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짠돌이 독서 일기/꼬리에 꼬리를 무는 독서

내 부모와 소통하는 방법

by 김민식pd 2019. 12. 4.

 

온순한 양처럼 살던 아빠가 나이 들어 치매에 걸립니다. 본 적도 없는 로또를 내노라고 집안을 뒤집어놓고, 아내가 자신을 죽이려 한다고 엄마를 괴롭힙니다. 보다 못해 요양병원으로 모시는데요. 기억을 잃고 병원에 갇혀 사는 아빠의 모습이 너무 애처로워요. 결국 집에 데려와 다시 극진히 보살핍니다. 정신이 온전하지 못한 아빠와 살아가는 과정이 한 편의 드라마처럼 펼쳐집니다. 

<7년간의 마법 같은 기적> (노신임 / 밀알속기북스)

요양병원에 강제 입원을 시킨 후, 아빠는 누군가 자신을 잡아가려한다는 불안에 시달립니다. 아빠를 지켜주는 경호원들이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해요. 베란다에서 내려다보니 아파트 산책하는 동네 주민이 보여요. 
“아빠, 저 밑에 할아버지 보이지? 저 사람이 원래는 40대인데 일부러 흰머리 가발 쓰고 변장한 거잖아. 무술 유단자라 싸움도 잘하대. 저런 엄청난 요원이 아빠를 지키고 있으니까 나쁜 사람들 걱정은 안 해도 돼.”
하루는 후배를 불러 아파트 앞을 서성이게 합니다. 아빠가 베란다에 가서 창을 여니까, 저 아래 지나가던 늠름한 청년이 갑자기 아빠를 보고 경례를 합니다. “충성!”
저 사람이 누구냐고 딸에게 물어보자, 설명을 해주죠.
“저 분도 아빠 경호팀이래. 저 분이 합기도 8단에 특공무술 세계 1위 유단자래. 경호팀이 100명도 넘게 있다 그랬는데, 저분 혼자만 보이네. 다들 숨어계시나 보다.”
아빠의 눈가가 붉어집니다.
“내가 뭐라고 저런 분이 저렇게 고생을 한다냐?”
“사실 경호팀들이 신분 노출 절대 안하시는데, 아빠가 하도 안 믿으니까 오늘 확인시켜주러 오셨나 보다.”
후배를 엑스트라로 동원하기도 하고, 때로는 소품을 만들기도 합니다. 은행에 007가방을 가져가서 물어봐요. 가방을 지폐로 가득 채우려면 얼마를 대출받아야하냐고. 1000원짜리 신권을 대출받아 가방을 가득 채우니 720만원이더랍니다. 돈 가방을 아빠에게 가져다 안깁니다. 눈이 휘둥그레져요.
"이게 다 웬 돈이냐?"
"아빠가 은행에 넣어둔 돈이 너무 많아서 이자로 돈이 점점 불어난다고, 제발 현금으로 좀 찾아가라고 난리야."
"내 돈이 은행에 그렇게 많아?"
아빠의 입이 귀에 걸립니다. 
"만 원짜리로 가져오려다 아빠 쓰기 편하라고 일부러 천 원짜리로 가져왔어. 만 원짜리는 잔돈 거스르기 귀찮잖아."
바깥 거동을 못하는 아빠는 이제 지폐로 가득한 007가방을 방에서 끼고 삽니다. 돈 가방만 봐도 웃음이 절로 나요. 치매에 걸린 사람과는 소통이 힘들어요.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가 없거든요. 저자는 아빠가 필요한 게 무엇인지 어떻게 알았을까요? 답은 저자의 직업입니다. 속기사무소를 10년 넘게 운영하는 전문 속기사에요. 치매가 온 후, 혼잣말을 하며 분노를 터뜨리는 아빠를 이해하고 싶어 아빠의 혼잣말을 녹음해두고 속기로 풀어봅니다. 웅얼웅얼 뜻을 알 수 없었는데 의외로 그 중얼거림 속에 아빠의 진심이 들어있어요.

"나는 병원에 갇히게 되었다. 그곳은 감옥 같았다. 나는 분명히 제정신이 맞는데 왜 그곳에 감금되었을까? 내게 매일 치매약을 줬다. 나는 치매 환자가 아니라고 말해도 소용없었다. 의사에게 퇴원시켜달라고 해도 들어주지 않았다. 가족이 나를 버렸다. 언제 나를 다시 감옥에 가둘지 모른다. 그래서 너무 무섭다.“

