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짠돌이 독서 일기/꼬리에 꼬리를 무는 독서

업의 본질은 무엇인가

by 김민식pd 2019. 11. 6.

 

예능 피디로 살던 시절, 나는 우리 시대의 광대라고 생각하며 살았어요. 광대는 자신을 희화화하여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는 사람이지요. 논스톱이라는 시트콤을 만들며, 참 즐거웠어요.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는 것만큼 귀한 직업도 없다고 생각했으니까요. 요즘도 강연을 할 때, 저의 1차 목표는 하나입니다. 청중을 즐겁게 해드리고 싶어요. 웃기는 게 우선이고요. 1시간을 재미난 이야기로 채우는 게 목표입니다. 그 시간에서 의미를 찾는 건 청중의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저의 소임은 웃기는 거죠.
김탁환 선생님의 <이토록 고고한 연예>를 읽었습니다. 한 시대를 풍미한 춤꾼이자 거리의 자유인이었던 달문의 삶을 그린 소설입니다. 조선 후기의 예인이 우리 시대의 작가를 만나 풍성한 이야기로 되살아났군요. 달문은 거지 왕초이자, 재담가입니다. 그런 그가 인삼 장사 모독을 만납니다. 모독은 매설가의 삶을 꿈꾸는 작가 지망생입니다. 인삼 가게를 하지만, 가게 문 닫고 밤에 소설을 쓰는 게 더 즐거운 사람입니다. 장사만 집중해도 먹고 살만할 텐데, 왜 굳이 작가가 되려고 할까요. 달문은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은 소설을 쓰지 않아도 먹고살 길이 널렸을 겁니다. 그렇지만 당신은 소설이 쓰고 싶은 겁니다. 그건 특별한 사람한테만, 저와 당신 같은 이상한 사람한테만 불어 대는 바람입니다."

(33쪽)

맞아요. 저도 그랬어요. 통역사로 일을 하면 먹고살 수는 있었어요. 그런데 사람들에게 재미난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어요. 그래서 밤에는 혼자 아이작 아시모프의 SF를 번역해서 인터넷 동호회에 올렸어요. 통역사는 이야기를 선택할 수 없어요. 연사가 하는 말을 무조건 따라가야 하지요. 저는 소설 번역을 할 때, 내가 좋아하는 작품을 번역하는 걸 목표로 삼았어요. 저는 어려서 작가가 되는 게 꿈이었는데요. 정작 창작의 소질이 없다는 걸 깨달았어요. 재미난 소설을 쓸 수 없다면, 재미난 소설을 읽는 걸 평생의 낙으로 삼자고 결심했지요. 쓰는 건 어려워도 읽는 건 쉽잖아요? 달문은 탁월한 이야기꾼인데요. 재담가로 이름을 날리기 전에 그는 잘 들어주는 사람입니다. 달문을 찾아와 인생의 괴로움을 토로하는 이들이 많은 걸 보고 모독이 묻습니다.

"그 많은 문제를 다 알지는 못할 텐데, 답을 그리 막 해도 돼?"
"저처럼 못 배운 놈이 답을 알리 없습죠. 저들도 거지에 까막눈인 제게 딱 맞아떨어지는 답을 들으러 온 건 아닐 겁니다. 저한테까지 와서 하소연하는, 그 답답한 심정을 헤아릴 뿐입니다. 해답은 모르겠지만 그 문제가 당신에게 얼마나 중요한지는 알겠다고 받아주는 게 전붑니다."
달문은 찾아온 이의 말을 반복하여 되새기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슬프다고 하면 "참 슬프시군요!"라고 하고, 외롭다고 하면 "인생에서 제일 외로우시겠습니다"라고 했으며, 화가 난다고 하면 "장작불처럼 가슴이 활활 타오른 적이 저도 있습니다."라고 하고, 후회스럽다고 하면 "그런 후회는 저도 중종 합니다"라고 했다. 달문이 그렇게 한 번 더 따라 하는 것만으로도 찾아온 이들의 얼굴이 밝아졌다."

(117쪽)

광대놀음에서 광대가 하는 말은 다른 사람의 말의 메아리입니다. 양반을 놀리고, 부자를 비웃는 게 다 힘없고 가난한 농군들의 말을 반복하는 거지요.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귀기울여 듣는 것은 좋은 공부입니다. 제가 책을 읽고 좋은 구절에 대해 필사하는 것도 같은 이치입니다. 옮겨 적으며 손가락을 부지런히 놀리는 것만으로 공부가 되는 것 같아요.

책의 두 주인공, 달문과 모독은 서로의 모습을 비추는 거울 같아요. 

'(달문의) 산대놀이를 보며, 나는 내가 매설가가 되려는 이유를 새롭게 깨달았다. 내 문장으로 사람과 동물과 식물과 사물이 만나고 어울리고 흩어지는 과정을 세심하게, 오직 단 한 번만 드러나도록 만들고 싶은 것이다. 흥망성쇠의 희로애락이 그 속에 담겼다. 산대놀이에선 수천 혹은 수만 명의 구경꾼이 일제히 함께 환호한다. 소설은 겉으론 조용해 보이지만, 각자의 골방에 틀어박힌 수천 혹은 수만 명의 독자가 문장에 담긴 이야기를 통해 울고 웃으며 각자의 삶을 뜨겁게 뒤돌아보는 것이다. 벌떡 일어나 이렇게 외치고 싶었다. 달문의 산대여! 모독의 소설이여! 달문과 모독의 이야기여! 무궁무진 나아가라! 활짝 꽃피어라!'

(183쪽) 

드라마 피디로 살며 내가 이야기를 만든다고 생각했어요. 작가가 만든 이야기에 영상으로 덧칠을 한다고요. 드라마 연출을 하지 못하던 시절, 이야기꾼으로서 내 삶이 끝난 것 같았어요. 드라마 피디는 혼자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바보거든요. 회사에서 일을 맡기지 않으면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요. 그때 업의 본질에 대해 고민해봤어요.
드라마 피디의 업의 본질은 무엇일까요? 드라마 피디가 현장에서 하는 일은 동기부여입니다. Motivational speaker라고 하지요. "당신은 할 수 있습니다. 믿습니까?"라고 말하는 사람이에요. 신인 작가를 만나, ‘당신에게는 이야기꾼의 재능이 있다’고 말해주고, 신인 배우를 만나, ‘당신에게는 스타가 될 자질이 있다’고 말합니다.
드라마 연출 현장이 아니라도 동기부여를 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 블로그에서 사람들에게 용기를 불어넣는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당신은 영어를 잘 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글을 잘 쓸 수 있습니다. 당신도 세계 일주를 갈 수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요. 아직 갈 길이 멉니다. <꼬꼬독>을 통해 여러분들에게 다독가의 열정을 불러일으키고 싶습니다. 
<이토록 고고한 연예>를 읽다보면, 마치 그리스인 조르바가 조선 시대 광대로 태어난 것 같아요. 달문의 모습에서 인생의 즐거움은 어디에서 오는지 함께 찾아봤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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