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짠돌이 독서 일기

삶의 틀을 깬다는 것

by 김민식pd 2019. 12. 16.
내년에 나올 책 원고를 출판사에 넘긴 후, 읽기 시작한 책이 있어요. 

<구디 얀다르크> (엄기원 / 은행나무)

지난 여름에 책이 나왔을 때, 신문에서 서평을 읽고 찜해둔 책입니다. 소설의 경우, 원고 작업을 할 때는 아껴둡니다. 이야기의 끝이 궁금해서 일이 손에 잡히지 않거든요. 원고를 끝낸 스스로에게 주는 선물로 남겨두지요. 호평이 많은 이유가 있군요. 저자는 오랜 기간 IT 업계에서 일하다 2014년 봄, 소설을 쓰기 위해 스타트업을 정리했답니다. <구디 얀다르크>로 제5회 황산벌 청년문학상을 수상했어요. 첫 줄부터 독자의 시선을 사로잡습니다.

'땡그랑. 보도블록에 동전이 떨어졌다. 그 소리에 귀를 쫑긋 세우는 건 빈부격차와 상관없는 조건반사다. 하지만 또르르 굴러가는 그 돈의 행방을 찾기 위해 고개를 숙이는 삶과 다시 앞을 보고 자기 길을 가는 삶은 다르다. 앞을 보고 가는 사람은 길을 잃지 않는다. 나는 고개를 숙여 동전을 찾는 삶을 살았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낯선 곳에 서 있었다.'

(7쪽)

눈앞의 이익을 쫓다보면 '난 누군가, 또 여긴 어딘가?'하게 되는 경우가 많지요. 소설의 주인공은 어려운 가정 형편 탓에 끊임없이 일을 찾습니다. 일을 하지 않으면 생계 유지가 힘들어요. 좋아하는 일을 한다는 건 운이 좋은 겁니다.

'누구나 꿈은 꾼다. 중학교 때는 서울대를 꿈꾸며 공부하고 고등학교에 들어가면 SKY를 꿈꾼다. 2학년이 되면 인서울을, 3학년이 되면 수도권 4년제 대학을 꿈꾼다. 어릴 때는 어른이 되기를 꿈꾸고 늙으면 더 오래 살기를 꿈꾼다. 부모의 장수를 자식의 성공을 꿈꾼다. 부자도 거지도 더 많은 돈을 꿈꾼다. 누군가는 불멸을 꿈꾼다. 하지만 모두의 꿈이 다 이루어지는 일은 없다.'

(109쪽)

어느 책에서 읽었어요. 불행은 이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에서 생긴다고. 나이 50이 넘어 이제는 꿈이 없어요. 그냥 지금 이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꾸준히 하면서 삽니다. 그 결과 무엇이 되어도 좋고, 안 되어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건 지금 이 순간, 현재에 충만한 삶이죠. 돈을 더 벌려고 하는 것보다, 아끼며 자족하며 사는 쪽이 즐겁습니다.   

'세상은 거머리 천지다. 갑이 을에게, 을이 병에게 흡혈한 피로 산업이 돌아간다. 사람의 불안감을 빨아먹고 사는 보험, 상조, 종교, 음모론자, 언론인, 유사과학자는 또 얼마나 많은가. 정부지원금에 빨대를 꽂아 해마다 빨아먹고 사는 거머리 스타트업도 수없이 많다. 멀리 볼 것도 없이 가족이나 연인의 사랑을 빨아먹고 사는 거머리는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다.'

(134쪽)

나의 에너지를 보존하며, 즐거움에 집중하며 사는 것도 수행이 필요합니다. 책을 읽으며 '가디'와 '구디'라는 말을 처음 알았어요. 옛날 봉제공장이 있던 가리봉동이 가산디지털단지가 되고, 여공들이 일하던 구로공단이 구로디지털단지가 되었고, 각각 가디와 구디로 불린다는 걸. 

'가디와 구디의 회사 여럿을 거쳤다. 너 말고 일할 놈 널렸다며 일상처럼 가해지는 인격모독, 회식 자리마다 벌어지는 성폭력, 숫자로만 존재하는 휴가. 나 자신도 잃어버린 채 삼 년을 살았다. 아직도 내가 누구인지 잘 모른다. 삼 년 내내 죽음의 공포를 느끼며 생존을 위해 투쟁했다. 먹고살기 위한 투쟁을 벌이다 정신을 차려보니 노조를 설립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새 나는 '구디 얀다르크'가 돼 있었다.'

(200쪽) 

드라마를 한창 찍을 때는 하루 2~3시간씩 자면서 일을 했어요. 때로는 죽음의 공포를 느끼기도 해요. 아, 이렇게 살다가 죽을 수도 있겠구나... 열심히 살았는데, 때로는 개인의 노력으로 극복하지 못하는 한계도 있습니다. 그럴 때는 내 삶의 틀을 깨는 노력이 필요하지요. 아등바등 일만 하던 사람이 투사가 되어가는 과정입니다. 그렇다고 마냥 심각한 소설은 아니고요. 유쾌한 이야기의 흐름을 쫓아가다 문득 삶에서 중요한 질문을 마주치는 그런 책입니다. 
공모전 당선작을 통해 만나는 새로운 이야기꾼의 등장은 늘 반갑습니다. 염기원 작가님의 다음 작품을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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