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부터 훅 치고 들어오는 책이 있어요.

<아빠의 아빠가 됐다 : 가난의 경로를 탐색하는 청년 보호자 9년의 기록> (조기현 지음 / 이매진)

'초등학생 때 아버지와 어머니는 이혼했다. 나는 아버지에게 남았고, 여동생은 어머니를 따라갔다. 사춘기가 올 무렵이었고, 집은 좁았다. 억압적으로 느껴지던 4인 가족에서 자율적인 2인이 됐다. 학교에서는 아버지와 나를 '한부모 가정'이라고 불렀다.

아버지와 나는 서로 별 애착 없이 지냈다. 간간이 밥을 같이 먹었고, 자주 싸웠다. 싸움은 매번 무승부로 끝났으므로, 우리는 평등했다. 중학생이 되면서 따로 돈을 벌었다. 아버지는 자기 일을 했고, 나는 내 아르바이트를 했다. 각자 1인분의 삶을 해내며 살아갔다. 가난한 집안이 으레 그렇듯 나눠줄 자원이 없으니 부모가 자식의 삶에 개입하는 법이 없었다. 그게 좋았다. 내 삶의 모든 걸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자유로운 인생이라고 생각했다. 

스무 살이 된 나는 꿈이 많았다. 영화감독이 되고 싶었고, 댄서가 되고 싶었고, 작가가 되고 싶었다. 영상도 춤도 글도 조금씩 건드리며 살았다. 애초에 대학은 생각도 없었다. 학교에서 하는 공부가 지독하게 싫었고, 내 형편에 학자금 대출을 받으며 다닐 자신도 없었다. 지금 당장 대학을 다니지 않아도 괜찮았지만, 미래에 격차가 생길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나를 불안하게 했다. 그럴 때면 인터넷으로 고졸이나 중졸로 학력을 마친 감독이나 댄서나 작가를 검색하며 안심했고, 나도 열심히 하기만 하면 학력이 필요 없다고 다짐했다.

뭐라도 해보려던 스무 살에 아버지가 쓰러졌다. 2011년 일이다. 그 뒤 1인분의 삶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아버지는 다시 일을 나가지 못했고, 대부분의 시간을 술에 취해 있었다. 저혈당증으로 환각에 시달리다가 또다시 쓰러졌다. 알코올성 치매 초기에 진입했다. 발등에 화상을 입었다. 그러는 동안 나는 병원에서 '보호자'로 불렸다. (...)

아버지를 버리지 않으면서, 그렇다고 아버지의 삶을 관리하는 수준에만 머물지 않으면서 내가 원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우리는 희생이나 배제 없이 더불어 살아갈 수 있을까?'

(7쪽)

나이 스물, 어린 나이일까요, 많은 나이일까요? 그 나이에 아버지의 보호자, 아빠의 아빠가 된 청년의 이야기입니다. 책을 읽으며 내내 부끄러웠어요. 몇 년 전, 아버지가 사고로 중환자실에 입원하신 적이 있어요. 하루 수술비만 천만원 가까이 나왔어요. 그나마 의료보험 처리해서 그 정도였어요. 허리를 다쳐서 전혀 움직이실 수 없었어요. 대소변을 받아내고 식사를 도와드려야하는데, 저는 자신이 없었어요. 아기 기저귀를 갈며 젖병을 물리는 건 할 수 있는데, 늙은 아버지는 도무지 자신이 없었어요. 간병인을 붙여드리고 저는 회사로 출근했어요. 입원비용이며, 돌봄비용이며, 돈이 꽤 많이 들어갔어요. 몇달 후, 퇴원하시며 아버지가 그러시더군요. "고맙다. 네가 나를 살렸다." 제가 그랬어요. "아니에요, 아버지. 제가 아니라, 돈이 효자에요. 돈이 아버지를 살렸으니까요."

사람이 아프면, 돈이 많이 들어가요. 아낄 방법이 없어요. 대학 병원에서 하루 수술비 1000만원이라고 하면, '아, 그렇군요.' 하고 내지 거기 앉아 내역을 따질 수는 없잖아요? 간병인을 구하는 것도 쉽지 않아요. 하루 24시간 거동을 못하는 환자 옆에서 수발을 드는 분인데, 흥정이 힘들지요. 중환자실에서 입원실로 옮긴다고 할 때 눈앞이 캄캄해지더라고요. 나는 회사에 가야하고, 아내도 일을 하고 아이들을 돌보는데, 어떻게 하지? 그때 같은 병실에 있던 간병인 분이 아는 동료를 소개해주시겠다고 하셨어요. 하루 일당 얼마라고 하셨는데, 와서 보고는 "아이고, 상태가 심각하셔서 돈을 더 주셔야겠는데요."했어요. 당장 일손이 필요한데 어쩌나요. 그냥 "알았습니다."하고 돈을 드렸지요.

