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직업의 날 행사에 다양한 직업인을 부릅니다. 아이들이 관심이 많은 직업은 연예인인데요. 부르기가 쉽지 않아요. 그때 저같은 방송사 피디를 부릅니다. 연예인을 가까이에서 보는 직업이니까요. 예전에 한 진로 특강에서 궁금한 게 있으면 물어보라 하니까 어떤 녀석이 이렇게 묻더군요.
"아저씨가 김태호 피디나 나영석 피디보다 더 유명해요?"
"아저씨가 김태호 피디나 나영석 피디보다 더 유명해요?"
이름 없는 피디가 와서 실망했나봐요. 뼈를 때리는 질문에 애써 웃습니다.
"아니요, 그분들이 훨씬 더 유명하지요. 그런데 그 분들은 바빠서 못 와요."
"아니요, 그분들이 훨씬 더 유명하지요. 그런데 그 분들은 바빠서 못 와요."
학교 진로 특강은 누가 갈까요? 유명한 피디가? 아니요, 저처럼 사연이 많은 사람이 갑니다. 아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많은 사람이요.
어제 올린 글에서 이권우 선생님이 디스를 빙자한 극찬을 아끼지 않은 저자가 이정모 선생님입니다. 저도 예전에 <저도 과학은 어렵습니다만>을 소개하는 글을 쓰며 저자를 칭송한 적이 있지요.
부지런하신 저자분이 벌써 히트작의 속편을 내셨습니다. <저도 과학은 어렵습니다만 2> (이정모 / 바틀비) 이정모 선생님도 진로 특강을 자주 다니시지요.
'청소년들이 제게 가장 많이 묻는 질문은 "관장님은 과학을 얼마나 좋아했기에 과학자가 되었나요?"라는 것입니다. 제가 물론 과학과 수학을 싫어하지는 않았습니다만 좋아하는 과목은 따로 있었죠. 체육과 음악입니다. 그런데 제가 아무리 체육과 음악을 좋아한다고 해도 이걸 직업으로 삼으면 먹고살 방법이 없겠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싫어하지 않으면서 제법 잘했던 걸 직업으로 삼게 된 것 같습니다.
저는 과학자가 아닙니다. 한때는 과학자였지만 지금은 과학 행정가이고 과학 거간꾼이죠. 흔히 말하는 사이언스 커뮤니케이터 말입니다. 시민들은 자신의 세금으로 진행되는 과학 연구에 대해서 알고 싶어 합니다. 당연한 권리입니다. 하지만 과학자들은 바쁩니다. 그래서 그 사이에서 복덕방 역할을 하는 사람이 필요하지요. 아이들과 성인들을 위한 과학책을 쓰고 영어와 독일어 과학책을 열심히 번역했습니다.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고 도서관과 학교에 가서 강연도 많이 했습니다. 방송도 몇 번 했고요. 그랬더니 신문사에서 요청이 왔습니다. 과학 칼럼을 써달라는 것이죠.'
(위의 책 서문 중에서)
사람들을 만나 글을 쓰라고 권하면, '아이구, 저는 아직 제 얘기를 글로 쓸만큼 대단한 사람이 아닙니다.'하고 겸손을 표하시는 분이 많아요. 글은 누가 쓸까요? 사명감을 가진 사람이 씁니다. 사람들에게 이 이야기는 꼭 들려주고 싶다는 사명감을 가진 이들은 아무리 바빠도 짬을 내거든요.
이정모 관장님은 독일 유학 시절에 구두 시험을 봤는데요. 그때마다 교수와 1대1로 앉아 묻고 답을 하는데, 독일어도 서툰데다 암기도 잘하지 못해 좋은 성적을 받기 어려웠대요. 교수님에게 이런 푸념을 합니다.
'"교수님, 제가 굳이 이곳 독일까지 유학을 온 이유가 있습니다. 독일은 무턱대고 외우게 하는 암기 중심의 교육이 아니라 이해 중심의 선진 교육을 한다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한국보다 암기를 훨씬 더 많이 요구하고 있습니다."
