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에 나올 책 원고를 출판사에 넘긴 후, 읽기 시작한 책이 있어요. 

<구디 얀다르크> (엄기원 / 은행나무)

지난 여름에 책이 나왔을 때, 신문에서 서평을 읽고 찜해둔 책입니다. 소설의 경우, 원고 작업을 할 때는 아껴둡니다. 이야기의 끝이 궁금해서 일이 손에 잡히지 않거든요. 원고를 끝낸 스스로에게 주는 선물로 남겨두지요. 호평이 많은 이유가 있군요. 저자는 오랜 기간 IT 업계에서 일하다 2014년 봄, 소설을 쓰기 위해 스타트업을 정리했답니다. <구디 얀다르크>로 제5회 황산벌 청년문학상을 수상했어요. 첫 줄부터 독자의 시선을 사로잡습니다.

'땡그랑. 보도블록에 동전이 떨어졌다. 그 소리에 귀를 쫑긋 세우는 건 빈부격차와 상관없는 조건반사다. 하지만 또르르 굴러가는 그 돈의 행방을 찾기 위해 고개를 숙이는 삶과 다시 앞을 보고 자기 길을 가는 삶은 다르다. 앞을 보고 가는 사람은 길을 잃지 않는다. 나는 고개를 숙여 동전을 찾는 삶을 살았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낯선 곳에 서 있었다.'

(7쪽)

눈앞의 이익을 쫓다보면 '난 누군가, 또 여긴 어딘가?'하게 되는 경우가 많지요. 소설의 주인공은 어려운 가정 형편 탓에 끊임없이 일을 찾습니다. 일을 하지 않으면 생계 유지가 힘들어요. 좋아하는 일을 한다는 건 운이 좋은 겁니다.

'누구나 꿈은 꾼다. 중학교 때는 서울대를 꿈꾸며 공부하고 고등학교에 들어가면 SKY를 꿈꾼다. 2학년이 되면 인서울을, 3학년이 되면 수도권 4년제 대학을 꿈꾼다. 어릴 때는 어른이 되기를 꿈꾸고 늙으면 더 오래 살기를 꿈꾼다. 부모의 장수를 자식의 성공을 꿈꾼다. 부자도 거지도 더 많은 돈을 꿈꾼다. 누군가는 불멸을 꿈꾼다. 하지만 모두의 꿈이 다 이루어지는 일은 없다.'

(109쪽)

어느 책에서 읽었어요. 불행은 이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에서 생긴다고. 나이 50이 넘어 이제는 꿈이 없어요. 그냥 지금 이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꾸준히 하면서 삽니다. 그 결과 무엇이 되어도 좋고, 안 되어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건 지금 이 순간, 현재에 충만한 삶이죠. 돈을 더 벌려고 하는 것보다, 아끼며 자족하며 사는 쪽이 즐겁습니다.   

'세상은 거머리 천지다. 갑이 을에게, 을이 병에게 흡혈한 피로 산업이 돌아간다. 사람의 불안감을 빨아먹고 사는 보험, 상조, 종교, 음모론자, 언론인, 유사과학자는 또 얼마나 많은가. 정부지원금에 빨대를 꽂아 해마다 빨아먹고 사는 거머리 스타트업도 수없이 많다. 멀리 볼 것도 없이 가족이나 연인의 사랑을 빨아먹고 사는 거머리는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다.'

(134쪽)

나의 에너지를 보존하며, 즐거움에 집중하며 사는 것도 수행이 필요합니다. 책을 읽으며 '가디'와 '구디'라는 말을 처음 알았어요. 옛날 봉제공장이 있던 가리봉동이 가산디지털단지가 되고, 여공들이 일하던 구로공단이 구로디지털단지가 되었고, 각각 가디와 구디로 불린다는 걸. 

'가디와 구디의 회사 여럿을 거쳤다. 너 말고 일할 놈 널렸다며 일상처럼 가해지는 인격모독, 회식 자리마다 벌어지는 성폭력, 숫자로만 존재하는 휴가. 나 자신도 잃어버린 채 삼 년을 살았다. 아직도 내가 누구인지 잘 모른다. 삼 년 내내 죽음의 공포를 느끼며 생존을 위해 투쟁했다. 먹고살기 위한 투쟁을 벌이다 정신을 차려보니 노조를 설립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새 나는 '구디 얀다르크'가 돼 있었다.'

(200쪽) 

드라마를 한창 찍을 때는 하루 2~3시간씩 자면서 일을 했어요. 때로는 죽음의 공포를 느끼기도 해요. 아, 이렇게 살다가 죽을 수도 있겠구나... 열심히 살았는데, 때로는 개인의 노력으로 극복하지 못하는 한계도 있습니다. 그럴 때는 내 삶의 틀을 깨는 노력이 필요하지요. 아등바등 일만 하던 사람이 투사가 되어가는 과정입니다. 그렇다고 마냥 심각한 소설은 아니고요. 유쾌한 이야기의 흐름을 쫓아가다 문득 삶에서 중요한 질문을 마주치는 그런 책입니다. 
공모전 당선작을 통해 만나는 새로운 이야기꾼의 등장은 늘 반갑습니다. 염기원 작가님의 다음 작품을 기대합니다.


