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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짜로 즐기는 세상

개인이 존중되는 조직을 위하여

by 김민식pd 2020. 3. 7.

(주말 오후, 지인이 보내온 카톡을 보고 깜짝 놀랐어요. 이런 글이 신문에 났군요. 반가운 마음에 공유합니다. 고맙습니다!)

MBC의 한 PD가 낸 신간을 읽다 옛 생각이 들었다. MBC 입사 과정을 추억하며 회사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는 대목에 울림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과 달리 예전은 이렇게 좋았다’는 증언의 대부분은 ‘라떼’가 꼰대의 밈(meme)으로 통하듯 과장된 미화나 부질없는 회고에 그칠 때가 많다. 하지만 이 책에서 들려주는 이야기들은 ‘라떼’와는 거리가 멀었다. 다른 어떤 감정보다 공감과 응원의 마음이 앞섰다. 그가 지목한 시기의 MBC를 일부나마 경험했던 탓일지 모른다.

축구 선수 출신도 아닌 내가 축구 해설자의 길에 접어든 것은 여러 우연이 겹친 결과였다. 2000년 9월, 지금은 사라진 SBS 축구채널에서 1년을 보낸 뒤, 2001년 9월부터 MBC 마이크를 잡았다. 그 사이 스포츠 신문 기자로 채용되긴 했지만 여전히 어린 나이였고, 축구와 관련된 별다른 커리어가 없던 처지라 오해를 많이 받았다. MBC 간부 중에 친인척이 있느냐는, 농담과 취조 사이쯤 놓인 질문도 꽤나 받았던 것 같다. 오죽하면 나 역시 내가 모르는 지인이 고위층에 있는 것일지 궁금해했을까.

 

한 해, 두 해 일을 하면서 알게 된 것은, 여긴 그런 곳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관료적이거나 고압적이지 않은 분위기 속에서 직업인으로의 정체성을 가질 수 있던 시기였다. 어느덧 19년이 흘렀고, 그 사이 MBC는 많은 일을 겪었다. 특히 2012년과 2017년의 파업은 여전히 그 후유증이 가시지 않을 만큼 강력하고 또 치명적인 것이었다. MBC 직원이 아닌 나 같은 사람에게도 그 여파가 느껴질 만큼 많은 다툼이 있었으며 위치와 진영을 막론하고 참 많은 사람들이 떠났고, 남은 이들의 몸과 마음엔 병이 들었다. 흔들기 시작했던 외부의 누군가는 힘을 잃고 사라졌지만, 내부엔 여전히 잔영이 남아 있다. 가장 안타까운 것은 조직과 인간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린 사람들이 늘어났다는 사실이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또 받으며 멀어졌다. 서로의 관계를 단절하고 구획을 나누는 모습은, 지켜보는 이들에게도 상흔을 남겼다.

김민식 PD의 ‘나는 질 때마다 이기는 법을 배웠다’는 범상치 않은 결기로 많은 것을 이뤄 낸 한 인물의 자기 고백을 담고 있다. 서문을 통해 자신의 정체를 겸손하게 드러낸 작가는, 어느덧 50을 넘은 인물이 어린 시절의 솔직함과 실행력을 지금까지 간직할 수 있게 해 준 회사의 소중함을 책 곳곳에 풀어 놓고 있다. 신입 PD 시절의 반짝이지만 엉성했던 시도를 면박주는 대신 세심하게 독려하던 선배의 존재나, 병상에 누워서도 회사에 대한 애정과 사회적 책무를 잊지 않던 동기의 이야기들은 회사라는 조직이 우리 삶에 단지 ‘일터’ 이상의 의미일 수 있다는 것을 일깨워 준다.

모두가 미디어인 시대, 대개의 레거시 미디어들이 비슷한 위기에 놓여 있다. 혁신과 변화를 꿈꾸지만, 노화되고 정치화된 조직은 생각만큼 민첩하지 않다. 세상은 어느 누구의 관측보다 빠르게 변하고 있다. 그 현란한 물결에 휩쓸리거나 좌초하지 않기 위한 방법은 어쩌면 아직 많은 이들이 기억하는 과거의 한 시절을 모티브로 삼는 것에 있을지 모른다. 숫자에 의지하기보다는 스스로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에 집중하는 것, 개개인의 이익이나 외부 유력자의 쓸모에 이용되지 않는 조직, 서로가 서로에게 믿고 마음을 건넬 수 있는, 각자의 생각과 신념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이 미덕이 되는 문화의 재현.

대중이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듣기 위해 더 이상 매스 미디어에 의존하지 않는 시대다. 매스의 출발이 개인이라는 명제는 이렇게 순환한다. 내부에서 들리는 소리에 귀기울이는 것이야말로 대중을 향해 목소리를 내야 하는 미디어들에 가장 중요한 일인지 모른다.

서형욱 풋볼리스트 대표·축구해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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