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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짜로 즐기는 세상/2017 MBC 파업일지

딴따라는 어쩌다 투사가 되었나?

by 김민식pd 2020. 2. 21.

(오늘 글은 좀 깁니다...)

국립암센터에 입원한 이용마 기자를 봤을 때, 몇 년 전 세상을 떠난 후배가 떠올랐다. 이용마처럼 책임감이 투철한 친구였다. 대학 신입생 시절 교정을 지나가다 나의 권유로 동아리에 들어온 후배였다. 군 복무 후 취업 준비하느라 동기들이 동아리 활동에서 빠졌을 때, 혼자 후배들 스터디를 챙긴 친구였다. 훗날 대기업을 다니며 그룹 메일 시스템 개발을 맡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가뜩이나 책임감 강한 녀석이 중책을 맡았으니 얼마나 열심히 할까싶었다. 30대 중반이 넘도록 결혼도 미루고 일만 했다. 바빠서 건강검진 챙길 여유도 없다던 후배가 어느 날 피로가 너무 오래 간다며 병원을 찾았다가 간암 말기 진단을 받았다.

시골에 계신 늙은 아버지에게 아들 병수발을 맡길 순 없다며 후배는 혼자 지냈다. 퇴원한 후 자취방에서 지내던 후배는 상태가 나빠지자 호텔방으로 거처를 옮겼다. 자취방에서는 무슨 일이 생겨도 챙겨줄 사람이 없지만, 호텔에는 적어도 하루 한 번 방을 청소하는 직원이 있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 같이 지내자고 불렀다. 마침 아내는 미국 유학 중이었다.

“내가 밥도 잘 못 하고, 집 청소도 잘 안 하지만, 나랑 지내는 동안 심심하지는 않을 거야.”

나는 예능 피디로서 천성이 딴따라라 노는 걸 좋아하고 사람을 웃기는 걸 즐긴다. 집으로 동아리 후배들을 불러 모아 보드게임을 하고 하루하루 재미나게 놀았다.

자고 일어나면 아침마다 후배가 지내던 방에서 신음이 들렸다. 키가 크고 체격이 좋은 친구였는데 몇 달 사이에 살이 많이 빠졌다. 등에 뼈가 앙상하게 드러나, 자는 동안 바닥에 눌린 부위가 다 쑤시고 결렸다. 아침마다 후배의 등을 주무르며 근육을 풀어줬는데, 뼈만 남은 후배의 몸은 너무 애처로웠다. 어느 날 내가 회사에 출근한 사이에 후배는 직접 구급차를 불러 병원에 갔고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2017년 봄 휴대전화에 문자 메시지가 떴다. 암 진단을 받고 시골서 요양하던 이용마가 국립암센터에 입원했다는 내용이었다. 병실에서 만난 이용마는 후배가 세상을 떠나기 몇 달 전 모습과 똑같았다. 얼굴에는 광대뼈가 선명하게 드러났고 복수가 차오른 배에는 호스가 꽂혀 있었다. 복수를 몇 리터씩이나 뽑아냈는데 아직도 계속 나온다는 말에 그 후배가 떠올랐다.

간암 진단을 받고 병원에서 치료를 받던 동아리 후배가 퇴원한 날, 물어봤다.

“지금 이 순간, 가장 하고 싶은 게 뭐야?”

“왜요. 형이 내 소원 들어주게?”

“병원에 있는 동안 먹고 싶거나 하고 싶은 거 없었어?”

그러자 후배는 뜬금없는 농담을 했다.

“박나림 아나운서랑 밥 한 번 먹고 싶어요.”

몇 년 전, 당시 MBC에 《뉴스데스크》 앵커로 일하던 박나림 아나운서를 좋아한다던 후배에게 내 입사 동기라고 자랑한 적이 있었다.

“그럼 형한테 부탁하면 만날 수도 있는 거야?”

술김에 “나중에 나림이한테 한번 물어보지, 뭐” 하고 호기롭게 답했다. 그런데 시한부 판정을 받은 후배에게 이번에도 ‘나중에’라고 답을 할 수는 없었다.

다음 날 아나운서국 사무실로 찾아갔다. 입사 동기긴 했지만 터놓고 지내는 사이는 아니라 어렵게 말을 꺼냈다. “나림아, 내 후배가 너랑 밥 한 번 먹는 게 소원이라는데 혹시 시간 좀 내줄 수 있니? 소개팅 같은 건 아니고, 그냥 팬 미팅 같은 자리?” 그 후배가 암 말기 환자라는 말은 차마 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거절하기 어려울 수 있을 테니까. 안 나온다고 해도 마음이 무거울 것이고.

