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외부 필자 초청 시간입니다. 오늘은 <아픔이 길이 되려면>과 <우리 몸이 세계라면>을 쓰신 김승섭 교수님의 페이스북에서 만난 글을 옮겨옵니다. 김승섭 선생님이 가수 박은옥님께 부친 편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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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춘, 박은옥 Daum 팬카페인 <그늘진 마음의 벗>에서는 '태춘은옥님께'라는 게시판이 있습니다. 두 분의 음악을 사랑하는 분들이 쓴 편지를 모은 곳이고, 지난 17년동안 400개가 넘는 게시물이 올라와있습니다. 그 첫 번째 게시물이 17년전, 23살이던 제가 쓴 '박은옥님, 감사합니다'입니다. 최선을 다해도 하염없이 무너지던 많은 순간에 제게는 <바다로 가는 시내버스>와 <다시, 첫 차를 기다리며>에 수록된 두 분의 음악이 따뜻한 위로였고 힘이었습니다
두 분이 오랜 침묵을 깨고 전국 투어 콘서트를 하고 새로운 음반도 내신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번 음반이 마지막 작업이 될 수도 있다는 이야기도 들립니다. 어떤 선택을 하시건, 두 분은 제게 감사한 존재였습니다. 부디, 건강하시길.
아래 글은 몇년전 제가 어머니의 문집을 만들어드리며, 제가 쓴 두 분의 팬 카페에 글을 남기게 된 사연을 담은 글입니다. 혹시라도 박은옥님께서 이 글을 보시면, 정말 감사했다고 꼭 전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 위로 덕분에 그 캄캄한 시간을 넘기고,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
의과대학에 다니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집에 돌아오니, 어머니 얼굴이 흙빛이 되어 있었습니다. 정말 이대로 놔두면, 어머니께서 숨이 넘어가실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만큼 얼굴이 안 좋으셨습니다. 얼굴이 검게 변한다는 게 비유가 아니구나라고 알게 된 날이기도 합니다. 홀로 고민하다가, 제가 좋아하는 정태춘, 박은옥씨가 소극장 콘서트를 하고 있다는 점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목요일 티켓을 2장, 금요일 티켓을 2장 샀습니다. 목요일에 제 친구 종필이와 함께 콘서트를 보고서, 공연 후 팬을 만나고 계신 박은옥씨를 찾아갔습니다.
“신촌에서 온 김승섭이라고 합니다. 저희 어머니께서 너무 힘든 일로 괴롭게 지내고 계세요. 내일 어머니께서 콘서트에 오실 텐데, 무대에서 힘내라고 한 말씀을 해주시면 안될까요?” 그런 요청을 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을까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 목요일에 만사가 귀찮으니 어디에도 안 가시겠다는 어머니 등을 떠밀다시피 해서 삼촌과 함께 콘서트 장에 보냈습니다. 삼촌께만 혹시 모르니 귀뜸을 했구요.
콘서트 중간에 박은옥씨가 갑자기 “신촌에서 오신 김승섭씨 어머니 계세요?”라고 하셨답니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하며, 어리둥절해하셨던 어머니를 삼촌께서 일으켜 세우셨고, 어머니께 조명이 맞춰졌습니다. 그렇게 어머니가 서 계신 상태에서, 어제 제가 찾아왔다는 이야기를 하시면서 노래를 불러주셨습니다. 어머니는 시작부터 끝까지 계속 우셨구요. 생각해보면, 그 울음으로 숨막히는 시간들을 무사히 넘겼던 것 같습니다. 그 다음날, 박은옥씨 팬 카페에 글을 남겼습니다.
“목요일 콘서트가 끝나고, 싸인회 시간에 인사드렸던 학생입니다.
98년 IMF가 터지고 은행에 다니던 아버지께서는 명예퇴직을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어머니께서는 가족의 생계를 어깨에 짊어지시고 신촌에서 하숙집을 시작하셨구요. 50이 다 되신 나이에 어머니께서 하숙집을 시작하신 것도 큰 용기였지만, 그 이후에 당신께서 보여주신 노력은 아들인 제가 보기에도 눈물겨운 것이었습니다.
