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짠돌이 독서 일기

과학자가 쓴 범죄 스릴러

by 김민식pd 2020. 7. 13.

소설의 첫 대목, 광화문 사거리의 이순신 장군 동상에 난데없이 머리 없는 시신이 걸립니다. 심지어 강풍과 폭우를 뚫고 시신을 가져온 범인은 바로 다섯 대의 드론이에요. 곤히 자던 과학자의 전화가 울려요. 이 엽기적인 사건의 과학적 분석을 부탁한다고요. 영상을 보던 이들이 궁금해합니다.

"저걸 누가 어디서 어떻게 조종했을까요? 드론이 머뭇거리는 순간이 거의 없거든요. 그냥 바로 내리 꽂았어요."

"그렇다면 범인은 드론 비행의 달인?"

"제아무리 달인이라 해도 드론에 달린 카메라를 보면서 조종해 밧줄을 정확하게 떨어뜨릴 수는 없어요. 동상 위에서 정확한 자리를 잡기 위해 미세하게 위치 조종을 했어야 했을 겁니다. 그런데 영상에서는 그런 모습이 보이지 않았어요."

"그렇다면......"

"인공지능일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빛의 전쟁> (이종필 / 비채)  

오래전부터, '이 분, 필력이 예사롭지 않아.'하면서 지켜본 저자 가운데 이종필 교수님이 있어요. <물리학 클래식> <신의 입자를 찾아서> 등의 과학책을 저술한 입자물리학 박사님인데요. 양자역학, 한국의 근현대사,  범죄 스릴러, 전혀 다른 세 분야의 이종혼합으로 만들어낸 장편 소설을 내셨어요. 엽기적인 살인 사건을 추적하는 가운데, 다양한 과학 이론이 소개되는데요. 그중 '간'이 있어요.

 

"GAN, Generative Adversarial Network은 우리말로 하면 생성적 적대 신경망 정도가 됩니다. 최근 널리 쓰이는 인공지능 알고리즘이에요. GAN에는 두 개의 인공신경망이 있는데, 생성자라 불리는 한쪽 신경망에서는 가짜 데이터를 만들어내고 판별자라 불리는 다른 쪽 신경망에서는 그 데이터가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판별하죠. 생성자는 판별자를 속이는 게 목적이고 판별자는 가짜를 구별하는 게 목적이에요. 이 둘이 서로 경쟁한 결과 진짜 같은 가짜 데이터를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33쪽)

저는 이 대목을 읽으며 소설가와 과학자의 협업을 떠올렸어요. 과학자가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면, 작가가 이를 토대로 이야기를 만들어내기도 하고요. 작가가 상상한 도구를 발명가가 현실에서 만들어내기도 하고요. 생성자인 SF 작가가 이야기를 만들면, 판별자의 역할을 하는 과학자가 이론적으로 가능한 지 논평을 하기도 하죠.

이 소설을 읽으며 든 생각은 '이건 반칙이잖아!'였어요. 이제껏 물리학자는 소설가의 작업을 보고 과학적 검증의 잣대를 들이댔지요. 이전에 이종필 박사님은 영화 <인터스텔라>가 물리학적으로 해설하는 책 <이종필 교수의 인터스텔라>를 쓰기도 했거든요. 그런데 손수 소설을 써버리는 과학자라니, 이건 반칙이잖아요. 소설가가 과학자들에게 반격을 가한다고 양자물리학 논문을 쓸 수도 없는데 말이지요. 

'과학은 정보이고 기술은 정보를 실현시키는 능력이다. 그래서 기술에는 욕망이 투영된다. 기술은 욕망의 실현태이다. (...)

'극강의 무기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는 잘못된 질문이다. 나의 욕망, 내가 이루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가 먼저 뚜렷해야 한다. 어떤 기술의 부산물이거나 원래의 목적 달성에 실패한 기술이라도 새로운 욕망과 결합하면 전자레인지나 포스트잇 같은 '대박'을 터뜨릴 수 있다.'

(212쪽) 

맞아요. 지식이나 기술보다 중요한 건 욕망이에요.

내가 아는 것도(지식),

내가 할 수 있는 것도(기술),

자신의 욕망을 알아야 더 잘 할 수 있거든요.

과학자가 쓴 서늘한 스릴러를 통해 우리 시대의 욕망을 다시 들여다봅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