“남에게 신세 지는 걸 싫어하는 사람이 별난 부탁을 다 하네?” 하며 의아해하던 박나림 아나운서는 선선하게 그러겠다고 했다. 퇴근 후, 여의도 식당에서 셋이 만났다. 그 시절 후배는 병색이 크게 드러나진 않았다. 키 크고 훤칠한 후배가 박나림 아나운서 앞에서 쩔쩔 매는 모습이 재미있어 계속 놀려댔다. “아니, 이 친구가 너를 한번 보는 게 평생소원이라고 내내 노래를 불렀거든.” 셋이서 맛있는 저녁을 먹으며 즐겁게 수다를 떨었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며칠 전 찾아간 병원에는 회사 동료들이 병문안 와 있었다. 누워 있던 후배가 웃으며 나를 반기자, 같이 있던 동료가 놀렸다.

“우리 왔을 땐 그냥 누워 있더니 선배가 오니 벌떡 일어나네?”

후배가 그랬다.

“이 형은 그냥 선배가 아니야. 내 소원을 이뤄준 사람이야. 박나림 아나운서 만나는 게 평생소원이었거든.”

후배는 나와 함께 지내면서 종종 박나림 아나운서를 만났던 이야기를 했다.

“형, 실제로 만나보니 텔레비전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더 멋있는 사람이었어요. 오랜 세월 팬으로 지낸 보람이 있었어요.”

후배가 세상을 떠나고, 다시 아나운서국 사무실로 찾아갔다. 박나림 아나운서에게 사연을 털어놓았다. 실은 그 후배가 간암 말기 환자였다고, 살아생전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고 싶어서 그때 어려운 부탁을 했다고, 그 후배가 며칠 전에 세상을 떠났는데 마지막까지 그날의 만남을 즐거운 추억으로 간직하다 갔다고. 박나림 아나운서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매년 후배 기일이면 동아리 친구들을 모아 추모공원에 찾아간다. 10년이 넘도록 환하게 웃는 얼굴로 우리를 맞아준다. 나는 한 해 한 해 늙어가는데 그는 30대 후반의 모습 그대로다. 후배의 영정 사진을 보며 그런 생각을 한다.

‘박나림 아나운서 한번 보고 싶다고 했을 때, 모른 체했다면 미안한 마음을 지울 길이 없었겠구나. 세상을 떠난 사람에게 진 빚은 갚을 길이 없으니까.’

병상에 누운 이용마를 찾아갔을 때, 용마는 내내 회사 이야기를 했다.

“MBC가 너무 어려워졌어. 큰일이야.”

“그래도 새 정부가 들어서면 회사도 차차 좋아지겠지, 뭐.”

“그래서 더 힘들어질걸?”

“무슨 얘기야?”

“세상이 좋아졌는데, MBC만 그대로라고 해봐. 그전에는 정부 눈치 보느라 이상한 뉴스를 만들었다고 생각했는데, 세상이 바뀌어도 MBC 뉴스가 바뀌지 않잖아? 그럼 저것들은 이제 뼛속까지 적폐가 되었구나, 하고 더 미움받을 걸?”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해?”

“김장겸이 물러나야지. 그것 말고는 답이 없어.”

김장겸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몸이 움찔했다. 오랜 세월 나를 너무나 힘들게 한 이름이었다.

“용마야, 김장겸은 누구야? 이득렬이니, 엄기영이니, 예전 사장들은 앵커로 이름을 날리고 얼굴을 익힌 사람이라 누군지 알겠는데, 김장겸은 도대체 누군지 모르겠어. 사람들이 날 더러 김장겸이 MBC 사원 중에서 제일 미워하는 게 나라는데, 나는 김장겸을 본 적도 없어. 네가 보도국에서 10년 넘게 같이 일하면서 지켜본 김장겸은 어떤 사람이야?”

이용마가 말했다.

“약자에겐 강하고, 강자에게는 약한 사람이지. 뼛속까지 정치적인 사람이야. 이명박 정부 때 정치부장을 하고, 박근혜 정부 들어서 보도국장을 하고, 보도본부장으로 승진했지. 막판에는 사장까지 되고. 10년 전에는 그 사람이 MBC 사장 할 거라 아무도 상상도 못 했지. 본인도 그러고 다닌대. 자신이 보도본부장이 되고 사장이 된 건 다 노조가 파업한 덕분이라고. 옛날에 MBC 뉴스가 잘 나갈 땐 존재감도 없던 양반인데, 2012년에 괜찮은 선배들이 다 파업에 동참하는 바람에 혼자 남은 거지. 2012년의 파업이 가져온 비극적인 결과지.”