두 아들이 이미 다 대학에 들어갔음에도, 어머니께서는 매일 아침 7시면 어김없이 일어나 17명의 음식을 만드십니다. 많은 양의 음식을 만들어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정작 어머니께서는 아무리 맛있는 음식을 만드신다하더라도 제대로 드시지 못합니다. 만드는 과정에서 이미 냄새로 지겨울만큼 다 맛을 봐버렸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또 365일 내내 추석 때이나 설날에도 큰 집에 가지 못하고 집을 지키셔야 합니다. 하숙생 중에 서울에 머물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거든요.
한동안 어머니 어깨가 움직이질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오십견이라고 부른 병이었지요. 앞으로 나란히 조차 안되는 한 쪽 어깨를 가지고 17명의 밥을 하고 빨래를 하고 청소를 하셨습니다. 간혹 걱정이 돼 물으면 ‘오른쪽 어깨가 성해서 참 다행’이라고 웃으며 답하셨지요. 밤마다 끙끙 앓으면서 그 다음날 아침을 기다리는 당신의 모습에 큰 아들은 마음이 아플뿐 아무것도 해드릴 수 없었습니다.
어머니께서 다짐처럼 제게 자주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승섭아, 사람들은 또 학생들은 엄마를 그냥 학생에게 밥해주는 아줌마로 밖에 안 볼지도 몰라. 하지만 엄마는 엄마가 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싶어. 나중에라도 우리 집에 머물렀던 학생들을 만나게 되었을 때, 부끄럽고 싶지 않거든.’ 하지만 어머니의 섬세한 마음이 오히려 비수가 되어 어머니를 더 힘들게 하기도 합니다. 어머니께서 안해줘도 되는 빨래를 굳이 해주시다가 옷 색깔이 변하게 되자 가격을 알아내 돈을 받아간 아이도 있었고, 과거에 하숙했던 학생인데 길에서 어머니를 모른 척 한 아이도 있었습니다. 어찌보면 별 것 아닐 수 있지만, 사람과의 만남 하나하나를 소중한 인연으로 여기시는 어머니에게는 결코 작은 상처가 아니었습니다.
몇 년 전에 어머니께서는 일본어와 수필 그리고 컴퓨터를 배우셨습니다. 2달만에 그만두신 일본어는 혹시라도 일본인 유학생이 하숙하게 되면, 간단한 대화를 하겠다는 욕심 때문이셨구요. 수필과 컴퓨터를 배우신 이후로는 하숙생들에게 큰 일이 있을 때면 워드로 편지를 쓰셨습니다. 졸업할 때, 군대갈 때, 여행갈 때, 큰 시험이 있을 때면 어김없이 컴퓨터 앞에 앉아 ‘먼길 떠나는 A에게’ '항상 듬직한 B야‘ 로 시작하는 글을 힘겹게 쓰셨습니다. 글을 쓰고선 항상 제게 맞춤법이 틀린데 없냐고 물으십니다. 군데 군데 서툰 표현과 약간 이상한 문맥이 오히려 어머니의 마음을 느끼게 하는 것 같아 저는 대부분을 그냥 읽곤 괜찮다고 이야기 합니다.
얼마전에 어머니께 힘든 일이 여러 개 겹쳤습니다. 그래도 세상은 착하게 살아야 한다고, 그리고 악한 마음 먹고 다른 사람 힘들게 하면 벌받는다는 인과응보에 대한 믿음으로 세상을 헤쳐오신 당신에게 그 믿음 자체가 흔들리는 일이 있었습니다. 밤이면 현관에서 쪼그리고 앉아 고개를 숙이고 있는 당신을 보았습니다. 냉혹한 사업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작은 한 발자욱이라도 인간적으로 내딛으려고 애쓰는 당신을 보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너무 순진하신 것 아닐까 혹은 영양제를 맞으며 버티는 당신이 쓰러지진 않을까 안타까움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 그런 당신이 존경스러웠습니다. 그리고 그 고뇌하시는 모습에서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어떤 결과가 올 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어떤 냉정한 결과가 온다할지라도 저는 당신의 순진한 선택이 올바른 것이었다고 믿을 것입니다.
박은옥씨께서 금요일 콘서트장에서 어머니께 해주신 몇 마디를 어머니는 평생 못 잊으실 것 같습니다. 그것은 아직도 몇 년은 더 이 힘겨운 세상과의 또 자기 자신과의 싸움을 계속 해나가셔야 할 어머니께서 삶을 지켜나갈 큰 힘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쉽지 않은 부탁 들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두 분이 오랜 침묵을 깨고 전국 투어 콘서트를 하고 새로운 음반도 내신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번 음반이 마지막 작업이 될 수도 있다는 이야기도 들립니다. 어떤 선택을 하시건, 두 분은 제게 감사한 존재였습니다. 부디, 건강하시길.