Posted by 김민식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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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아리아리짱 2019.12.16 06:3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김민식 PD님 아리아리!

    와~!
    내년에 나올 책 원고를 벌써 마무리 해서 출판사에
    넘기신것 축하 드려요.

    수고한 자신에게 보내는 선물로 재미난 소설읽기
    정말 좋아요!

    저도 스스로에게 선물할 일이 있을 때
    이 책을 읽어봐야겠는데요! ^^

  2. 세라피나장 2019.12.16 06:3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이 50
    넘어
    꿈이 없어요
    절대공감

    가족
    번개팅
    1박2일
    전주 군산 논산
    투어
    차일피일
    미루던
    끝없는가족
    소통 대화
    현재를
    감사히 즐기자

    작가님 덕분에
    바로 지금 현재
    살아있습니다

  3. 더치커피좋아! 2019.12.16 07:0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등바등 살아가다..
    문득
    '삶에서 중요한 질문을 마주한 때.'
    힘들지만 값진기회.

    저자도 아마 그 질문 앞에 마주서서
    한참을 심사숙고 했을것 같아요.
    그 마음이 소설이되어 나오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내 삶의 틀을 깨는 노력이 필요한때'
    저는 지금이 그때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원고 마무리하신거 축하드립니다.
    저희도 새책 기다려집니다.
    피디님~파이팅!

  4. 아프리칸바이올렛 2019.12.16 07:2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내 년에 책이 나오신다니
    벌써 기대됩니다
    강남의 집을 가진 사람들을 보며
    노력으로 이루어 가는 꿈들이 때론 길을 잃기도
    합니다
    아이를 기를 때와는 또 다른 하루하루 더욱 더
    나빠지는 출구가 없는 부모님의 건강
    직장에서 매일 만나서 풀어야 하는 상식 밖의
    문제들
    매일 열심히 살지만 좀체로 달라지지않는
    하루하루에 블로그를 읽으며 제 마음을
    밖으로 표현하고 때론 위로받고 공감하며
    호기심에 이끌려 책을 읽다보니 좋은 스승과
    친구 때론 응원해주고 싶은 사람들
    만나요
    얼마 전 후배한테 카톡이 왔네요
    언니 무슨 일 있어 통 연락이 없어요
    한 달이 그냥 지나가버렸더군요
    제 일상의 틀에서 잠시 빠져나왔던걸
    느꼈어요

  5. 나겸맘 리하 2019.12.16 07:2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새책 탈고를 하셨네요. 피디님. 축하드립니다^^
    직장생활과 각종 강연으로 바쁘신 와중에도
    매년 한 권씩의 책을 내시기 위해서는
    일상을 얼마나 계획적으로 유지하실지 상상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스스로를 돌아보게도 되네요.

    책 전체의 내용을 함축한 첫문단이 참 의미심장합니다.
    구디와 가디라는 말도... 그 안에 내포된 수 많은
    상황과 사연을 상상하며 떠올리게 하는군요.
    누군가의 삶과 삶을 담은 책을 바라보며
    나의 삶을 다시 살펴보는 시간들을 가져야 할 것 같습니다.
    좋은 책 소개 감사드려요~

  6. 보리랑 2019.12.16 07:4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의 에너지를 보존하며, 즐거움에 집중하며 사는 것도 수행이 필요합니다." No라고 말할 수 없으면 안되는 일이니 수행 맞네요. 거절하면 미움 받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극복하는 수련.

    '이대로 죽어도 된다'에서 다 큰 자녀를 고아로 만들지 않기 위해 '오래 살기'로 했는데 잘못 생각했나요? ㅎㅎ

  7. 새벽부터 횡설수설 2019.12.16 08:0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직장 내 가해자들은 고발되어 그 가해를 당한 사람들에게 똑같이 고통을 당해봐야 합니다.
    복수는 결코 좋은 행위가 아니지만 상처 입은 그들에게 조금의 위로가 되길 바라는 거죠.

    엄기원 작가님이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 일들을 소설로 엮었겠나요. 이 사회가 정말 크게 반성해야 될 부분입니다. 걷어차주고 싶네요.^^

  8. 오달자 2019.12.16 08:4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피디님 축하드립니다~~
    바쁜 와중에도 벌써 5 번째 책이라뇨~~
    과히 스승님답습니다.

    아등바등 살아봤자 거기서 거기인줄 알면서도 하루하루의 삶을 허투루 보내다가는 나의 노후 걱정이 앞서기에 그져 앞만보고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일침을 가하는 책이군요.

