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짠돌이 독서 일기

창의성이라는 유령

by 김민식pd 2019. 2. 27.

요즘 저의 독서 친구는 큰 딸 민지입니다. 고 3 올라가는 민지는 지난 겨울방학 동안 읽을 책을 몇 권 샀고요. 읽고 좋은 책은 제게 권해줍니다. 작년 봄 민지가 <무례한 사람에게 웃으며 대처하는 법>을 제 책상에 올려두고 갔어요. 덕분에 재미나게 읽었지요. 책을 보며 많이 배웠어요. '아, 자칫하면 나도 무례한 꼰대가 되겠구나', 하고요. 어린 민지에게 무례한 사람 대처법이, 제게는 '무례한 사람이 되지 않는 법'이에요. 드라마 피디가 장래 희망인 민지는 요즘 창의성에 대해 공부를 하고 있어요. 얼마 전 제게 권해준 책은 <재능과 창의성이라는 유령을 찾아서> (강창래 / 알마)입니다. 

창의성을 가장 잘 배우는 방법 역시 '전수받거나 습득하는 것'이다. 세 가지 방법이 있다. 스승과 함께 직접 부대끼면서 배우는 방법, 강의를 듣는 방법, 책을 읽는 방법이다. 사람들은 첫 번째나 두 번째 방법을 늘 최고라고 한다.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인류는 그게 무엇이든 중요한 것들은 책을 통해 그 비법을 내리물림해왔다. 사람들은 책을 통해 배웠고 현실에 적용하면서 책 속에 담긴 대가의 수준을 넘어섰다. (중략)

"천재는 열심히 하는 사람을 이기지 못하고 

열심히 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을 이기지 못한다."

나는 시대착오적인 옛말이 많다고 생각하지만, 이 말에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이제 우리는 100년 이상 살 것이다. 지금 20대라면 150년을 살지도 모른다. 살아내야 할 세월이 엄청나게 길어졌다. 50년이나 60년 동안 같은 일을 한 대가들이 등장할 것이다. 그 긴 세월을 생각하면 즐기지 않고 그 일을 계속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즐겁다면 계속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서문 '그저 재미있으면 좋겠다' 중에서)


매일 한 편씩 글을 올리지만, 어떤 글을 쓸 것인가는 늘 숙제입니다. 제가 가장 즐겨쓰는 방법은, 일단 평소에 메모를 많이 해두는 것입니다. 대화 중에도 상대방의 말 속에 배울 점이 있으면 잠시 양해를 구하고 바로 휴대폰을 꺼내어 기록해둡니다. 페이스북을 보다가도 좋은 글이 있으면 메모로 옮겨두고요. 걷다가도 글감이 떠오르면 잠시 산행로에서 벗어나 휴대폰에 메모를 합니다. 메모장에는 지금 586개의 메모가 있습니다. 시간이 날 때마다 메모를 들여다보며 글로 다듬습니다. 메모 중에서 블로그 글로 만드는 건 소수고요. 또 비공개 글 중에서 발행까지 가는 것도 추립니다. 일필휘지로 명문을 써내려가고 싶지만 그럴 능력이 안 됩니다. 수많은 글감과 초고를 쓰고, 다듬고 다듬어 겨우 한 두개 건지는 수준입니다. 즉, 제가 글을 쓰는 방식은 많이 쓰고, 많이 버리는 것입니다. 

과학자 아이작 뉴턴도 메모광이었답니다. 메모를 너무 많이 해서 역사학자나 전기 작가들을 당황케 했지요. 뉴턴의 메모를 보면, 연금술에 빠져 철학자의 돌을 찾거나 (네, 해리 포터 1편에 나온 그 연금술사의 돌이요.) 점성학, 장미십자회 등의 신비주의에 집착한 내용도 있답니다. 심지어 솔로몬의 성전 설계도를 구하면 우주의 신비를 밝힐 수 있다고 믿었다니, 이분 우리가 아는 그 위대한 물리학자 맞나요?


뉴턴은 평생 낙서하기를 즐기다가 그 낙서들 가운데 기가 찬 몇 가지 생각을 잘 정리해서 사람들에게 알렸고, 그것이 그를 최고의 과학자로 만든 셈이지요. 그 '과학'이 인류의 삶을 바꾸었다고 볼 수 있고요. 이 문제에 대해서도 니체도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어요. 

'비밀스럽고 금지된 힘을 갈구하고 열망했던 마법사와 연금술사, 점성가와 요술쟁이들이 없었다면, 과연 과학이 생겨나서 위대해졌을 것이라고 믿는가?'

(위의 책 199쪽)


창의성의 핵심은 무엇일까요? 그 쓸모를 따지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이게 무슨 쓸모가 있어?' 라고 묻는 순간 재미가 사라져요. 쓸모와 관계없이, 그냥 재미있어서 막 하다 보니 어쩌다 얻어걸리는 게 창의성이고요. 성과가 없어도 과정이 즐거웠으니 되었다, 라고 생각하는 게 창작자의 자세가 아닐까 싶습니다. 

20년 간 TV 시트콤과 드라마를 만들고 내린 결론, 대박의 법칙은 없어요. 어쩌다 얻어 걸릴 뿐이지. 결국 얻어걸릴 때까지 버티는 사람이 유리한 게 콘텐츠 시장이에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빈부격차가 심해지는 이유가 뭘까요? 부자에겐 실패를 용인할 여유가 있고, 가난한 사람은 소득이 없는 시간을 버틸 재간이 없기 때문이지요.

창작자로서 우리는 마음의 부자가 되어야 해요. 자신에게 너그러워야 합니다. 내가 만든 게 재미있다고 믿어야 하고, 내가 하는 일이 의미가 있다고 믿어야 해요. 주위에서 아무리 뭐라 해도 버텨야해요. '공대생이 영어 소설 읽어서 어디 쓰겠냐?' '시트콤 피디가 영어 학습서를 쓴다고 누가 보겠냐?' '블로그에 매일 글 쓴다고 돈이 나오냐?' 남들은 우리를 타박해도 나 자신에게 너그러워야해요. '재미있으면 되지, 뭐가 더 필요해?' 하고요. 


재능과 창의성이라는 유령을 찾아서 서가 사이를 헤매는 모든 창작자들을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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