아래 글은 몇년전 제가 어머니의 문집을 만들어드리며, 제가 쓴 두 분의 팬 카페에 글을 남기게 된 사연을 담은 글입니다. 혹시라도 박은옥님께서 이 글을 보시면, 정말 감사했다고 꼭 전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 위로 덕분에 그 캄캄한 시간을 넘기고,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
의과대학에 다니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집에 돌아오니, 어머니 얼굴이 흙빛이 되어 있었습니다. 정말 이대로 놔두면, 어머니께서 숨이 넘어가실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만큼 얼굴이 안 좋으셨습니다. 얼굴이 검게 변한다는 게 비유가 아니구나라고 알게 된 날이기도 합니다. 홀로 고민하다가, 제가 좋아하는 정태춘, 박은옥씨가 소극장 콘서트를 하고 있다는 점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목요일 티켓을 2장, 금요일 티켓을 2장 샀습니다. 목요일에 제 친구 종필이와 함께 콘서트를 보고서, 공연 후 팬을 만나고 계신 박은옥씨를 찾아갔습니다.
“신촌에서 온 김승섭이라고 합니다. 저희 어머니께서 너무 힘든 일로 괴롭게 지내고 계세요. 내일 어머니께서 콘서트에 오실 텐데, 무대에서 힘내라고 한 말씀을 해주시면 안될까요?” 그런 요청을 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을까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 목요일에 만사가 귀찮으니 어디에도 안 가시겠다는 어머니 등을 떠밀다시피 해서 삼촌과 함께 콘서트 장에 보냈습니다. 삼촌께만 혹시 모르니 귀뜸을 했구요.
콘서트 중간에 박은옥씨가 갑자기 “신촌에서 오신 김승섭씨 어머니 계세요?”라고 하셨답니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하며, 어리둥절해하셨던 어머니를 삼촌께서 일으켜 세우셨고, 어머니께 조명이 맞춰졌습니다. 그렇게 어머니가 서 계신 상태에서, 어제 제가 찾아왔다는 이야기를 하시면서 노래를 불러주셨습니다. 어머니는 시작부터 끝까지 계속 우셨구요. 생각해보면, 그 울음으로 숨막히는 시간들을 무사히 넘겼던 것 같습니다. 그 다음날, 박은옥씨 팬 카페에 글을 남겼습니다.
“목요일 콘서트가 끝나고, 싸인회 시간에 인사드렸던 학생입니다.
98년 IMF가 터지고 은행에 다니던 아버지께서는 명예퇴직을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어머니께서는 가족의 생계를 어깨에 짊어지시고 신촌에서 하숙집을 시작하셨구요. 50이 다 되신 나이에 어머니께서 하숙집을 시작하신 것도 큰 용기였지만, 그 이후에 당신께서 보여주신 노력은 아들인 제가 보기에도 눈물겨운 것이었습니다.
두 아들이 이미 다 대학에 들어갔음에도, 어머니께서는 매일 아침 7시면 어김없이 일어나 17명의 음식을 만드십니다. 많은 양의 음식을 만들어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정작 어머니께서는 아무리 맛있는 음식을 만드신다하더라도 제대로 드시지 못합니다. 만드는 과정에서 이미 냄새로 지겨울만큼 다 맛을 봐버렸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또 365일 내내 추석 때이나 설날에도 큰 집에 가지 못하고 집을 지키셔야 합니다. 하숙생 중에 서울에 머물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거든요.
한동안 어머니 어깨가 움직이질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오십견이라고 부른 병이었지요. 앞으로 나란히 조차 안되는 한 쪽 어깨를 가지고 17명의 밥을 하고 빨래를 하고 청소를 하셨습니다. 간혹 걱정이 돼 물으면 ‘오른쪽 어깨가 성해서 참 다행’이라고 웃으며 답하셨지요. 밤마다 끙끙 앓으면서 그 다음날 아침을 기다리는 당신의 모습에 큰 아들은 마음이 아플뿐 아무것도 해드릴 수 없었습니다.
