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짠돌이 독서 일기/꼬리에 꼬리를 무는 독서

좌절의 기술이 필요한 순간

by 김민식pd 2020. 5. 13.

2003년 10월 31일 베서니 해밀턴은 서핑을 나갔어요. 잔잔한 바다에서 파도를 기다리며, 오른손으로 보드를 잡고 왼팔은 물속에서 흔들거리고 있었어요. 그때 회색 물체가 불쑥 나타납니다. 상어가 소녀의 왼팔을 팔꿈치 아래까지 물어뜯어요. 부상이 너무 심각한 탓에 오히려 통증을 느끼지도 않고 해밀턴은 침착하게 남은 한 팔로 물을 저어 해변으로 돌아갑니다. 동료 서퍼들의 도움을 받아 병원으로 실려 가지만, 병원 도착 당시 혈액의 60퍼센트 정도 잃어 치사량에 가까운 지경이었답니다.
어려서 서핑을 시작한 베서니는 열세 살 무렵에 이미 각종 서핑 대회에 나가 열 개도 넘는 트로피를 받았어요. 프로 서핑 선수가 되는 게 소녀의 꿈이었습니다. 병원에서 회복하면서 베서니는 고민을 합니다. ‘이제 꿈을 축구선수로 바꿔야 하나?’ ‘서핑은 파도 위에서 균형을 잘 잡아야 하잖아요. 두 팔이 필수일 거예요. 어린 소녀가 얼마나 큰 좌절을 느꼈을까요. 일상 생활도 고민입니다. ‘한 손만 가지고 어떻게 옷의 단추를 채우고 신발 끈을 묶지?’ 단추가 없는 옷과 끈을 묶을 필요가 없는 신발을 사니까 고민이 해결됩니다. 일상의 작은 과제를 해결한 베서니는 이제 더 큰 과제에 도전합니다. 한 팔로 서핑하기죠.
사고가 발생하고 불과 26일밖에 지나지 않은 날, 시험 삼아 서핑을 나가고요. 한 손으로 노를 젓고, 한 손으로 보드를 짚고 일어나 균형을 잡는 것도 가능하다는 걸 깨달아요. 다시는 서핑을 할 수 없을 것 같아 불안했던 마음을 지우고 다시 연습을 시작하고요. 2년 뒤 전미선수권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합니다. 상어의 공격을 받아 한쪽 팔을 잃고도 다시 서핑을 시작한 소녀의 이야기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요. <오프라 윈프리 쇼>같은 TV쇼에 나가 화제의 인물이 되지요. 인생에 좌절이 찾아올 때 우리에게는 역경을 극복하는 기술이 필요합니다.

<좌절의 기술> (윌리엄 어빈 지음 / 석기용 옮김 / 어크로스) 

이 책은 2000년 전 스토아 철학자들의 가르침을 엮은 책입니다. 당시 그들은 전쟁과 재난으로 좌절을 겪는 동시대 사람들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 “인생이 우리에게 건네는 좌절이라는 레몬을 (달콤한) 레모네이드로 바꿔주는” 전략을 제시했어요. 스토아학파는 이렇게 가르칩니다. ‘인생에서 좌절은 피할 수 없고 좌절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만을 바꿀 수 있다’고.

아그리파누스라는 스토아 철학자는 기원전 67년경, 공개적으로 로마 네로 황제를 비판했다가 곤경에 처했어요. 전령이 찾아와 원로원에서 재판이 진행 중이라고 전합니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일이 잘 처리되기를 부디 희망하네. 하지만 지금은 운동을 하고 씻을 시간이니, 내가 지금 해야 할 일은 바로 그것일세.” 뒤이어 또 다른 전령이 나타나 그의 반역 행위에 대해 유죄가 인정되어 처벌이 내려졌다는 소식을 전했다. “추방인가 처형인가?” 그가 물었다. “추방입니다.” 전령이 답했다. 아그리파누스는 이런 질문으로 응수했다. “아리키아에 있는 내 별장은 몰수되었는가?” 전령이 대답했다. “아닙니다.” 그러자 아그리파누스가 말했다. “그러면 그리로 가서 저녁을 먹어야겠군.”

