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자 한겨레 신문에 기고한 글입니다.)
아버지는 평생을 못난 아들 걱정하며 사신다. 어려서 내 글씨는 지렁이 기어가듯 악필이었다. 아버지는 글씨를 잘 써야 먹고 사는데 지장이 없다고 하셨다. 직장에서 보고서를 다 손으로 쓰던 시절이다. 중학교 때 서예학원에 가서 펜글씨까지 배웠지만 발전이 없었다. 문과에 가면 악필이라 먹고 살기 힘들다며 아버지는 내게 공대 진학을 강요했다. 훗날 컴퓨터 덕분에 글을 쓰는 게 아들의 취미이자 부업이 되는 날이 올 줄은 꿈에도 모르셨다.
이명박 정부 시절, 문화방송 노조 부위원장이 되었을 때, 아버지가 염려하실까봐 사실을 숨겼다. 하필 검찰이 나를 업무방해로 고발하고, 경찰에서 출석 요구서를 집으로 보내는 바람에 들통이 났다. 회사에서 힘든 시간을 보낼 때, 아버지는 혀를 차셨다. “나이 50에 회사에서 징계나 받고 뭐하는 짓이냐. 그러게 노조는 뭐 하러 해서 이 고생이야.” 방송사가 언론장악의 제물이 되고, 피디들의 제작 자율성이 침해받을 때, 내가 찾은 답은 노동조합을 중심으로 함께 싸우는 것이었다. 내가 찾은 답이 아버지에게는 문제였다.
정부가 바뀌고 회사 사정이 좋아져서 아버지 근심은 덜었다고 생각했는데, 요즘도 아들 걱정에 수심이 깊다. 아버지의 평생 취미는 바둑이다. 노인복지관에 가서 바둑을 두며 하루를 보낸다. 아버지는 나만 보면 한숨을 짓는다. “너는 바둑을 둘 줄 모르니, 나중에 늙어서 어떻게 시간을 보낼래.” 그런 아버지의 삶에 뜻하지 않은 문제가 닥쳤다. 바로 코로나다.
바이러스 감염을 막기 위해 노인복지관이 한 달 가까이 문을 닫았다. 갈 곳이 사라지자, 만날 사람도 없어지고, 하루를 사는 낙이 사라졌다. 10년 전, 아버지에게 구청문화센터에서 하는 컴퓨터 수업을 권했다. 아버지는 고개를 흔드셨다. “이 나이에 살면 얼마나 더 산다고 그런 걸 배우냐.” 코로나 사태가 터진 후, 아버지가 한숨을 쉬셨다. “그때 컴퓨터를 배워뒀으면, 지금 같은 때 집에서 온라인으로 바둑을 두면 될 텐데.” ‘지금도 늦지 않았어요, 아버지.’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오지만 참는다. 아버지는 남의 충고를 듣는 사람이 아니다. 언제나 당신이 옳으니까.
나는 새벽에 일어나 출근 전 컴퓨터로 매일 글을 쓴다. 주말에는 스마트폰으로 다른 사람이 올린 글을 읽고 공감을 누른다. 스마트폰을 끼고 사는 나를 보고 아버지는 늘 걱정이다. “스마트폰 중독이 너의 큰 문제다. 그거 들여다볼 시간에 차라리 바둑을 배워라. 노후대비는 취미가 중요하다.”
코로나 탓에 즐겨가는 동네 도서관이 휴관을 했다. 요즘 나는 스마트폰 전자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읽는다. 극장 나들이가 쉽지 않아 온라인 플랫폼으로 영화를 본다. 대화 공부 모임이 있는데, 직접 만나는 대신 스마트폰 앱을 이용해 화상통화로 모인다. 코로나의 시대, 스마트폰으로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친구를 만난다. 아버지가 생각하는 나의 문제가, 내가 찾은 답이다.
‘워라밸’이라는 단어를 처음 들었을 때, 나는 이해하지 못했다. ‘일과 삶의 균형이라니, 그 둘이 분리 가능한 것인가?’ 저출산, 욜로, 소확행 같은 단어도 너무 낯설었다. 한때 한겨레신문에 육아일기를 연재한 적도 있지만, 아이 없는 삶은 상상 할 수도 없다. 현재를 즐기는 것보다 중요한 건 노후대비라고 믿는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깨달았다. 아버지가 생각하는 나의 문제는, 내가 찾아낸 답이었다. 어쩌면 워라밸, 저출산, 소확행도 마찬가지 아닐까? 젊은 세대가 찾아낸 답을 나는 문제라고 생각하는 게 아닐까?
<소득의 미래>라는 책을 보면 일자리가 사라지는 미래에 소득의 대안은 기본소득이라고 한다. 4차 산업혁명이 가져올 충격을 완화하기 위해 기본소득 제도를 도입하자고 하면 “일하지 않고 돈을 받는 건, 노동 의욕을 저하시키는 문제가 될 거야.”라고 하는 이들도 있다. 코로나로 인해 재난 기본소득 논의가 다시 활발해지고 있다. 이번 일을 기회로 일자리의 미래도 함께 고민해봤으면 좋겠다. 위기의 시대에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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