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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짜로 즐기는 세상

아끼는 게 실력이다

by 김민식pd 2020. 7. 7.

('인생을 즐겁게 사는 비결'이라는 글을 페이스북에 공유했더니, MBC 시사교양 피디로 일하시는 박건식 선배가 댓글을 다셨어요. '이 글을 그대로 한겨레 칼럼에 기고해보세요.' 짠돌이로 사는 찌질한 이야기라 감히 신문에 쓸 생각은 없었는데요. 평소 존경하는 선배님의 조언이니, 용기를 내어 원고를 보냈습니다. 오늘자 한겨레 신문을 보는 전국의 독자들은 '방송사 피디라는 사람이 참 궁상맞게 사는구나...' 하실 거예요. 이 글에 대한 다른 반응도 있는데요. 그건 글의 끝에 붙여둡니다.)

 

둘째 딸이 중학교에 올라가자 코로나가 터져 온라인 개학을 했다. 스마트폰도 없는 아이인데, 원격 수업은 어떻게 듣지? 노트북을 사줄 형편은 안 되고, 태블릿 피씨라도 구하려고 보니 유명 브랜드 제품은 가격이 상당했다. 나중에 등교 개학하면 안 쓸 물건인데 굳이 비싼 걸 사야하나? 한참 고민하다 12만 원대 저가형 태블릿을 인터넷으로 주문했다.

온라인 개학이 며칠 앞으로 다가온 어느 날, 아내가 물었다. “그래서 당신이 주문한 태블릿 피씨는 언제 와?” 갑자기 난감하다. “음....... 그게 실은 워낙 저렴한 제품이라, 해외배송인데, 확인해보니 오는데 2주가 넘게 걸린다고.” “뭐? 당장 내일 모레 개학인데 어떻게 할 거야?” 눈물을 머금고 내 노트북을 아이에게 빌려줬다. 태블릿이 오면 아이가 “우와! 이거 내 꺼야? 고마워, 아빠!”하며 돌려줄 줄 알았다.

택배로 도착한 태블릿을 본 아내와 딸의 반응은 싸늘했다. “이거 얼마짜리라고?” “12만원.” “응, 딱 그만한 가격일 것 같아.” “아니 뭐 아이패드나 갤럭시 탭을 기대한 건 아니잖아?” “그래도 이건 너무한데? 이건 그냥 당신 써. 아이는 당신 노트북으로 계속 수업 듣고.” 딸도 옆에서 고개를 격하게 끄덕였다. 엉엉, 지켜주지 못해 미안해, 태블릿.

이러한 사연을 인터넷에 올렸더니 댓글이 달렸다. ‘아이에게 노트북을 사줄 형편은 안 되고, 라는 글을 보고 궁금해서 여쭤봅니다. 피디님은 방송사 직원이고, 부인도 커리어 우먼이고, 베스트셀러 저자라, 경제적으로 여유로우실 것 같은데 형편이 안 된다고 쓰시는 이유는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후배랑 점심을 먹으면 밥은 내가 산다. 후배가 커피를 산다고 하면 그런다. “괜찮으면 회사 휴게실에 가서 이야기를 나눠도 될까?” 그러고는 회사로 돌아와 전용 머그컵에 사무실에 비치된 녹차를 타서 마신다. “형, 제가 살 테니까 그냥 커피숍으로 가시죠?” “정 사고 싶으면 나중에 내가 퇴직하고 찾아오면 그때 밥을 사주면 된다. 밥을 굶을 수는 없지만 이렇게 하면 커피 값은 아낄 수 있잖아?” 후배는 속으로 구시렁거릴 거다. ‘저 형은 왜 저렇게 궁상맞게 살까?’

짠돌이로 사는 덕에 즐겁게 산다. 돈을 쓰지 않아도 행복한 사람은, 돈을 벌기 위해 불행을 감내할 이유가 없다. 20대에 첫 직장을 그만 둘 때나, 40대에 낙하산 사장 퇴진 운동을 할 때나,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그냥 한다. 돈 때문에 괴로움을 참고 살지는 않는다. ‘노트북을 사줄 형편은 안 되고’, 란 결국, 아낌없이 돈을 쓸 형편은 안 된다는 뜻이다.

행복의 기준은 무엇일까? 내일 당장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하루하루 살아간다. 삶의 유한성을 자각하기에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즐겁게 산다. 내일 당장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직업, 가족, 지위, 재산, 모든 것을 한 번에 잃을 수도 있다. 가진 것이 하나도 없다는 자세로 살기에 무언가 잃어버릴지 모른다는 불안이 없다. 최악을 각오하고 하루하루 살아가면 최선의 삶을 살게 된다.

나의 가장 큰 취미 중 하나가 자전거 여행이다. 나는 24년 된 자전거를 탄다. 낡은 자전거를 끌고 주말마다 춘천, 양평, 강화도 등 서울 근교 여행을 다닌다. 몇 년 전 추석에는 자전거로 서울에서 부산까지 국토종주를 한 적도 있다. <영어책 한 권 외워봤니?>가 베스트셀러에 오르고, 생각지도 못한 목돈이 들어왔을 때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자전거를 바꾸자는 유혹이었다. 꾹 참고 견뎌낸 덕에 지금도 24년 된 자전거를 타고 다닌다.

돈을 벌고 싶을 때 버는 건 실력이 아니라 운이다. 운이 좋아야 돈이 벌린다. 돈을 쓰고 싶을 때 참는 게 진짜 실력이다. 운이 좋아 들어온 돈도 안 쓰고 모아야 늘어난다. 운 좋게 큰돈이 들어왔을 때, 소비 수준을 그에 맞춰 올려버리면, 나중에 고생한다. 돈을 버는 게 실력이 아니라, 아끼는 게 실력이다.

 

(글을 본 여동생이 메시지를 보냈어요.

'오늘 오빠 글을 읽으며 순간 아빠가 보여서 흠칫했어.

같이 사는 여자는 참 싫어할 모습이야.

열심히 사는 나를, 아내가, 딸들이 왜 싫어하나 궁금해지면 참고해...'

 

아버지 흉을 보면서, 어느새 아버지를 닮아간 아들의 이야기... 네, 사는 건 이래서 참 어렵군요. ^^)


24년된 저의 애마랍니다. 전국일주를 위해 뒤에 짐받이를 달고 배낭을 맸어요. 한때는 날아다니는 스포츠카였는데, 이제는 늙은 주인을 태우고 다니는 트럭이 된 느낌? 잔 고장이 없어 열흘을 전국을 뛰어도 단 한번도 속 썩인 적이 없어요. 이런 친구 버리면, 저 벌 받습니다. 올 가을에도 또 자전거 전국일주를 떠나려고요. 같이 늙어가는 처지끼리 다정한 동행이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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