는 하루가 되셨으면 좋겠어요!

  2. 초록지붕 2020.10.23 07:3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남이 해준 밥이 최고죠!!! 20대중반, 님이라는 글자에 점하나만 붙이면 도로'남'이 되는 '남씨집안'의 맏며느리로 시집오셔서 칠순이 다되도록 남씨집안의 제삿밥, 친지들밥을 지어오신 엄마가 생각납니다. 음식솜씨가 좋으신 엄마덕에 저를 포함한 남씨가족들은, 그동안 명절과 제삿날 입호강하며 맛있게 먹어만왔네요. 이제 엄마께도 남이 해준 밥상을 더 많이 차려드려야겠단 생각이 드는 아침입니다!
    그나저나 '한국인의 밥상'좋아하는 프로인데...작가님의 그 소중한 노트가 책으로 엮어져나왔다니 궁금합니다^^

  3. 통로- 2020.10.23 08:0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요즘은 특히나 코로나 여파로 집에서 삼시 세끼를 챙겨먹어야 하니 남이 해준 밥이 더 그립네요!

  4. 언젠가 2020.10.23 08:1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보고 갑니다.

  5. notom 2020.10.23 08:1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글이 가슴을 울리네요

  6. 레아지나 2020.10.23 08:4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희 집은 쌀10킬로가 금세 없어져버리는 식성'갑'인 아들 둘 엄마입니다.
    저도 오늘저녁은 남이 차려준 밥을 먹고 싶어서 남편에게 외식을 하자고 했어요.
    제 분위기를 살피던 남편은 저녁 퇴근때 전화하겠노라고 말하고 나가더군요.
    먹는일이 중요하죠..하지만 삼시세끼 매일 차리는 주부들은 설겆이까지 끝내야 마무리잖아요..
    모든 주부들에게 나라에서 식기세척기12인용 무료제공을 추진하던가..해야겠어요.
    올해 5월에 식세기 이모님이 우리집에 오신 후 그나마 식사준비가 즐거워졌답니다~!!

  7. 섭섭이짱 2020.10.23 08:5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녕하세요.

    <한국인의 밥상> 보다보면 빠져드는 프로죠
    음식도 음식이지만 거기에 나오시는 분들의 사연이나
    시골 풍경이 어릴적 시골 간 기분이라 좋아요
    저런 음식 만드는곳을 어떻게 알아서 찾아가나 궁금했는데
    작가님이 직접 쓰신 책이라니... 내용이 더 궁금해지네요 ^^

    가족들 식사 준비하는게 보통 신경써야 하는게 아닌데...
    역시 뭐라해도 남이 해준 밥이 최고군요 ㅋㅋㅋ

    전국 팔도 강연 다니시며 맛집 탐방하는
    <김민식의 백반기행> 글들 함 기대해보겠습니다.
    vlog 영상도 같이요 ^^

    오늘도 좋은 책 소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8. 창작동화세상 2020.10.23 09:1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도 영양사,조리사님이 해주시는 학교급식이 제일 맛있습니다. 오늘도 뭉클한 글 읽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매일 아침 작가님 글 읽을 수 있어서 행복합니다

  9. 꿈트리숲 2020.10.23 10:1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잔잔한 영상과 맛있는 음식, 그리고
    최불암 선생님의 정겨운 멘트가 최고인
    한국인의 밥상. 남편은 이 프로야 말로
    없어지지 말고 오래도록 이어져야 한다고
    가끔 말하곤 합니다.

    전 한국인의 밥상을 보며 프로그램이라는
    밥상을 차리는 분들에 대해 생각을 종종해요.
    엄마가 밥상을 차리듯 제작진도 전국 팔도를
    다니며 장소 물색하고 출연진 섭외하고 대본까지
    작성하는 정성을 기울인다는 것을요.
    그렇게 다 차려져야 시청자가 맛있게 먹을 수가
    있는거죠.

    엄마가 주방에서 밥상을 차리는 노고는 보일지언정
    식재료 준비하느라 시장을 돌고 장바구니 들고
    무거운 걸음 옮기는 그 정성은 우리가 모르고
    자란 것 같아요. 제가 엄마가 되고 밥상을 차려보니
    비로소 보이더라고요.
    김준영 작가님이 그런 헛헛함과 공허함을 느끼지
    않으셨을까 싶습니다. 다행히 기록이 남겨져 있어서
    살아갈 힘을 다시 찾으셨다니, 기록이 새삼 위대하게
    느껴집니다. 김민식의 백반기행, 저도 기대하겠습니다~~

  10. 인대문의 2020.10.23 10:1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늘도 유익하고 재밌는 글 감사합니다^^

  11. 아리아리짱 2020.10.23 10: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김민식 피디님 아리아리!
    `남이 차려준 밥상`이
    최고 맛난 밥상이라는 말 격하게 공감 합니다. ^^

  12. 김주이 2020.10.23 11:1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연이 정말 재미있네요.
    이런 글들이 엮어진 책이라니 기대가됩니다.

    남이 차려준 밥상이 제일 맛있다는 말도 정말공감가네요^^

  13. 사처넌 2020.10.23 13:2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크으..좋은글 감사합니다 ㅎㅎ

  14. 캘리 E. 2020.10.23 13:3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남이 차려준 밥상이 최고죠! ㅋㅋ 잘 보고 갑니다.

  15. 아빠관장님 2020.10.23 13:5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너무 글이 찰지네요~!!

    오늘도 좋은 글 좋은 소개 감사합니다!

  16. p2p 순위 2020.10.23 20:4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보고 갑니다~~ ˊ◡ˋ

  17. 봄처녀 2020.10.24 09:1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 너무 재미있어요 책도 기대됩니다^^

  18. 슬아맘 2020.10.27 08:2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ㅋㅋㅋㅋㅋ 남의 해준 밥 ㅎㅎㅎㅎㅎ
    엄마가 없는 저는 엄마가 해준 밥이 제일 먹고 싶은 일순위구요.
    그래도 그 마음을 덮어주고 , 그 맛을 대신할 수 있는건
    남이 해 준 밥인거 같아요.
    단 , 식당밥은...쫌 ^^

    좋은 하루 되세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19. 보리랑 2020.11.09 13:0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남이 차리준 밥상은 김치에 김만 있어도 맛나요~~ 큰딸이 샐러드 후무스 스튜 라따뚜이 하나만 만들어줘도 밥상이 훨씬 풍성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