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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짜로 즐기는 세상/2017 MBC 파업일지

부디 자중자애하시라

by 김민식pd 2020. 2. 18.

(오늘자 한겨레 신문에 기고한 글입니다.)

 

어느 날 출근길에 휴대폰에 낯선 번호가 떴다. 병원 응급실에 아버지가 실려 오셨다고. 아침 산책 나가셨는데 웬 날벼락인가. 병원에 달려가니 팔순의 아버지가 피투성이가 되어 누워 있었다. 아파트 정원에 열린 대추를 따겠다고 나무에 오르셨다가 가지가 부러지는 바람에 떨어졌단다. 척추에 금이 가고 부러진 갈비뼈가 폐를 찔러 출혈이 심했다. 몇 달 간 병원 신세를 진 끝에 간신히 건강을 회복하셨다. 중환자실에 누워 사경을 헤매는 아버지를 보고 의문이 꼬리를 이었다. ‘팔순의 나이에 나무는 대체 왜 오르신 걸까?’ ‘대추나무 가지는 어쩌다 부러졌을까?’ 어느 날 아파트 승강기에 붙은 공고문을 봤다.

‘지하 주차장이 있어 아파트 마당의 표토층은 3미터에 불과합니다. 나무가 깊이 뿌리 내릴 수 없어 보기보다 연약합니다. 태풍이 오면 가지가 부러져 인명 사고나 차량 피해가 생겨 가지치기를 통해 사고를 예방하고자 합니다. 전지 작업으로 인한 불편함에 대해 미리 양해를 구합니다.’

아버지는 어린 시절 시골에서 나고 자랐다. 그 시절에는 산에 올라 감나무도 타고 잣나무도 탔을 것이다. 감을 따다 땅에 떨어져도 훌훌 털고 일어났을 것이다. 산에서 자라는 나무와 아파트 정원에서 자라는 나무가 다르고, 어린 시절의 몸과 팔순 노인의 신체가 다르다. 오르면 나무의 가지가 부러지고, 떨어지면 노인의 뼈가 부러진다. 세상의 변화를 모르고, 신체의 변화를 모르는 게 이렇게 위험하다.

인류는 수 만년 동안 수렵 채집 생활을 했다. 먹을 게 귀한 시절에는 열매가 눈에 띄면 위험을 무릅쓰고 나무에 오른 이가 생존에 유리했을 것이다. 수 천 년 동안 농경 생활을 할 때는 성실한 태도가 중요했다. 때가 되면 씨를 뿌리고 곡식을 거둬야 한다. 게으름을 피우다 때를 놓치면 생존과 번식이 어려워진다. 지난 수 십 년 동안 산업화 시대에도 근면 성실함이 보상을 받았다. 그 시절 우리는 ‘나는 할 수 있다’는 걸 믿었다. ‘너도 공부 잘 할 수 있다.’ ‘우리도 잘 살 수 있다.’

이제 세상이 바뀌었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예전만큼 안 되는 시대가 왔다. 경제가 지수함수를 그리며 끝없이 성장하면 자원 고갈과 함께 환경 파괴가 찾아온다. 개발도상국가가 선진국 대열에 합류하는 순간, 성장의 곡선은 무뎌질 수밖에 없다. 이제는 호흡을 다스리고 전열을 가다듬어야 한다. 저성장 시대가 왔는데도 ‘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달리면, 뜻대로 되지 않는 순간, 좌절과 분노가 찾아온다. 노력이 좌절이라는 부메랑으로 돌아올 때 우리는 분노의 함정에 빠져든다.

MBC 선배님들 중 4월 총선에 나서는 분들이 있다. 이명박 정부 시절, MBC 사장으로, 홍보국장으로 일하며 방송장악에 부역한 탓에 그 시절 회사의 경쟁력을 갉아먹고 MBC의 신뢰도를 추락시킨 분들이다. 김재철 전 사장은 조합원들을 취재·제작 현장에서 배제하고 노조 탈퇴를 유도했다가 노조법 위반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고 징역형이 선고됐다. 2012년 MBC 170일 파업 당시 김재철의 대변인 역할을 했던 이진숙 전 홍보국장은 "건강한 자유 우파와 보수의 가치를 재건하는 데 힘을 쏟겠다"며 자유한국당 예비 후보에 나섰다. 언론의 자유를 탄압하고, 공영 방송을 망가뜨린 분이 건강한 자유 우파와 보수의 가치를 논하시니 당황스럽다. 정치부 기자로 살며 평생 권력을 탐했던 이들이니 노후에도 그 습성을 버리지 못할 것이라 짐작은 했지만, 안타까운 마음은 금할 길이 없다.

살던 방식대로 사는 게 가장 위험하다. 열심히 한다고 다 되는 시대가 아니다. 세상도 바뀌고 사람도 변했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며 덤빌 게 아니라,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않는 지혜를 실천해야 할 때다. 언론을 향한 불신은 왜 생겼는지, 권력을 향한 자신의 열망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 차분히 돌아보며 노후를 보내시기 바란다. 선배님들, 부디 자중자애하시라.

 

 

 

(왼쪽부터, 이진숙, 이용마, 정영하 당시 노조위원장, 그리고 나)

2012년 MBC 파업 당시, 김재철 당시 사장의 해임을 촉구하는 방문진 앞 파업 집회 현장에서 두 명의 홍보국장이 만나 대치했다. 김재철 사장의 호위무사였던 이진숙 홍보 국장과 이용마 당시 노조 홍보국장.

그 싸움의 결과 이용마는 해고되어 쫓겨났고, 이진숙 선배는 보도본부장이 되고 지역 MBC 사장이 됐다.

 

이용마는 떠났지만, 나는 기억한다.

기억하는 자로서, 나는 기록한다.

이것이 살아남은 자의 책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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