(69쪽)


아그리파누스가 좌절을 대하는 태도, 대단하지 않아요? 이게 스토아학파가 말하는 좌절을 상대하는 기술입니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면 절망하거나 분노합니다. 그런데 화를 낸다고 바뀌지 않는 일들이 많아요. 고대 스토아 철학자들은 시련이 오면, 최악의 상황을 상상하고, 현재 상황이 그에 비해서는 나쁘지 않다고 결론을 내렸어요. 처형당한 것 보다는 유배가 낫고, 기왕에 유배를 간다면, 내가 좋아하는 별장에 가서 맛난 저녁을 먹는 편이 낫다는 거죠. 이게 바로 ‘부정적 시각화’로서 좌절을 상대하는 기술 중 가장 탁월한 스토아의 심리 도구입니다. 좌절에 직면했을 때, ‘운명이 나의 회복탄력성을 시험하기 위해 과제를 고안해냈구나!’ 하고 생각하면 어떨까요? 야단법석을 떨어도 상황이 나아지지 않는다면, 그 순간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최선의 대안을 선택하고 인생을 계속 살아가는 것이지요.

서핑을 즐기던 베서니가 상어에게 물렸을 때, 소녀는 상어와 맞서 싸우거나 당황하지 않아요. 침착하게 남은 한 팔로 노를 저어 해변으로 갑니다. 그 덕분에 살았어요. 비록 한 팔을 잃었지만, 죽는 것보다는 낫잖아요. 다시 서핑 보드를 들고 바다로 갑니다. 어려서부터 10년 가까지 서핑을 했지만 상어에게 물린 건 한번이잖아요. 10년 동안 매일 즐거웠잖아요? 한 번의 사고로 평생의 즐거움을 포기할 순 없는 거죠. 저는 베서니도 베서니지만, 그 아버지도 참 대단하다 싶어요. 자기가 누워있던 수술대에 딸이 실려 온 걸 보면 화를 낼 수도 있잖아요. “아, 그러게 왜 위험한 서핑을 하고 그래!” 심지어 나중에 다시 바다로 나가는 딸을 말리지도 않아요. “너 죽으려고 그래?” 대신 아빠는 딸이 죽지 않아 다행이다, 그래도 서핑을 포기하지 않아 다행이라고 느꼈겠지요. 그 덕분에 딸은 장애를 이겨낸 프로 스포츠 선수로서 자신의 꿈을 펼칠 수 있게 되고요. ‘내가 그 부모라면 이런 자세가 가능할까?’ 어쩜 우리는 아이들을 고난과 시련으로부터 보호하려다 아이들이 위대해질 수 있는 기회조차 막는 게 아닐까요? 사람이 위대해 질 수 있는 기회는 시련과 함께 찾아오거든요. 

환경오염을 막기 위해 매일 2시간 동안 힘들게 자전거로 출퇴근하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봐요.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환경을 지키는 건 좋은 일이죠. 어느 비오는 날 자전거를 타고 가는데 뒤에서 어떤 자가용이 빵빵 거리더니, 쌩하고 옆을 지나치며 흙탕물을 튀기고 갑니다. 갑자기 분노가 치솟지요. ‘아니 저 이기적인 인간이 석유 소비로 지구를 망가뜨리네?’ 
자, 여기엔 또 다른 이야기가 있어요. 어떤 사람이 출근하며 보니 옆집 할머니가 현관 계단에 쓰러져있어요. 평소에는 대중교통을 이용하지만, 그날은 할머니를 차에 태우고 급하게 병원으로 달려갑니다. 어느 좁은 길에 자전거가 길을 막고 가고 있어요. 뒤에서 빵빵거려도 비켜주지도 않고요. ‘지금 사람이 다쳤는데 저 인간은 한가하게 자전거를 타네?’ 쌩하니 지나갑니다. 

스토아 철학자인 세네카는 이런 말을 했어요. 

“우리는 나쁜 사람들 사이에서 살고 있는 나쁜 사람들이다. 그리고 오직 한 가지만이 우리를 안정시킬 수 있다. 즉 우리가 서로에게 너그러이 대하기로 동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30쪽)

스스로를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기는 쉽지 않지요. 하지만 나를 좋은 사람이라고 굳게 믿으면 오히려 화가 나는 경우가 있어요. 우린 그냥 다 자기 입장만 알고 상대방이 처한 상황은 모르는 타인이에요. 그러니 서로에게 너그러이 대하라는 세네카의 말을 다시 한 번 새겨봅니다. 

2000년 전 스토아학파는 이미 간파했습니다. 인생에서 좌절은 상수라는 것을. 피하려고 애써봤자 소용없어요. 지금 이 순간, 이곳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내는 것, 그 안에 좌절의 기술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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