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짠돌이 독서 일기

내 인생 최고의 행운

by 김민식pd 2019. 4. 11.

살면서 만난 가장 큰 행운이 무엇이냐고 누가 묻는다면, 나는 ‘어려서 도서관을 만난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도서관을 즐겨 찾은 덕에 독서라는 귀한 취미를 얻었다. 방송사 피디로 22년을 일하면서 선배들이 이른 나이에 회사를 떠나거나 세상을 떠나는 경우를 많이 봤다. 술을 좋아하는 사람은 술 때문에 건강을 잃고, 색을 밝히는 사람은 그릇된 욕망 때문에 명예를 잃고, 도박을 좋아하는 사람은 도박 때문에 평생의 직업을 잃었다. 오래오래 즐겁게 일하기 위해 주색잡기를 멀리해야겠다고 느꼈고, 마흔이 된 어느 날 술 담배 커피를 끊었다. 커피까지 끊은 이유는, 그냥 술 담배를 안 한다고 하면 그래도 술 한 잔은 괜찮지 않느냐며 슬쩍 권하는 사람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저는 술 담배 커피를 하지 않습니다. 알코올이나 니코틴, 카페인의 도움을 받아야할 이유가 뭐 있습니까. 책만 펼쳐도 눈앞에 황홀경이 펼쳐지는데.”

이렇게 말하면, 다들 미친 사람 취급하며 그냥 혼자 내버려둔다. 활자 중독 덕분에 즐겁게 산다. 퇴근 후 남들 술 마실 때 나는 집에 가서 책을 읽고, 주말에 남들 골프 칠 때 나는 동네 도서관에 가서 글을 쓴다. 매년 한 권씩 책을 낸 덕분에 지금은 PD 월급에 더해 작가 인세까지 번다. 

퇴직 후, 전업 작가가 되어 책을 내고 강연을 다니는 게 꿈이다. 노후 대비를 한다고 자영업을 알아보거나 자격증을 따는 사람도 있는데, 도서관에서 노후대비를 하면 돈 들 일이 없다.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글을 쓰며 돈을 벌 수 있다. 독서라는 취미 덕분에 얻은 특기가 두 가지 있다. 바로 영어와 글쓰기다. 책 읽는 취미 덕에, 통역사니, 드라마 피디니, 작가니, 숱한 직업을 얻었으니 도서관을 만난 게 내 인생 최고의 행운이라고 말할 수밖에. 

어쩌다 내게 이렇게 큰 복이 굴러들어온 걸까?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부부 교사셨다. 당시엔 맞벌이가 드물어, 어머니는 혼자서 집을 보는 내가 안쓰러워 학교 도서실에서 책을 빌려 주셨다. 당시 시골 학교에서는 국어 교사가 사서 겸임을 했다. 어머니가 빌려다 주는 책도 좋지만, 역시 독서의 즐거움은 읽고 싶은 책을 직접 고르는 것이다. 

가끔 주말에 어머니가 일직 근무를 가셨다. 70년대에는 남자 선생님이 숙직을, 여자 선생님이 일직을 하며 방과 후에도 학교를 지켰다. 일요일에 일직 근무하는 어머니를 따라 학교에 갔다. 텅 빈 학교를 돌아다니며 노는 것도 금세 질렸는데,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도서실의 문을 따주셨다. 아무도 없는 학교 도서실은 보물창고였다. 평소 어머니가 빌려오시는 책은 위인전이나 서양고전이었는데, 도서실에는 만화 잡지나 한국 단편 소설도 있더라. 일요일 하루 종일 텅 빈 도서실에서 뒹굴며 책을 읽은 게 유년의 즐거운 추억이다.

중학교에 올라가니, 동네에 구립 도서관이 새로 생겼다. 옛날 도서관은 폐가식이라 열람기호나 책제목을 찾아서 도서 청구서에 써서 내밀고 책을 받는 식이었는데, 새로 생긴 도서관은 개가식이라 서가마다 빼곡히 꽂힌 책을 마음껏 찾아보고 그 자리에서 읽을 수도 있었다. 사춘기 시절 아버지와 사이가 나빠 집에 있는 게 고역이었다. 그때 도서관은 내게 최고의 아지트였다. 공부하러 도서관에 간다고 하고 나와서는, 열람실 책상에 가방을 놔두고 종합자료실 서가 사이에 숨어 책을 읽었다.

