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자 한겨레 신문에 기고한 칼럼입니다.)
첫 직장에서 치과 외판 사원으로 일했는데, 방문 영업은 쉽지 않았다. 일단 문을 열고 들어서면 딱 세일즈맨 티가 났다. 치과에 웃으면서 들어가는 사람은 나밖에 없으니까. 손님이 많은 치과에 가면, 바쁘다고 귀찮아했다. 손님이 없는 치과에 가면, 오라는 손님은 안 오고 잡상인만 꼬인다고 싫어했다. 돈 벌기 쉽지 않다는 걸 뼈저리게 배웠다.
외판원으로 일하려면 두 가지 양극단의 자세가 필요했다. 하나는 ‘자뻑’이요, 또 하나는 겸손이다. 내가 파는 의료기기 제품에 대해 강한 자부심을 안고 일했다. ‘아, 이 좋은 기계를 안 쓰시다니! 이것만 있으면 시간도 벌고 돈도 벌 텐데!’ 이런 마음이 있어야 영업 뛸 때 발걸음이 가볍다. 나는 물건을 팔러 다니는 게 아니라, 바쁜 치과 원장님들을 도와드리러 다니는 거다. 자부심에는 부작용이 따를 때도 있다. 상대방이 자꾸 거절하면 좌절이 쌓이고, 강한 자부심은 격한 분노로 바뀌었다. ‘아니, 이렇게 좋은 제품을 소개해주는데 왜 만나주지도 않는 건데? 사람의 호의를 이렇게 무시해도 되는 거야?’ 자부심 강한 세일즈맨이 분노의 화신이 되는 건 순간이다.
명함에 찍힌 회사 로고를 보자마자 호통을 치는 의사도 있었다. “너네 건 안 써!” 고객과 말싸움을 하면 영업사원의 필패다. 전문가를 만나면 배우겠다는 자세로 몸을 낮춘다. ‘이 의사 선생님은 내가 모르는 뭔가를 알고 있구나.’ 공손하게 여쭤본다. “저희 제품 쓰시다 불편하신 점이 있으셨군요? 혹시 어떤 점인지 알려주시면 본사에 알려 다음 제품 개발할 때 참고하도록 하겠습니다.” 겸손한 자세로 고객의 의견을 경청하면, 신제품이 나왔을 때 주문하는 원장님도 있다.
자부심과 겸손이라는 양극단의 자세는 드라마 피디로 일할 때도 요긴했다. 배우를 캐스팅할 때, 나의 자긍심은 하늘을 찌른다. ‘정말 죽이는 대본이 하나 있는데, 내가 특별히 당신에게 기회를 한번 줄까 한다.’ 미친 자존감이 있다면, 초특급 스타에게도 섭외를 시도할 수 있다. ‘이 정도 대본이라면, 출연료를 깎아서라도 하고 싶을걸?’ 막상 촬영에 들어가서 요긴한 건, 자신감보다 겸손한 태도다. “이 좋은 대본을 잘 살리기 위해,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배우와 카메라맨과 편집기사 등 전문가의 의견을 존중하며 배우는 자세로 일한다.
방송가에서 흔히 하는 말이 있다. ‘잘나간다고 오만하지 말고, 안 나간다고 비굴하지 말라.’ 좋은 기회를 만나면 누구나 뜰 수 있다. 잘나간다고 마냥 잘나가는 것도 아니다. 막 나가다 한 방에 훅 간다. ‘무명의 신인이라도 비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톱스타라도 교만하지 않고 겸손하게.’
코로나19와 싸우는 한국 정부와 시민의 대응을 전하는 외신 보도를 보면, 내 나라 내 이웃에 대한 자부심이 차오른다. 당국 주도하에 빠르게 양산된 진단키트, 세계적 유례가 없는 드라이브스루 검사 시스템, 사재기 혼란 없는 높은 시민의식, 국경 폐쇄나 봉쇄령 없이 검역에 대처하는 정치적 역량 등 난세에 영웅이 난다더니, 감염병 세계적 유행을 맞아 한국의 활약이 돋보인다. 문득 미국이나 유럽 사람들에게 미안해진다. ‘한국인이라서 미안합니다. 이토록 작은 나라가, 높은 시민의식과 뛰어난 의료전문가의 역량에 국가의 품격까지 갖춰 여러분에게 상대적 박탈감을 안겨드려 정말 죄송합니다.’ 벅차오르는 ‘국뽕’의 감동은 여기까지다.
위기의 순간,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감이다. 이 또한 극복해내리라는 자신감.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를 상대로 과도한 자신감을 드러내는 건 만용이다.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지만, 칩거의 시대에 세상은 좁고 할 일은 없다. 이 시간을 잘 견디는 것이 진짜 능력이다. 세계적 유행이 끝나기 전에는 경계심을 늦출 수 없다. 겸손한 자세로 전문가의 조언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개인위생을 철저히 하고, 사회적 거리두기를 통해 감염의 고리를 끊자. 차오르는 자긍심을 안고 다시 겸손해져야 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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