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짠돌이 독서 일기

존재가 죄가 되지 않는 삶

by 김민식pd 2020. 7. 20.

어려서 아버지에게 맞은 이야기를 자주 합니다. 왜 아픈 이야기를 자꾸 할까... 나이가 이제 쉰 셋이니 그 시절 민식이를 보내주고, 지금의 나로 살아도 되는데, 불쑥 불쑥 그때의 기억이 찾아옵니다. 특히나 주인공이 10대 청소년인 소설을 읽을 때 그래요. 

<유원> (백온유 / 창비)

주인공 유원은 어린 시절, 힘든 일을 겪습니다. 집에 불이 났거든요.

'화재 원인은 방화도, 전기 합선도, 가스 폭발도, 언니의 부주의도 아니었다. 화재 원인을 밝혀 낸 경찰과 소방 당국 관계자도 참사의 원인을 발표하며 한참이나 머뭇거렸다,고 기사에 나와 있다. 12층 할아버지가 피우던 담배꽁초가 11층 우리 집 베란다로 들어왔다. 불씨가 살아 있던 담배꽁초는 베란다에 있던 신문과 책을 태웠다. (...)

불은 순식간에 거실로 옮겨붙었다. 오래된 소파에, 장판, 벽지에 번져 거실은 순식간에 연기로 가득 찼다. 나를 어린이집에서 데려온 후 함께 낮잠을 자다가 일어난 언니는 무언가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금방 알아챘을 것이다.'

(38쪽)

피할 수 없는 불행이 닥쳐왔을 때, 언니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합니다.

'화재 사건 이후 언론에서는 두 명의 시민 영웅을 칭송하는 기사를 쏟아 냈다. 한 명은 죽음의 공포를 이겨 내고 현명한 판단으로 어린 동생을 살린 후 숭고한 죽음을 맞이한 십칠 세 소녀, 또 다른 한 명은 자신의 몸을 불살라 '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라는 말을 실천한 사십대 가장이었다. 

그날 아저씨는 11층에서 떨어지는 무언가를 온몸으로 받아 냈다. 불길에 휩싸인 언니가 젖은 이불에 둘둘 말아 아래로 내던진 것. 아저씨는 뇌진탕으로 의식을 잃었다. 오른쪽 다리뼈는 산산조각이 났고 오른팔은 골절상. 몸전체에 타박상과 찰과상.' 

(54쪽)

이 소설은 살아남은 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자신을 바라보는 이웃의 시선, 학교 아이들의 수근거림을 견디는 삶에 대해서요. 자신을 동정하는 시선도 싫고, 언니의 몫까지 잘 살아야한다는 부담도 견디기 힘든데요. 무엇보다 싫은 건, 다리를 절며 시도때도 없이 찾아와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손을 벌리는 아저씨입니다. 자신의 생명의 은인을 혐오하게 된 아이... 이 아이는 자신을 용서할 수 있을까요? 

어린 시절, 저는 나 자신이 무척 원망스러웠어요. 아버지는 제가 의사가 되길 원하셨어요. 성적표가 나올 때마다 "너 이 성적 가지고 의대 가겠냐?"고 하시며 매를 들었습니다. 반에서 중간 정도 하던 제가 의대를 갈 수 없다는 건, 학교 교사인 아버지가 더 잘 알면서 왜 꼭 그렇게 물었을까요? 맞다가 비명을 지르면 어머니는 고개를 돌렸고, 여동생은 눈물을 흘렸어요. 울고 불고 잘못했다고 매달리는 제게 아버지가 그러셨어요. "네가 공부만 잘하면 아무 문제 없는데, 왜 이렇게 식구들을 힘들게 하냐." 그 시절, 나는 나 자신이 참 싫었어요. 책 읽는 건 그렇게 좋은데, 수학 문제는 왜 그렇게 싫을까... 내가 수학만 잘하면, 내가 의대만 가면, 모두가 행복할 텐데, 왜 나는..... 어린 시절, 나라는 존재로 살아가는 게 쉽지는 않았어요.

자신을 살리려다 언니는 죽고, 이웃집 아저씨는 불구가 됩니다. 유원은 자신의 존재가 주는 죄책감을 견뎌낼 수 있을까요? 창비 청소년 문학상을 받은 소설인데요. <완득이> <아몬드> <페인트> 그리고 <유원>, 하나하나 다 만족스러워요. 역시 믿고 읽는 창비 청소년 문학상! 저녁 9시에 끝낸 책을 민서에게 줬더니, 아이가 밤늦게까지 책을 다 읽고서야 잠이 들었더군요. (온라인 수업 덕에 늦잠을 자도 괜찮으니 다행이에요.)   

영화 <우리들>의 윤가은 감독은 책에 대해 이렇게 말해요.

'끝난 줄 알았던 사건이 모든 불행의 씨앗이 될 때, 우리는 또다시 살아남을 수 있을까? 험난한 마음의 모험이 막바지에 도달할 때 우리는 깨닫게 된다. 이 이야기는 생애 가장 큰 용기를 내 진짜 나만의 삶을 살기로 결심한 우리 자신의 빛나는 생존기라는 것을.'

개인적으로 정혜신 선생님의 추천사가 마음에 남습니다. 

'치유란 좋은 감정을 갖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자기감정을 발견하도록 돕는 일이다. 일상의 트라우마를 통과 중인 내 곁의 수많은 '나'들에게 새살이 돋게 하는 치유의 소설 <유원>을 건넨다.'

이 책을 10대의 김민식에게 주고 싶습니다. 

나 자신을 미워하지 않는 삶, 나라는 존재를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는 삶을 꿈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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