아파보면 알아요. 을중의 을이 환자고, 그 가족이에요. 그나마 아픈 설움 덜하시라고, 아버지 병원 계시는 동안 돈으로 불편하지는 않게 해드렸어요. 평소 돈을 아끼고 모은 보람을 그때 느꼈어요. '돈이 효자로구나.' 2인 가족으로 살던 20세 청년에게 그런 일이 생겼으니,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당장 연대보증인을 구하지 못해 수술도 못 받는 대목에서는 숨이 콱 막힙니다. 

영화를 공부하는 사람답게, 저자는 힘들 때 영화에서 나름의 답을 구합니다. <먼지의 시간>이라는 영화를 보면, 주인공이 젊은 시절의 부모가 가장 힘든 순간을 찾아가 포옹을 해주는 장면이 나온대요. 과거로 돌아가는 플래시백이나 타임머신 없이 그저 울고 있는 젊은 부모에게 늙은 아들이 다가가서 꼭 안아주기만 한다고요. 너무 괴로워 술을 잔뜩 마신 날, 저자는 어린 아버지에게 편지를 씁니다. 40년이 된 어린 시절의 아버지 사진에 대고 말을 걸어요.

'네 사진을 발견하고 한참을 들여다보는데 영 어색했어. 40년쯤 지나서 네 기억이 없어진다는 사실을 누가 알았을까. (...)

내가 이제 갓 스무 살이 되거나 더 어린 너를 만나면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아직 네 삶에 결혼도 아이도 없을 텐데 말이야. 네 미래 계획을 물어볼까? 뭘 잘하느냐고. 뭘 하고 싶냐고 물어볼까? 뭘 두려워하는지 지켜볼까? 아니면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치매에 걸리니까 아예 입에도 대지 말라고 일러줄까?'

(142쪽)

책을 읽는 동안, 부끄러운 순간이 많았어요. 책을 덮을 무렵에는 조기현이라는 이름을 기억해두고 싶어졌어요. 언젠가는 조기현 감독의 영화를 만나고, 조기현 작가님의 새로운 책도 만나고 싶어요. 그보다 멋진 성장담/성공담은 없을 것 같습니다.

응원합니다, 작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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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섭섭이짱 2020.07.24 06:2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녕하세요.

    이혼... 알코올..치매. 간병..
    아픈 가족을 돌봐야하는 상황에서 나는 어땠을지...
    상황들이 머리속에 그려지는데...
    뭔가 쓰고 싶은 말이 많지만....
    쓰지는 못하겠어요. ㅠ.ㅠ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 아침입니다.

    저도 조기현 작가이자 감독이
    잘 되길 응원합니다.
    이 책은 꼭 읽어봐야겠어요.

    피디님..
    오늘도 좋은 작가와 책 소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p.s) 작가에 대해 더 알고 싶어 찾아보니
    여러매체에 인터뷰를 했네요
    작가에 대해 더 알고 싶으신분들은 같이 읽어보세요.

    <조기현 작가 인터뷰>

    http://m.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927457.html

    https://shindonga.donga.com/3/all/13/1990808/1

    http://m.ohmynews.com/NWS_Web/Mobile/amp.aspx?CNTN_CD=A0002612513

    http://m.kmib.co.kr/view_amp.asp?arcid=0013979272

    https://univalli.com/mobile/article.html?no=23043


    <칼럼 - 요양 민주주의가 필요하다>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954255.html



    <조기현 작가 인생책>

    https://m.khan.co.kr/view.html?art_id=202002162218005

    * 개념어 사전
    * 나르시스의 꿈
    * 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
    * 불을 지피다
    * 세계사의 구조

  2. 달빛마리 2020.07.24 06:5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버지와 사연이 많은 분은 더 공감하실 것 같아요.
    저도 부끄러운 순간들이 생각나네요..
    부모님앞에서는 왜 순간 순간 이기적인 행동을 하게 될까요?

    조기현 작가님 저도 기억할게요.
    오늘도 고맙습니다 :)

  3. 보리랑 2020.07.24 07:1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책을 읽는다면 많이 울것 같아요. 젊은 시절의 아빠를 안아드렸으니, 이제 그때의 나를 안아주려 합니다. 머리는 잊었고 몸만 기억하고 있는 과거와 대면하려니 몸도 마음도 힘들어 저항이 심하네요. 딸들이 나처럼 살지 않도록 용기를 내려 합니다.

  4. 김주이 2020.07.24 07:5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
    이 책은 꼭 사서 봐야겠어요.
    저도 작가님의 삶을 응원하게되네요.

    좋은 책 소개 감사합니다.

    저도 아빠의 젊은 시절로 찾아가 꼭 안아드리고 싶네요.

  5. 꿈트리숲 2020.07.24 09:2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는 병원 생활을 좀 했던 경험이 있어서
    환자의 마음, 보호자의 마음, 간병인들의
    마음을 볼 기회가 많았어요.