아버지랑 맞지 않아 괴로워하는 내게, 하루는 어머니가 이렇게 말씀하셨다. 

“생물학적 아버지는 타고 나는 것이라 어쩔 수 없지만, 정신적 아버지는 내가 노력해서 찾아낼 수 있단다. 도서관에 있는 그 수많은 책에서 네가 진심으로 존경하고 좋아하는 사람을 찾는다면, 그 사람이 진짜 아버지라 생각하고 살아보렴.”

그렇다고 도서관에 가서 위인전만 읽은 건 아니다. <태백산맥>도 읽고 <사조영웅전>도 읽었는데, 당시 대하소설이나 무협지에는 야한 장면이 많아 좋았다. 요즘은 도서관에 저자 강연을 다닌다. 질의응답 시간에 “아이들에게 좋은 책을 권하려면 어떻게 하느냐”고 묻는 부모님이 있는데, 그럴 때 나는 아이가 어떤 책을 읽든 참견하지 마시라고 권한다. 누가 읽으라고 시키면 독서도 숙제가 된다. 그냥 본인이 좋아서 읽는 책이라면 어떤 책이든 좋다. 나의 경우, 어려서 무협지에서 야한 대목을 찾아 빠르게 책장을 넘기는 버릇을 들인 덕에 속독하는 습관을 얻었다. 그 덕에 지금은 1년에 200권을 넘게 읽는 다독가가 되었고. 

(그 시절, 울산남부시립도서관에서 받은 다독상)


나쁜 일이라고 다 나쁜 것도 아니고, 좋은 것이라고 다 좋은 것도 아니다. 나는 어른들이 권해주는 ** 논술 필독서, 서울대 추천 ** 인문고전 100선, 이런 책을 좋아하지 않는다. 독서가 익숙한 내가 봐도 재미없는 책을 보고 아이들이 스스로 책을 읽는 취미를 기른다고? 그럴 리가!

재미난 게 너무 많은 세상이다. 스마트폰 하나만 해도 그 안에 게임도 있고, 만화도 있고, 영화도 있고, TV도 있다. 나는 스마트폰보다 책이 더 좋다. 스마트폰 들여다본다고 똑똑해지는 것 같지는 않은데, 책을 읽고 있으면 왠지 내가 더 훌륭한 어른이 되는 것 같다. 아마 착각일 게다. 수십 년을 책을 읽었지만 여전히 나는 대단한 사람이 못 되었으니까. 그래도 지하철에서 책에 코를 박고 있으면 왠지 있어 보인다는 착각이 든다. 초라한 내 외모에, 후줄근한 내 옷차림에 폼 날게 하나도 없다. 하지만 내 손에 든 책은 나의 가치를 높여줄 것이다. 

어른이 되고 나니, 책읽기가 재미있어 죽겠다. 누구도 내게 이런 책 읽어라, 저런 책 읽어라 잔소리를 하지 않는다. 그냥 도서관에 가서 그 많은 책 중에서 읽고 싶은 책을 마냥 읽는다. 책을 읽는 게 이렇게 재미있는데, 심지어 그 와중에 공부도 되고, 돈벌이의 기회도 있다. 이렇게 좋은 책을 누가 읽지 말라고 할까 나는 더 걱정이다. 

내 인생 최고의 행운이 도서관이니, 내가 아이에게 물려주고 싶은 것도 도서관에 가는 습관이다. 그래서 방학이면 아이 학원 보내는 대신 손잡고 같이 도서관에 다닌다. 도서관은 돈도 안 들고, 심지어 아이에게 책 읽는 기쁨을 선물해줄 수 있다. 

얼마 전 아이가 그러더라. 

“아빠, 나는 세상에서 디즈니랜드 다음으로 재미있는 곳이 도서관이야.”

다행이다, 내가 만난 인생 최고의 행운을 아이에게 전해줄 수 있어서.


***<동네 책방 동네 도서관>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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