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짠돌이 독서 일기

오보의 역사를 기록하다

by 김민식pd 2019. 2. 20.
좋아하는 저자가 신간을 내면, 얼씨구나 신이 나 서점으로 달려갑니다. 1월 30일에 나온 <뉴스와 거짓말> (정철운 / 인물과 사상사), 2월 2일 서점에서 샀어요. 한국 언론 오보의 역사를 다룬 책이지만, 낄낄 거리며 읽었어요. 이승만 대통령을 한자로 표기하면서 클 대大자 대신 점 하나가 더 찍힌 개 견 犬 자를 쓰는 바람에 신문에 大統領 대신 犬統領이라고 나갔어요. 대통령을 개로 만든 바람에 곤혹을 치른 신문사 이야기... (사건 이후로는 대통령이란 글자 3개를 통으로 묶은 활자 조판을 만들었다고...) 동물원에서 찍은 벵골산 호랑이 사진을 신문사에 보냈는데, 멸종된 한국산 호랑이 발견!이라고 호들갑을 떤 것도 웃겼어요. 
2017년 4월 1일 만우절날, 데니스 홍 교수는 페이스북에 이런 농담을 올렸어요. '지난 주 아마존 제프 베조스 회장을 만나 비밀 미팅을 하고 비행기 조종 트레이닝을 받았다' '민간 우주 비행사 중 1명으로 선정되어 이제 우주로 간다'고요. 만우절 농담임을 인지하지 못한 기자들이 특종으로 보도합니다. 홍 교수는 동행할 우주비행사들의 이름을 이렇게 적었는데 말이지요. 'Chum Taboa' (첨 타봐) 'Wooju Ghanda' (우주 간다).

시트콤 피디로 일하면서 가장 긴장되는 순간은 웃음 더빙할 때입니다. 녹음실에 50명의 방청객을 앉혀놓고 시사를 합니다. 일주일간 촬영하고 편집한 내용을 함께 보는데요. 여기서 녹음한 웃음소리가 시트콤에 깔리는 방청객의 리액션이에요. 시트콤을 규정하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입니다. 때로는 웃겨야 할 장면에서 웃음이 터져나오지 않아 난감할 때가 많아요. 대본 회의나 리딩 때는 웃음이 터져나온 장면인데, 내가 찍어놓으니 재미가 없는 거죠. 쥐구멍이 있으면 숨고 싶어요. 웃기지 못하는 피디는 죄인이라 느꼈는데요. <뉴스와 거짓말>을 보고 느꼈어요. 분노를 자극하는 거짓 뉴스에 비하면 애교였구나.....
 
<미디어오늘>의 정철운 기자가 책에서 21세기 최악의 조작 방송으로 꼽는 '찐빵 소녀' 사건. 2008년에 휴게소를 운영하는 부부가 정신장애인을 고용해 강제로 일을 시켰다는 SBS <긴급출동 SOS24> '찐빵 파는 소녀' 방송이 나갑니다. 그 뉴스를 보고 많은 시청자들이 분노하지요. 

방송 이후 휴게소 부부는 '휴게소에서 지적 장애가 있는 소녀를 4년간 구금한 채 임금도 주지 않고 막일을 시키며 찐빵을 팔게 한 뒤, 찐빵을 못 팔면 칼과 흉기로 온몸을 찔러 상해를 입히고 외부 사람들이 상처를 물으면 자해했다고 대답하도록 교육을 시킨' 파렴치범이 되었다. 제작진은 '정신병원에서 치료를 받게 해 진실을 이야기하게끔 도와주고 휴게소 주인을 고발해 구속시키고 소녀를 평온한 가정으로 돌려보낸' 정의의 파수꾼이 되었다.

(214쪽) 

부부 중 아내는 상습 폭행 혐의로 구속되고요. 6개월 넘게 감옥에 갇히고 심지어 징역 5년형을 구형받습니다. 지적장애자를 착취한 악당으로 방송에 나간 탓에 사회적으로 생매장 당하는데요. 알고보니 이들은 방송 조작의 피해자입니다. 이들을 폭행범으로 몬 주요 공소사실은 나중에 무죄로 판결 납니다. 애꿎은 욕받이로 살고 억울한 옥살이까지 했지만, 정작 무죄 판결이 난 다음에 부부에게 사과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그들은 자신들의 억울한 사연을 알리고자 방송사와 신문사에 전화를 걸지만 아무도 들어주는 이가 없어요. 언론사는 침묵의 카르텔입니다. 동종업계의 치부를 들추는 일은 하지 않아요. 그 탓에 거짓 뉴스가 만연하는 거죠. 결국 부부는 미디어를 감시하는 미디어, <미디어오늘>의 사무실로 전화를 겁니다.     