    환자의 마음, 보호자의 상황, 그리고 간병인의
    삶... 뭐 하나 편한게 없는 것 같아요.
    환자는 아파서 고생, 보호자는 자신의
    일상을 반납하고 간호하는 고생, 간병인은
    돈을 받기는 하지만 가족도 아닌 타인을 돌보는 것
    녹록치않더라구요.

    보호자와 간병인의 역할을 스무살 청년에 해낸다?
    정말 쉽지 않은 무게였을 것 같아요.
    그런 중에도 삶을 포기않고 영화에서 책에서
    답을 찾으려 노력한 작가님 감사하게 생각됩니다.

    아빠의 아빠가 되어 아빠의 어린 시절을 다독여주고
    말걸어주는 용기, 젊은 작가님께 배우고 싶네요.

  6. GOODPOST 2020.07.24 09:2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pd님 말씀처럼 가슴으로 훅 들어오는 책이네요.
    청년은 어린나이에 얼마나 힘들었을까?
    내 삶을 가끔씩 불평할때,,, 부끄러운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좋은 책 감사합니다.
    저도 조기현 작가님을 응원하고 싶네요...

  7. 오달자 2020.07.24 09:4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스무살이 겪기에는 힘든 상황이겠어요.
    사실,스무살이 되기 전까지 그닥 힘든 상황을 겪지 않고 자라는 일반 사람들에 비해 조기현 작가님은 일찍 쉽지 않은 삶에 부딪쳤네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꿈을 잃지 않는 그에게 응원의 박수를 보냅니다.
    이 책....뭉클한 감동으로 다가올책이네요.

  8. 아리아리짱 2020.07.24 10:0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김민식피디님아리아리!

    자식이 아프다면 열일 제치고 달려가지만,
    부모님 편찮으실 때는 몸으로 보다 돈으로 대신하게 되더라고요!

    아빠의 아빠가 되야만 하는 청년 작가의
    삶이 안타깝습니다.
    그 힘든 가운데에서도 글을 쓰고, 영화감독을 꿈꾸는 것을 보면서
    감동했습니다.
    저도 미래의 영화감독 조기현 작가를 기억하겠습니다.

  9. namhoiryong 2020.07.24 10:2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30대가 되면서 늘 이런 상황을 염려하게 되는데 각오가 잘 서진 않더라구요.
    아버지는 몇 년 전 돌아가셨고 엄마는 이제 여든, 언제든 간병과 돌봄이 필요해질 수 있는 때.
    나는 병원비를 댈 만큼 벌 수 있을까? 엄마의 대소변을 받아낼 수 있을까..얼마나 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 끝에 눈물이 맺히지만 어떤 결의도 맺지 못하고 엄마가 그저 건강해주길 바라면서
    전화통화마다 잔소리를 얹어 엄마를 피곤하게 만듭니다.
    쉽지 않아요. 스무살, 청년이라 하기에도 어린 나이에 어떻게 그 시간을 지나 왔을지 가늠이 안되네요.
    그 과정을 글로 남기셔서 많은 이들이 위로 받고 한 줌의 힘을 내게 될거라 생각합니다.

  10. 라일락 2020.07.24 10:3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짠하네요~
    세상엔 욀키 어렵게 사는 사람들이 많은지요.
    한 사람의 인생은 한편의 대하 드라마입니다!!!

  11. 아빠관장님 2020.07.24 13:3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참.... 남일같지 않네요.
    전 28살에 그래도 사회의 맛을 어느 정도 본 후에 아빠의아빠가 되었지요. 그래도 죽도록 힘들었는데...
    20살.... 오죽했을까요.. 그럼에도 훌륭한 생각으로 이렇게 멋지게 살고 있네요. 정말 멋집니다!

  12. Laurier 2020.07.24 13:5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조기현 작가님 응원합니다!!!

  13. 에가오 2020.07.24 14:3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도 조기현 영화감독님!~조기현 작가님!~응원하겠습니다~^^

  14. 섭섭이짱 2020.07.24 17:3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찾아보니 조기현 작가와의 만남 정보가 있네요.
    장소 ; 소래포구역 근처.. "플랫폼 마중"
    일시 : 8월 8일 오후 3시

    자세한 정보는 👇👇👇 참고하세요.

    https://www.facebook.com/1394125037/posts/10217557539915721/?d=n


    조기현 작가님의 SNS 계정도 있네요.
    얼굴책 주소 👇👇👇

    https://www.facebook.com/profile.php?id=100004163467176

  15. 코코 2020.07.24 18:0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도 조기현 작가님 이름 기억해두겠습니다.
    응원합니다 !

  16. Sang A seok 2020.07.30 00:2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아...임신 출산 한 뒤에 아이를 책임지는 사람이 되어가며 많이 힘들어했어요 보호자가 된다는 것을 이렇게나 잘 해낸 저보다 어렸던 20대의 청년이 있었다니 더욱 뭉클해요. 보호자이자 자기 자신으로서의 인생이 무엇인가, 아름답게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더욱 고민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