아빠의 독백을 녹취로 풀면서 딸은 눈물을 흘립니다. 아픈 아빠의 마음을 몰라준 게 너무 미안해요. 이제 아빠에게 웃음을 주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합니다. 아빠가 나들이를 갈 땐, 현관으로 나가 신발장 문을 격하게 열고 한쪽 무릎을 꿇으며 말하지요. 
"각하, 제가 신겨드리겠습니다."
새벽에 잠에서 깬 노인이 허공에 대고 삿대질을 하고, 욕을 하고, 소리를 지릅니다. 상상 속의도사와 싸움을 벌이는 아빠. "아니, 여기 거실에 도사가 어디에 있어요." 해도 먹히지 않자 결국 딸은 혼신의 연기를 펼칩니다. 아빠가 허공에 대고 도사와 싸우기 시작할 때, 옆에서 얼른 거들어요.
"아이고, 도사님, 오셨어요? 오늘은 무슨 일로 오셨나요? 네? 아, 그렇군요. 와, 도사님 정말 멋있으세요!"
아빠에게 도사의 말을 전해줍니다. 저 도사는 아빠를 해치러 온 게 아니라 도와주기 위해 왔다고. 방 안의 나쁜 기운을 몰아내고 집의 기운이 맑아졌으니 한 동안 안 와도 된다고요. 혼자만 시달리던 환상을 이제 딸이 믿어주니 아빠는 마음이 편안해 집니다.    
     
나이가 들면서 인지능력이 예전만 못한 부모님이 많아요. 우리 아버지도 그래요. 가끔 여행을 다니다 아버님이 턱없는 고집을 부리는 모습을 보면, 아이가 떼를 쓰는 것 같다고 느껴요. 그럴 때는 인내심의 한계를 느끼지요. 책을 읽다 문득 아기를 키우던 시절이 생각납니다. 아이가 문지방에 걸려 넘어져 울기라도 하면, 달려가 문지방을 손으로 내려칩니다.
"네, 이놈! 우리 공주님 행차하시는데, 감히 미천한 네가 발을 걸어?"
아이가 울음을 그치지 않으면 더 오버해서 연기를 합니다. 
“저 무례한 놈을 매우 쳐라!” 
그러고는 손바닥으로 문지방을 세게 내려칩니다. 철썩! 그러고는 손바닥을 부여잡고 아이보다 더 크게 웁니다. 
"아앙! 문지방이 나 때렸쪄!"
네, 다른 사람이 보면 ‘저게 뭐하는 짓인가’ 싶겠지만, 아이를 키우는 사람은 누구나 해보는 일이지요. 아이를 위해 우리는 온갖 연극의 주인공이 됩니다. 서커스 광대가 되기도 하고요. 저자가 치매에 걸린 부모를 마치 아기 대하듯 인내심과 애정을 가지고 대하는 모습이 참 놀랍습니다. 타인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속기사라는 직업 덕분일까요? 
이 책은 누가 읽으면 좋을까요? 저자가 이 책을 쓴 이유입니다. 

'나의 이야기가 누군가 단 한 명에게라도 아주 작은 희망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썼다. 이 지구에 사는 누군가는 분명 나처럼 치매때문에 힘들어하는 부모를 곁에 두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들려주고 싶다. 치매 아빠와 함께 누구보다 행복한 7년을 보낸 나의 이야기들을.'
(6쪽)

우리 부모 세대는 불운한 세대입니다. 태어나서 전쟁을 겪고 가난을 겪고 독재를 겪었어요. 억압과 부조리 속에 많은 고생을 하며 살아왔는데, 노후에는 천덕꾸러기가 된 것 같아요. 농업시대라면 노인이 지혜로운 어른으로 대접을 받았는데, 변화가 빠른 정보화시대에는 노인의 지혜가 휴대폰 지식 검색을 못 쫓아갑니다. 결국 뒤처지고 버림받았다고 생각하지요. 치매 노인의 분노에는 그런 사회적 배경도도 있지 않을까 싶어요. 
저는 이 책을 노인을 모셔야 하는 제 또래들이 읽었으면 좋겠어요. 책을 읽고 처음 든 생각은, ‘아, 내가 언젠가 몸과 마음이 불편해졌을 때 우리 딸들이 이렇게 해주면 얼마나 좋을까’였는데요. 마음을 고쳐먹습니다. 공부란 나를 향하는 것이에요. 내가 이런 자식이 되어야겠다고 결심합니다. 
치매가 찾아온 아빠의 상상 속으로 들어가, 아빠를 부자로도 만들고, 대통령 후보도 만들고, 수백 채의 건물주도 만들어요. 놀라운 건, 이 모든 게 다 실화라는 거지요. 힘든 순간을 행복으로 바꾸기 위해 딸이 기울인 7년의 노력, 그게 정말 마법 같은 이야기를 만들어냅니다. 해리 포터의 마법은 언제 가능할까요? 사랑하는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저 사람을 도와주기 위해 뭐라도 해야겠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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