교수님은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빠른 속도로 대답했다.
"아니, 누가 그런 쓸데없는 소리를 했는가! 학습은 암기일세. 자네 머릿속에 있어야지 책 속에 있는 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번쩍이는 아이디어는 책이 아니라 자네 머리에서 나와야 하네. 그러니 열심히 암기하게나."
그리고 덧붙였다.
"이해는 완전한 암기를 위한 준비과정이지."
(...)
암기를 즐겨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귀찮고 피곤하며 짜증나는 일이다. 그런데 이런 암기를 즐기는 사람들이 있다. 주로 창의력이 뛰어난 사람들이다. 창의력이 뛰어난 사람들은 암기도 잘한다. 왜냐하면 암기에도 창의성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들이라고 한 번 보고 암기할 수 있는 재주가 있는 것은 아니다. 자기만의 스토리텔링이 필요하다. 여기서 말하는 스토리란 그야말로 이야기일 수도 있고 머릿속에 그리는 한 편의 그림일 수도 있다.
창의성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반복이다. 생화학을 공부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5개의 핵산 염기와 20가지의 아미노산, 그리고 수십 개의 탄수화물 구조를 암기해야 한다. 이해할 게 하나도 없다. 무조건 외워야 한다. 이걸 암기하지 못하면 생화학 공부는 한 발짝도 앞으로 나갈 수 없다.'
(위의 책 12쪽)
창의성보다 중요한 건 반복이라는 말씀이 와 닿아요. 영어 공부가 그렇거든요. 문장 암기라는 틀을 닦아둬야 조합을 통해 회화를 자유로이 구사할 수 있어요. 원어민 회화 수업을 통해 영어를 이해하는 건 한계가 있어요. 내 머릿속에 기초 회화 구문이 있어야 이해가 더 쉬워집니다. 이정모 선생님을 볼 때마다 가장 부러운 건 다작의 능력입니다. 일주일에 칼럼 몇 개를 동시에 마감하는데 글을 볼 때마다 감탄합니다. 비결이 무엇일까요?
'남보다 원고를 쓰는 기준이 낮은 거예요. 역사에 남을 불후의 명작을 쓰는 게 아니잖아요? 글은 콘텐츠와 구성, 문장으로 이뤄지는데 문장력은 타고나는 것이라 한계가 있지만 구성은 노력 여하에 따라 확 달라집니다. 타고난 문장가가 아닌 사람은 정해진 시간 안에 구성을 잘하는 게 핵심입니다. 칼럼을 쓸 때는 무조건 1시간 30분 안에 쓰겠다고 마음먹고 자리에 앉아요. 글감을 찾거나 관련 자료를 읽는 등의 사전 작업은 제외하고요. 보통 새벽에 글을 쓰는데 딱 1시간 30분 안에 씁니다. 그 후에 마감 시간이 되기 전에 다시 꺼내 읽으면서 한번 퇴고한 뒤 보내지요.'
(위의 책 287쪽)
기준이 낮다니, 이분도 참 엄살이... 선생님은 대학 2학년 때부터 야학 교사를 하셨답니다. 야학 학생들은 낮에 일하고 피곤에 지친 채 공부하러 오지요. 그런 학생들이 조금이라도 더 쉽게 배울 수 있는 방법을 오래 고민하셨대요. 전문가가 아닌 사람들에게 뭔가를 쉽게 설명하는 노하우는 그때 늘었다고 하십니다. 저도 야학에서 생물을 가르쳤는데요. 원래는 영어를 가르치고 싶었는데, 영어 교육학을 전공한 야학교사들이 많았어요. 이과생은 드무니까 과학 과목을 맡아달라고 하더군요. 어려운 이야기를 쉽게 하는 게 중요하다는 걸 그 시절에 깨달았어요.
책장을 넘길 때마다, 어려운 과학 이야기도, 관장님의 손끝에서 쉽고 재미난 화제로 바뀌는 놀라운 기적을 봅니다.
'털보 과학관장과 함께라면 온 세상이 과학!'
믿고 읽는 저자의 믿고 보는 속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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