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짠돌이 독서 일기

아빠의 아빠가 되는 시간

by 김민식pd 2020. 7. 24.

서문부터 훅 치고 들어오는 책이 있어요.

<아빠의 아빠가 됐다 : 가난의 경로를 탐색하는 청년 보호자 9년의 기록> (조기현 지음 / 이매진)

'초등학생 때 아버지와 어머니는 이혼했다. 나는 아버지에게 남았고, 여동생은 어머니를 따라갔다. 사춘기가 올 무렵이었고, 집은 좁았다. 억압적으로 느껴지던 4인 가족에서 자율적인 2인이 됐다. 학교에서는 아버지와 나를 '한부모 가정'이라고 불렀다.

아버지와 나는 서로 별 애착 없이 지냈다. 간간이 밥을 같이 먹었고, 자주 싸웠다. 싸움은 매번 무승부로 끝났으므로, 우리는 평등했다. 중학생이 되면서 따로 돈을 벌었다. 아버지는 자기 일을 했고, 나는 내 아르바이트를 했다. 각자 1인분의 삶을 해내며 살아갔다. 가난한 집안이 으레 그렇듯 나눠줄 자원이 없으니 부모가 자식의 삶에 개입하는 법이 없었다. 그게 좋았다. 내 삶의 모든 걸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자유로운 인생이라고 생각했다. 

스무 살이 된 나는 꿈이 많았다. 영화감독이 되고 싶었고, 댄서가 되고 싶었고, 작가가 되고 싶었다. 영상도 춤도 글도 조금씩 건드리며 살았다. 애초에 대학은 생각도 없었다. 학교에서 하는 공부가 지독하게 싫었고, 내 형편에 학자금 대출을 받으며 다닐 자신도 없었다. 지금 당장 대학을 다니지 않아도 괜찮았지만, 미래에 격차가 생길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나를 불안하게 했다. 그럴 때면 인터넷으로 고졸이나 중졸로 학력을 마친 감독이나 댄서나 작가를 검색하며 안심했고, 나도 열심히 하기만 하면 학력이 필요 없다고 다짐했다.

뭐라도 해보려던 스무 살에 아버지가 쓰러졌다. 2011년 일이다. 그 뒤 1인분의 삶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아버지는 다시 일을 나가지 못했고, 대부분의 시간을 술에 취해 있었다. 저혈당증으로 환각에 시달리다가 또다시 쓰러졌다. 알코올성 치매 초기에 진입했다. 발등에 화상을 입었다. 그러는 동안 나는 병원에서 '보호자'로 불렸다. (...)

아버지를 버리지 않으면서, 그렇다고 아버지의 삶을 관리하는 수준에만 머물지 않으면서 내가 원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우리는 희생이나 배제 없이 더불어 살아갈 수 있을까?'

(7쪽)

나이 스물, 어린 나이일까요, 많은 나이일까요? 그 나이에 아버지의 보호자, 아빠의 아빠가 된 청년의 이야기입니다. 책을 읽으며 내내 부끄러웠어요. 몇 년 전, 아버지가 사고로 중환자실에 입원하신 적이 있어요. 하루 수술비만 천만원 가까이 나왔어요. 그나마 의료보험 처리해서 그 정도였어요. 허리를 다쳐서 전혀 움직이실 수 없었어요. 대소변을 받아내고 식사를 도와드려야하는데, 저는 자신이 없었어요. 아기 기저귀를 갈며 젖병을 물리는 건 할 수 있는데, 늙은 아버지는 도무지 자신이 없었어요. 간병인을 붙여드리고 저는 회사로 출근했어요. 입원비용이며, 돌봄비용이며, 돈이 꽤 많이 들어갔어요. 몇달 후, 퇴원하시며 아버지가 그러시더군요. "고맙다. 네가 나를 살렸다." 제가 그랬어요. "아니에요, 아버지. 제가 아니라, 돈이 효자에요. 돈이 아버지를 살렸으니까요."

사람이 아프면, 돈이 많이 들어가요. 아낄 방법이 없어요. 대학 병원에서 하루 수술비 1000만원이라고 하면, '아, 그렇군요.' 하고 내지 거기 앉아 내역을 따질 수는 없잖아요? 간병인을 구하는 것도 쉽지 않아요. 하루 24시간 거동을 못하는 환자 옆에서 수발을 드는 분인데, 흥정이 힘들지요. 중환자실에서 입원실로 옮긴다고 할 때 눈앞이 캄캄해지더라고요. 나는 회사에 가야하고, 아내도 일을 하고 아이들을 돌보는데, 어떻게 하지? 그때 같은 병실에 있던 간병인 분이 아는 동료를 소개해주시겠다고 하셨어요. 하루 일당 얼마라고 하셨는데, 와서 보고는 "아이고, 상태가 심각하셔서 돈을 더 주셔야겠는데요."했어요. 당장 일손이 필요한데 어쩌나요. 그냥 "알았습니다."하고 돈을 드렸지요.

아파보면 알아요. 을중의 을이 환자고, 그 가족이에요. 그나마 아픈 설움 덜하시라고, 아버지 병원 계시는 동안 돈으로 불편하지는 않게 해드렸어요. 평소 돈을 아끼고 모은 보람을 그때 느꼈어요. '돈이 효자로구나.' 2인 가족으로 살던 20세 청년에게 그런 일이 생겼으니,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당장 연대보증인을 구하지 못해 수술도 못 받는 대목에서는 숨이 콱 막힙니다. 

영화를 공부하는 사람답게, 저자는 힘들 때 영화에서 나름의 답을 구합니다. <먼지의 시간>이라는 영화를 보면, 주인공이 젊은 시절의 부모가 가장 힘든 순간을 찾아가 포옹을 해주는 장면이 나온대요. 과거로 돌아가는 플래시백이나 타임머신 없이 그저 울고 있는 젊은 부모에게 늙은 아들이 다가가서 꼭 안아주기만 한다고요. 너무 괴로워 술을 잔뜩 마신 날, 저자는 어린 아버지에게 편지를 씁니다. 40년이 된 어린 시절의 아버지 사진에 대고 말을 걸어요.

'네 사진을 발견하고 한참을 들여다보는데 영 어색했어. 40년쯤 지나서 네 기억이 없어진다는 사실을 누가 알았을까. (...)

내가 이제 갓 스무 살이 되거나 더 어린 너를 만나면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아직 네 삶에 결혼도 아이도 없을 텐데 말이야. 네 미래 계획을 물어볼까? 뭘 잘하느냐고. 뭘 하고 싶냐고 물어볼까? 뭘 두려워하는지 지켜볼까? 아니면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치매에 걸리니까 아예 입에도 대지 말라고 일러줄까?'

(142쪽)

책을 읽는 동안, 부끄러운 순간이 많았어요. 책을 덮을 무렵에는 조기현이라는 이름을 기억해두고 싶어졌어요. 언젠가는 조기현 감독의 영화를 만나고, 조기현 작가님의 새로운 책도 만나고 싶어요. 그보다 멋진 성장담/성공담은 없을 것 같습니다.

응원합니다, 작가님.

 

 

 

 

반응형

'짠돌이 독서 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도전하는 삶을 응원합니다.  (11) 2020.07.28
공포 영화 가이드북  (10) 2020.07.27
신간 5권, 간단한 리뷰  (11) 2020.07.22
존재가 죄가 되지 않는 삶  (16) 2020.07.20
기쁜 마음으로 뒤처지기  (13) 2020.07.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