보도국에서 파업을 하면, 후배는 마이크와 카메라를 던지고 집회로 달려간다. 선배들은 남아서 뉴스 분량을 채운다. 일 때문에 현업에 남긴 했지만 양심은 켕긴다. 파업이 끝나면 후배들 등 툭툭 두들기며 “야, 이제 슬슬 내려갈까 했더니 파업이 끝나버렸네?” 하고 능청을 떠는 사람도 있고, “월급도 못 받고 고생 많았지? 가자, 내가 밥 사줄게” 하는 양반도 있다.

그런데 2012년 파업에는 그런 능청이 통하지 않았다. 너무 길었던 탓이다. 170일 넘게 싸우는 동안, 어지간한 사람은 다 내려왔다. 파업 한 달이 지나자 내려오고, 사측에서 해고를 남발하자 내려오고, 파업 대체인력을 뽑는 걸 보고 내려온 이도 있었다. 여섯 달 넘게 싸우는 동안, 현업기자도, 앵커도, 데스크도 다 내려왔다. 그때 끝까지 파업에 동참하지 않고 남은 사람은 누구였을까? 김재철의 호위무사들이다. 특히 김장겸은 정치부장으로 일하며 시용기자 뽑아 뉴스 분량을 채우고 2012년 총선과 대선 국면에서 MBC 뉴스를 망가뜨려 공을 세웠다. 괜찮은 선배들이 후배들과 함께하겠다고 보직을 던진 후, 혼자 남은 김장겸은 박근혜 정부 시절 내내 승승장구했다. 보도국장‧보도본부장을 역임한 후 사장까지 올라갔다.

병상에 누운 용마를 보며 생각했다. 지금 이 순간, 용마의 가장 간절한 소원은 MBC의 정상화구나. MBC의 적폐 청산은 김장겸이 물러나야 시작되는구나. 그런데 어떻게 해야 하지? 문득 이용마의 오랜 별명이 떠올랐다.

“어이, 불세출의 전략가. 만약 김장겸과 싸운다면 어떻게 해야 이길 수 있을까?”

“김장겸한테는 약한 모습을 보이면 안 돼. 상대가 만만해 보이면 밟으려 들 거고, 세게 나가면 오히려 꼬리를 말고 달아날 거야.”

아픈 친구를 남겨두고 병원 문을 나서서 혼자 한참을 걸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몇 년 전, 내가 가격비교 사이트에서 새로 나온 산악자전거 모델을 보며 살까 말까 고민하고 있을 때 후배가 그랬다.

“형, 그냥 사요. 하고 싶은 일이 있잖아? 그냥 지금 해요. 인생에 나중은 없어요.”

‘인생에 나중은 없다.’ 후배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다음 날, 회사에 출근해 목청껏 외쳤다.

“김장겸은 물러나라!”

부장이 찾아왔다.

“김 차장, 조금만 기다려보면 어떨까?”

“예?”

“내년 8월에 방문진 이사회 선임이 있거든? 그때가 되면 방문진 이사가 바뀔 테고, 새로운 정부하에 선임되는 이사는 사장을 바꿀 거야. 어차피 지금 상황에서는 김장겸도 방송을 막 하지는 못 할 거야. 들여다보는 눈이 많으니까. 시간이 지나면 김장겸은 물러나게 되어 있어. 그러니 김 차장 괜히 고생하지 말고, 1년만 기다려봐.”

병상에 누운 이용마의 모습이 떠올렸다. 용마더러 내년 8월까지 기다리자고 말할 수 없다. 그사이에 용마가 세상을 떠난다면, 해직 기자 이용마의 한은 어떻게 풀어주지? 그때 결심했다. 이용마가 살아생전 MBC에 복직하는 날이 올 때까지,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겠노라고.

그렇게 딴따라는 투사가 되었다.

 

(2017년 가을, 파업 집회 무대에 오른 이용마 기자와 나)

오늘은 새로 나온 책 <나는 질 때마다 이기는 법을 배웠다>의 프롤로그를 공유합니다.

긴 글, 끝까지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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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질 때마다 이기는 법을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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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질 때마다 이기는 법을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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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질 때마다 이기는 법을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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