    피디님이 추천해주신 책들은 다 흥미롭습니다.
    오늘 하루도 생애 최고의 날 되시길바랍니다

  9. GOODPOST 2019.12.16 09:1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축하드립니다.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기위해 또 한권의 책이 탄생하였네요.
    내년 책도 기대하겠습니다.

    책 내용처럼 돈의 행방을 찾기 위해 고개를 숙이는 삶이 아니라
    앞을 보고 자기 길을 가는 pd님의 꾸준한 삶을 응원합니다.

  10. 인대문의 2019.12.16 09:2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책 쓰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벌써부터 어떤 책일지 기대가 됩니다.


    pd 님께서 드라마를 2~3시간씩 자며 일하고 죽음의 공포까지 느낄 정도라니..

    얼마나 어깨가 무겁고 시간에 쫓겼을지 상상이 되네요.

    개인의 노력으로 안 되는 것이 있어서, 더욱 효과적이라고 생각하셔서, 그리고 pd 님께서 성격이 좋아서

    그래서 pd 님께서 배우와 스텝을 믿고 협업을 하여 좋은 작품들을 만들어 내시는 것 같습니다.



    구디얀다르크의 작가도 생존을 위해 죽음의 공포 속에서도 투쟁을 했는데, 본인이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아도 주변 상황이 그렇게 만드니 인생 살기 참 힘든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포기하고 체념하며 살기보다는 그 상황을 타개하려는 노력과 의지가 존중받을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인생에 있어서 정해진 답은 없지만 pd 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내 삶의 틀을 깨는 노력을 한다면 변화가 생기고 좋은 일들이 찾아올 것이라 확신합니다.

    오늘도 감사합니다.

  11. 꿈트리숲 2019.12.16 11:4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그간 블로그 방문하지 못했는데, 기쁜 소식있다고 지인이 알려주셨어요. 탈고 하셨다니 정말 축하드립니다.~~

    삶의 틀을 깬다는 건 어떤걸까 고민이 되네요. 지금 제게 필요한 것이 그것인가 싶기도 하고요. 뭘 더 추가로 하기보다 작지만 지금 할 수 있는 것들로 에너지 소진하지 않고 제 페이스를 천천히 찾으려고 합니다. 더 열심히 보다는 지금도 괜찮다는 마음으로요.

    내년에 나올 책에 대한 기대로 힘이 마구마구 나는 기분입니다. 감사합니다.~~

  12. 2019.12.16 13:0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13. 김주이 2019.12.16 20:5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PD님 정말 축하드립니다.
    다음 책도 정말 기대됩니다.
    정말 대단하세요.
    👍👍👍👍👍

    허투루 보낸시간은 없는지 오늘 저의 하루도 돌아보게되네요.
    항상 좋은 자극 감사드립니다.

  14. 힘껏배워늘푸른나 2019.12.17 12:1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구디 얀다르크'
    제목이 이게 뭘까? 했는데...
    글의 끝자락 즈음 오니깐 알겠네요~ㅎ

    '빈부격차 없는 조건반사'란 표현에 아~~그러네...
    그렇지..했습니다.
    그리고, 자유의지에 의한 선택에 따라 삶이 달라지네요.

    오늘 하루 매 순간! 능동적이고 용기 있는 선택이 되길 응원합니다!~^

  15. silahmom 2019.12.17 17:0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처음에 제목보고 외국소설인줄 알았네요.
    가디, 구디 ㅎㅎㅎㅎ
    오늘 또 재미있는 책과 생활에 유용한 요약어 구디 배워서
    감사합니다.

  16. 봄처녀 2019.12.17 22:2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새로운 누군가의 등장은 묘한 긴장감과 설레임을 줍니다~~ 피디님 감사합니다~~

  17. 섭섭이짱 2019.12.18 00:4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녕하세요.

    구디, 가디 . IT...
    너무나 익숙한 단어라 이 책이 더 관심가네요.
    IT 업계 얘기를 소설로 쓰셨다니 궁금해서 바로 읽어보고 싶네요.
    이번에도 피디님 책 선택 노하우.. 역시 그걸 항상 관심있게 보는게 중요하네요 ^^
    오늘도 좋은 책 소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18. 귀요미숭 2019.12.18 13:5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녕하세요, 작가님 :)
    매일 회사와서 일없을때 작가님 글읽는게 요즘 삶의 낙이에요
    저번에 가평 조종도서관 강연 오셨을때 뵙고나서 댓글을 바로 쓰고싶었는데 뭔가 평소에 댓글을 많이 안남겨봐서 쑥쓰러워서 이제야 남겨봅니다. 항상 저에게 힘이 되는 글들 올려주셔서 너무 감사해요 ^_^ 즐거운 연말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