어머니께서 다짐처럼 제게 자주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승섭아, 사람들은 또 학생들은 엄마를 그냥 학생에게 밥해주는 아줌마로 밖에 안 볼지도 몰라. 하지만 엄마는 엄마가 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싶어. 나중에라도 우리 집에 머물렀던 학생들을 만나게 되었을 때, 부끄럽고 싶지 않거든.’ 하지만 어머니의 섬세한 마음이 오히려 비수가 되어 어머니를 더 힘들게 하기도 합니다. 어머니께서 안해줘도 되는 빨래를 굳이 해주시다가 옷 색깔이 변하게 되자 가격을 알아내 돈을 받아간 아이도 있었고, 과거에 하숙했던 학생인데 길에서 어머니를 모른 척 한 아이도 있었습니다. 어찌보면 별 것 아닐 수 있지만, 사람과의 만남 하나하나를 소중한 인연으로 여기시는 어머니에게는 결코 작은 상처가 아니었습니다.
몇 년 전에 어머니께서는 일본어와 수필 그리고 컴퓨터를 배우셨습니다. 2달만에 그만두신 일본어는 혹시라도 일본인 유학생이 하숙하게 되면, 간단한 대화를 하겠다는 욕심 때문이셨구요. 수필과 컴퓨터를 배우신 이후로는 하숙생들에게 큰 일이 있을 때면 워드로 편지를 쓰셨습니다. 졸업할 때, 군대갈 때, 여행갈 때, 큰 시험이 있을 때면 어김없이 컴퓨터 앞에 앉아 ‘먼길 떠나는 A에게’ '항상 듬직한 B야‘ 로 시작하는 글을 힘겹게 쓰셨습니다. 글을 쓰고선 항상 제게 맞춤법이 틀린데 없냐고 물으십니다. 군데 군데 서툰 표현과 약간 이상한 문맥이 오히려 어머니의 마음을 느끼게 하는 것 같아 저는 대부분을 그냥 읽곤 괜찮다고 이야기 합니다.
얼마전에 어머니께 힘든 일이 여러 개 겹쳤습니다. 그래도 세상은 착하게 살아야 한다고, 그리고 악한 마음 먹고 다른 사람 힘들게 하면 벌받는다는 인과응보에 대한 믿음으로 세상을 헤쳐오신 당신에게 그 믿음 자체가 흔들리는 일이 있었습니다. 밤이면 현관에서 쪼그리고 앉아 고개를 숙이고 있는 당신을 보았습니다. 냉혹한 사업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작은 한 발자욱이라도 인간적으로 내딛으려고 애쓰는 당신을 보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너무 순진하신 것 아닐까 혹은 영양제를 맞으며 버티는 당신이 쓰러지진 않을까 안타까움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 그런 당신이 존경스러웠습니다. 그리고 그 고뇌하시는 모습에서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어떤 결과가 올 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어떤 냉정한 결과가 온다할지라도 저는 당신의 순진한 선택이 올바른 것이었다고 믿을 것입니다.
박은옥씨께서 금요일 콘서트장에서 어머니께 해주신 몇 마디를 어머니는 평생 못 잊으실 것 같습니다. 그것은 아직도 몇 년은 더 이 힘겨운 세상과의 또 자기 자신과의 싸움을 계속 해나가셔야 할 어머니께서 삶을 지켜나갈 큰 힘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쉽지 않은 부탁 들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스마트폰으로 김승섭 선생님의 글을 읽다 잠시 눈시울이 뜨거워졌어요. 글을 통해 만나는 세 분이 다 참 멋지네요. 하숙집을 운영하며 가족을 돌보시는 어머니, 그런 어머니를 위해 깜짝 이벤트를 준비하는 대학생 김승섭, 그런 아들을 위해 공연 중 시간을 내어주신 박은옥 선생님.
김승섭 선생님의 글을 읽을 때마다, 궁금했어요. 우리 시대 가장 아픈 사람들 곁에서, 가장 약한 이들 편에 서서 싸워주시는 이런 분은 어떻게 만들어지는 걸까? 어머니가 훌륭하신 분이시네요. 훌륭한 어머니의 삶을 보며 자란 아들이니 어쩜 아들의 삶은 당연한 건지도 몰라요.
저는 세 분 중 특히 김승섭 선생님의 어머니께 감사드립니다. 어머니 덕분에 우리 사회는 좋은 스승이자, 작가를 얻었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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