2010년 어느 여름날, 편집국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내가 넘겨받은 전화 내용은 쉽게 믿기 어려운 단어로 가득했다. 조작 방송, 무죄, 정신병원, 혈흔, 국과수, 구속...... 제보자는 "MBC, KBS, 한겨레, 경향신문 아무 곳도 기사를 써주는 곳이 없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잘못 걸렸다' 싶었다. 
하지만 거짓말을 한다고 판단하기에는 구체적이었고 수화기 너머로 억울함과 간절함이 느껴졌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 내용이 뒤죽박죽이었다.

(<뉴스와 거짓말> 218쪽)

인터넷 게시판 문화가 활성화되기 전인 1990년대, 저도 가끔 MBC 사무실에서 근무하다 제보 전화를 받을 때가 있어요. 억울한 일을 겪은 이들이 방송에 호소하는데, '잘못 걸렸다'고 생각하지요. 정철운 기자는 전화의 주인공을 만나러 갑니다. 여기서 반전이 시작됩니다. SBS 제작진을 상대로 취재를 시작하고 2010년 6월에 이 사건을 기사화합니다. 누군가 자신들의 억울한 사정을 들어주고 방송의 거짓말에 대해 이야기한 순간, 부부는 힘을 얻지 않을까요? 2010년 11월, SBS를 상대로 명예훼손에 따른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시작합니다. 약자의 반격이 시작되지요.

그리고 1심 법원은 2012년 2월 23일 선고에서 " 이 사건 방송 내용은 허위 사실일 뿐 아니라, 제작진이 이미 자신들만의 사실과 결론을 도출하고 줄거리를 구상한 다음 이에 맞추어 취재 및 촬영을 진행하고 줄거리에 맞게 편집해 제작한 악의적인 프로그램'이라고 결론 냈다. 

(220쪽)

이 사건 판결은 2013년에 고등법원에서 최종 확정되고요. SBS가 휴게소 가족에게 지급할 위자료 액수를 3억 원에 산정해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내립니다. <긴급출동 SOS24>는 2011년에 폐지되었고요. 사건의 결말은 이러했으나 이들 가족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이들은 거의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았습니다.  

대다수 언론인이 '기레기'로 취급받는 현실에서 기억해야 할 역사가 있다면 그것은 '오보의 역사'다. (...) '기레기 저널리즘'은 오보의 시대와 무관치 않다. 더욱이 오늘날 한국 사회는 유튜브를 중심으로 한 극우의 가짜 뉴스로 혐오와 갈등이 확산되고 있다. 가짜뉴스의 득세는 그동안 실패를 반복해온 저널리즘이 자초한 일이다.
오보를 기록하는 이유는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다. 이 책은 훗날 언론계 선배들의 발자취를 따라갈 후배들과 슬기로운 시민들을 위해 쓰였다. 

(13쪽)

저는 개인적으로 정철운 기자를 좋아합니다. 그는 진짜 파이터거든요. 정의감이 투철하기로는 뒤지지 않는 또다른 파이터, 주진우 기자는 책의 추천사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저널리즘은 죽었다. 기자는 멸종 위기다. 팩트가 대수인가? 돈이 중요하지. 정의가 소용 있나? 승진이 먼저지. 정철운은 기자다. 기자가 저널리즘의 본질과 가치를 이야기하고 있다. 오보를 통해서. 보존 가치가 있다. 
-주진우 <시사IN> 기자

피디나 기자 지망생들에게 꼭 추천하고 싶은 책이고요. 가짜 뉴스의 폐해에 대해 고민하는 독자에게도 권하고 싶습니다. 가짜 뉴스를 없애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가짜 뉴스를 기록하는 일입니다. 가짜 뉴스를 통해 누가 어떤 이득을 보았는지 따져보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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